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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immediately)Ⅱ, “위로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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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311회 작성일 10-07-18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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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immediately)Ⅱ, “위로하심”     

마14:22~33

2010. 7/18 08:00, 11:00

총알택시 운전사와 목사

총알택시 운전사와 목사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었다. 운전사는 곧바로 천국에 보내지고 목사는 대기 중이었다. 목사는 불편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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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평생 영혼을 돌보았던 저는 대기 중이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운전사는 천국으로 보내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했다.

 

‘너는 설교할 때마다 신자들을 졸게 만들어 많은 신자들을 신앙에서 넘어지게 하였지만, 저 총알택시 운전사는 미지근한 신자들을 깨어서 기도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혼에 대한 울림이 없는 메마른 설교를 하는 설교자를 비꼬는 이야기다. 하지만 몇 가지 소중한 교훈을 준다. ①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을지라도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또한 사람을 세워주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게 하고, ②불안이나 두려움이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병의 70%가 마음의 문제라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불안과 두려움이 가장 심각한 영향을 준다. 그런데 이 불안과 두려움은 죄를 범한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현상이다. 성경을 보면 이런 심리현상이 인간에게 최초로 드러나게 된 것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한 직후였다(창3:8,10). 물론 불안과 두려움이 죄의 결과로 인한 형벌이긴 하지만 앞의 유머처럼 이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영혼의 경보장치다.

오히려 불안(두려움)을 마음의 ‘경보장치’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불안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서적 반응으로 어떤 위협에 대하여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용을 한다. 괜히 마음이 불안하고 두렵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다. 이 신호가 작동하면 위험상황에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게 되거나 민첩하게 도망가는데 필요한 근육이 긴장된다. 또 근육에 더 많은 산소와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빠르고 강하게 뛴다. 사람들이 이 덕분에 정신을 차려 각종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신자의 삶 가운데도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불안과 염려,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안주하거나 잠들지 않고 깨어있도록 하기 위한 영혼의 경보장치인 셈이다. 본문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고난을 당한 사건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이 사건이 오병이어 기적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오병이어 사건에 이어 기록된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임의로 결정하여 풍랑을 만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데도 만난사건이라는 점이다. 대개 성공을 경험하면 긴장을 풀게 된다. 성공 후에 무너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로 경계를 삼았다. 마찬가지로 풍랑사건이 오병이어 사건에 이어서 기록된 것은 어떤 경우에도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풍랑은 자연현상이지만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다. 무엇보다 마태복음이 훈련의 책으로 ‘제자의 도’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더욱 분명해 진다. 그러므로 이 풍랑사건은 제자(신앙)의 길과 그들의 한계를 보게 한 것이다. 제자(신앙)의 길은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와 같고, 바다나 바람 그리고 배에 대한 지식, 기술, 경험으로 풍랑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과 한계가 우리의 삶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면 이를 넉넉히 극복할 수 있음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태도

사실 제자들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풍랑은 삶의 일부분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겐 바람이 분다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늘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과 싸우며 살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진짜 문제는 풍랑보다는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에겐 무엇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우리보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해놓고, 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고 질문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뜻하지 않는 고난 앞에 우리가 자주 하는 원망을 품은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면 주님은 정말 제자들의 어려움을 외면했을까? 그렇지 않다.

 

1. 주님은 고난당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셨다.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막6:46~48). 주님은 산에서 기도하셨고, 제자들은 바다에서 풍랑과 싸우며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이 당한 그 고난을 보셨다. 비록 주님은 제자들이 당한 고난의 현장에 계시진 않았으나 그들이 당한 어려움을 다 보고 계셨다.

 

본문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라. 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주님은 너를 보고 계신다. 그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친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그는 외치고 있다. 주님의 시선이 늘 우리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풍랑이 아니다. 그것의 크기도 문제가 아니다. 주님의 시선이 문제다. 주님이 내가 당한 상황, 환경, 문제를 보고 계시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관건은 주님의 시선을 내게로, 내 문제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 비결이 ‘기도’다. 기도는 주님과 세상을 향한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동시에 주님의 시선을 내게로 끄는 비결이기도 하다.

 

2.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 고난의 현장으로 오셨다.

25절,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주님은 제자들이 당한 고난을 보고만 계시지 않고, 물 위를 걸어서 고난의 현장에 오셨다. 여기 “바다 위로 걸어서” 오셨다는 말씀은, ①제자들이 참으로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뜻함, ②고난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함, ③주님이 풍랑을 다스리시는 분, 풍랑을 이기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엄청난 큰 사건, 절박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그 사건이나 상황보다 크시고, 그것을 넉넉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이심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어도 문제없다. 주님이 내게로 오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밤 사경에”라고 주님이 찾아오신 시간이 명시되어 있다. 이는 제자들이 당한 상황의 심각성과 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밤 사경은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로 아침이 밝아오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이고, 가장 깊은 잠에 빠져든 시간이다. 제자들은 가장 어두운 시간, 주체할 수 없는 잠에 빠져드는 그 시간에 풍랑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당한 어려움이 얼마나 심각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마귀의 시험은 이와 같이 우리의 약점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때문에 우리는 그 시험에 쉽게 무너지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그 칡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제자들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보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어두움을 뚫고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오셨다. 이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 사랑의 높이와 깊이, 넓이를 보여준다. 그렇다. 사랑하면 보이고, 사랑하면 들린다. 아니 사랑한 만큼 보이고. 사랑한 만큼 들린다. 그리고 이 사랑의 출처 또한 기도다. 주님은 밤 사경까지 주무시지 않고 깨어있으셨다. 모두가 잠든 시간까지 깨어서 기도하셨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한 것이다. 주님처럼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생긴다. 뜨거운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 그가 처한 현장으로 달려가게 되고, 그를 돕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런 주님의 마음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주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산에서 제자들의 곤경을 보신 주님은 즉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25).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유령이 나타났다며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26). 이는 당시 제자들의 심리상태를 잘 반영해 준다. 그들은 주님을 유령으로 생각할 만큼 심각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과도한 불안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현실인식에 문제가 생긴다. 사물을 바로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과도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적당한 불안은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긍정적인 기능을 하지만 과도한 불안은 파괴적이다. 이 때 제자들의 심각성을 파악하신 주님은 ‘즉시’ 말씀하셨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천지를 창조하셨던 그 능력의 말씀이 제자들의 모든 상황을 순식간에 역전시켰다. 주님의 이 위로의 말씀을 듣는 순간, ①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졌고, ②어둠 속에 찾아오신 주님이 보였다(28/“만일 주시어든”→“과연 주님이신 고로”). ③(비록 실패하긴 했지만)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바람에 요동치고 있는 그 바다 위를 걷겠다고 도전하는(28) 용기를 갖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우리의 모든 상황은 끝이 난다. 주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특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현장에 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복된 귀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믿음이란 이런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생겨나고, 이 믿음이 있을 때 어떤 종류의 풍랑도 두려워하지 않고 넘어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고난의 자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사실이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외면하시거나 그냥 지나쳐 가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인생의 풍랑과 맞서 싸우고 있고, 그 싸움에서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며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목회심리학자 게리 콜린스(G. R. Collins)는 불안을 ‘이 시대의 공식적인 감정’, ‘이 시대에 가장 만연된 심리현상’이라고 했다. 불안이 현대인과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심리현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인과 현대의 문제만이 아니고 아담이후 계속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런 파괴적인 적과의 동침이 우리의 삶이다. 이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고(26), 붙잡으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길이다(31).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주님의 태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그것은 주님의 음성에 즉시 응답하는 것이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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