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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immediately),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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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473회 작성일 10-07-0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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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immediately), "떠나라."      

마14:22~33

2010. 7/4 0800, 11:00

Just do it.

그리스의 ‘알카아스’(Alkaas) 왕 이야기다. 왕이 궁중연회를 베풀었다. 왕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라고 하였다. 연회장 분위기가 절정을 이르렀을 때 누군가가 왕에게 편지 한 장을 주었다. 왕은 이 편지를 받자 잔치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으니 나중에 읽겠다며 옆에다 두었다. 얼마 후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무희(舞姬) 중 한 사람이 칼을 뽑아들고 왕에게 달려들어 왕을 찔렀다. 그리고 왕은 그 자리에 피를 흘리며 죽었다. 참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왕이 놓아두었던 편지를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왕이시여! 잔치 참석자 중에 자객이 있다는 정보가 있으니 속히 잔치를 파하시고 몸을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960~70년대에 ‘아디다스’(adidas)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포츠신발브랜드였다. 그런데 몇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아디다스를 넘어서는 신발회사를 세우겠다고 했다. 이들의 무모한 도전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고, 시작부터 많은 벽에 부딪쳤다. 자신들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탁상공론만 늘어놓았다. 그 때 누군가가 ‘Just do it’(지금 바로 실행하자!)라고 했다. 일단 도전해 보자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말에 동의하여 곧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Just do it’은 이 회사의 슬로건이 되었고, 그들은 이 슬로건을 티셔츠에 새겨 입고 다녔다. 이 회사가 바로 ‘나이키’(Nike)다. 지금 나이키는 아디다스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신발업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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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건은 사소한 결단이 재앙의 통로가 될 수도 있고, 또한 꿈을 이루는 통로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 적절한 ‘때’(timing)가 있다. 알카아스 왕처럼 그 때를 놓치면 비참한 결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를 선용하는 비결은 ‘바로 지금’이다. 적절한 때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즉시(immediately) 실행하는 사람은 그 때를 얻을 수가 있다. 나이키 창업자들이 그 좋은 예다.

 

‘즉시’ 떠나게 하심(22).

예수님은 이 ‘즉시’를 제자됨의 조건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2).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지 않고 미루거나 지체하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이 그렇다.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부르심에 ‘곧’(즉시) 응답했던 사람들이다(마4:18~22, 9:9 등). 은혜의 사건, 구원의 사건도 현재성과 즉시성을 강조한다(고후6:2). 그래서 이 시간에는 ‘즉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하는데, 본문에 이 표현이 세 번 나온다. 한 번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이고(22), 두 번은 주님이 보여주신 것이다(27,31). 오늘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첫 번째 ‘즉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조금 전 주님은 갈릴리 초원에서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덩어리를 가지고 장정만 오천 명이 먹고 12광주리를 남기는 전무후무한 기적을 행하셨다(13~21). 그런데 이 기적에 대한 감동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주님은 제자들을 즉시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도록 재촉하시고, 친히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셨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22). 우린 여기서 의도적으로 군중과 제자들을 떼어놓으려 하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제자들이 기적의 현장에 남아서 기적을 경험했던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원치 않았을까?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을 서둘러 돌려보냈을까? 혼자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을까?(23).

 

신앙의 도구화를 경계하라.

요한복음(네 복음서에 다 나옴)에도 동일한 기사가 나오는데(요6:1~15), 그곳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다.

 

“그 사람들이 예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4,15).

 

이는 주님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로서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먹는 문제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다. 이것은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앞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모든 통치자들이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민주정부 10년 동안 많은 부분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경제정책의 실패로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을 듣게 되었고, 여러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현재 정부가 정권을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미화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질병문제까지 해결해 주셨다. 예수님만 계시면 먹는 것도, 병도 다 해결되니 사람들이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신앙의 동기가 아닌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주님을 자신들의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도구로 전락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을 서둘러 돌려보냈던 것이고, 제자들을 저들에게서 떼어놓으셨던 것이다.

 

신앙을 도구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마귀의 전형적인 술책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마귀에게 받으셨던 세 가지 시험(마4:1~11) 중에 돌로 떡이 되게 하여 먹으라는 것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는 신적인 능력을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는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고, 거룩한 성전을 자신의 명예를 얻는 도구로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주님은 이런 마귀의 시험을 단호하게 물리쳤다. 그런데 오병이어기적 후에 또 그 시험이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다.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섬기는 종으로 오셨지, 군림하는 왕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막10:45).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기적을 베푸신 것이지(14,16), 사람들에게 명예를 얻고 왕이 되기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시험에 제자들이 빠지지 않도록 즉시 그곳을 떠나도록, 그 사람들을 떠나도록 하신 것이다. 사람이란 별 수 없다. 같이 있으면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우리 역시 우리의 신앙을 항상 점검해야 한다. 주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주님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혹 그런 부분이 있다면 즉시 떠나보내야 한다. 그리고 마귀의 이런 유혹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능력을 경험했을지라도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없다. 본문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베푸신 기적의 현장에 있었고, 그 기적을 보았고, 그 기적을 경험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과 함께 있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들을 다 돌려보내셨다.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공에 대한 기억을 빨리 잊어라.

거안사위(居安思危)란 말이 있다. 평안할 때 위태함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방심(放心)을 경계하는 말이다. 흔히 오르막이 내리막보다 안전하고, 짐을 지고 가는 것이 빈 짐으로 가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말한다. 이는 편하다고 가볍다고 방심하다가 낭패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번영 속에서 쇠망을 생각하고, 성공 속에서 실패를 생각한다. 평안할 때 위태함을 생각한 것이다. 이번 월드컵 방송에서 해설자가 골이 난 다음 골을 넣은 기억을 빨리 잊어야한다고 충고하는 말을 들었다. 승리에 도취되어 방심하다 실점으로 이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골을 넣은 다음 곧 실점을 한 경우가 많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역사가 토인비(A. J. Toynbee)는 ‘역사적 성공의 반은 죽을지도 모를 위기에서 비롯됐고, 역사적 실패의 반은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위기의식이 성공을 낳고 성공의식이 실패를 낳았다는 것이다.

 

클라우드 페퍼(C. Pepper)는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계속 페달을 밟는 한 당신은 넘어질 염려가 없다.’고 했다. 많은 경우 한 번의 성공으로 칭찬을 받고 지지를 얻으면 그 맛에 도취되어 독선과 안하무인(眼下無人) 상태로 가기가 쉽다. 이것은 마치 성공이란 어느 지점에 도착하여 자전거의 페달을 멈추는 것과 같고, 그러면 자전거는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삶은 여정이다. 성공이나 실패는 인생이란 여정 속에 있는 하나의 점과 같다. 그러므로 그 점을 뒤로 하고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한다. 이것이 넘어짐을 극복하는 비결이다. 이 점이 오늘 본문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다.

 

본문에서 엄청난 흥분과 감동, 성취를 경험한 제자들에게 주님이 그 장소를 즉시 떠나도록 재촉하심도 여기에 있다. 당시 상황을 상상해 보면 제자들이 받았을 감동, 흥분, 기쁨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따르는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했으니 마음이 얼마나 부풀었겠는가! ‘이제야 우리도 어깨 쭉 펴고 살날이 오는 구나!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보람을 찾겠구나......’ 그런데 주님은 매정하게도 그 자리를, 그 사람들을 즉시 떠나라고 재촉하셨다. 이는 성공에 대한 기억, 그 감동과 흥분, 기쁨을 속히 잊고 평정심을 가지라는 뜻이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건너야할 강(현실인식)이 있고, 목적지인 저 건너편(목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올바른 현실인식과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전진하라는 것이다. 특히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제자의 길, 신앙의 길, 나아가서 인생길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준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즉시 그곳을, 그 사람들을 떠나도록 재촉하신 것은 이런 험난한 길을 가야할 제자들이 한순간의 달콤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신 것이다.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정말 깨어서 경계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의 늪에 빠지고 마는 것이 인생이다. 성공이든 실패, 그것이 무엇이든 뒤로 하고 ‘즉시’ 떠나는 것이 중요하다. 머뭇거리면 붙잡히고, 멈추면 넘어진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시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22,23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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