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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갈망하라.(0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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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8,550회 작성일 06-07-04 14:36

본문

하나님을 갈망하라.                                                                
시42:1-11

어느 사냥꾼에게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사냥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갔습니다. 그는 숲 속에서에서 사슴의 발자국을 발견하곤, 아들에게 나귀와 함께 그곳에서 잠시 기다리게 한 다음 사슴을 뒤쫓았습니다. 사슴을 잡아 돌아와 보니 아들은 없고 나귀만 있었습니다. 나귀 곁에 아들의 피 묻은 옷과 뼈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맹수의 밥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냥꾼이 아들의 주검 앞에서 통곡을 하고 있을 때, 한 나그네가 그곳을 지나가다 사냥꾼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근심과 걱정이 없는 집의 솥을 빌려다 사냥감을 요리하면 당신의 슬픔은 사라질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사냥꾼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나는 특이한 사냥감을 잡았다오. 그런데 이 사냥감은 근심이나 걱정, 염려가 없는 집에서 빌린 솥으로만 요리를 해야하오. 그러니 걱정이 없는 집에 가서 솥을 좀 빌려오시오.” 집을 나간 아내는 마을에 걱정없는 집이 하나도 없었다며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이 사냥꾼은, “이제까지 우리 집엔 아무런 걱정이 없었는데, 이제 우리 집도 걱정이 하나 생겼다”며 아들의 죽음을 아내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근심이 없고,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근심과 걱정, 염려가 있습니다. 아무리 겉으론 문제없어 보이는 사람도 남모르는 아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걱정으로 잠 못 이룬 밤이 있습니다. 마치 바다에 이는 파도처럼 우리 마음속에는 근심과 걱정이 쉬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다에 파도가 있기에 바닷물이 썩지 않습니다. 특히 태풍과 같은 큰 바람이 불면 큰 파도에 의해 바다 속의 침전물들이 완전히 청소가 됩니다. 그러므로 태풍은 바다환경을 깨끗하게 만들어 바다생물들의 환경을 좋게 만들어 줍니다. 근심과 걱정, 염려도 태풍처럼 우리의 삶에 치명적이긴 하지만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엔 내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고, 남모르는 고뇌로 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더욱 힘든 것은 자신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잘 살고 잘 먹는 것 같아 속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히 이런 분들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는 분들을 위해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부디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봉독한 본문의 저자가 바로 이런 형편에 처해 있었습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본문의 내용을 통해 그의 사정은 알 수가 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치셨으며 잊었다고 고백합니다(7,9). 그 다음은 주변 사람들의 말로 인한 상처를 겪고 있습니다(3,10).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무엇을 해주더냐. 하나님이 너를 버린 것 아니냐 등. 이렇게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 뼈를 찌른 칼같이 아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낙망과 불안(5,11) 가운데 있습니다. 낙망은 마음의 가라앉음, 마음이 무너짐이고, 불안은 파도가 넘실대듯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낙망과 불안에 빠지는 것은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결국 저자는 하나님, 이웃, 스스로와의 관계에서 갈등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1. 암담한 현실 때문입니다(4,6). 저자는 지금 가고픈 곳에 가지 못하는 억류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변 환경을 맘대로 하지 못하고 그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저자가 한센스 병과 같은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한센스 병에 걸린 사람은 그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하고(사회적 죽음), 성전예배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종교적 죽음). 지금 저자는 이런 병에 걸려 격리 수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자를 다윗으로 보고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좌에서 쫓겨나 도피생활 중에 겪은 내용이라는 주장입니다. 아무튼 저자는 지금 암담한 상황에 묶여 있고, 어떻게 헤쳐 나갈 방법이 보이질 않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는 질식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2. 무능한 자아 때문입니다(2,6). 본문에 일인칭이 51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본문이 모두 11구절인데 각 구절에 최소 네 번 이상 사용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연민에 빠져 있고, 자기라는 감옥에 스스로 갇혀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면서 무능한 자아로 인해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상황에 묶여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무력감에 떨어지게 됩니다.

3. 비교에 의한 초라함 때문입니다(4). 옛날에는 성전에서 즐거운 생활을 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한 상황을 볼 때, 마음이 상한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갈수록 나아져야지, 나빠지면 초라해지고 낙심하게 됩니다. 또한 나보다 나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도 초라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초라함은 사람을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런 이유들로 저자는 지금 낙망하고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낙망이나 불안, 걱정이나 염려도 이 범주를 벗어나질 못할 것입니다. 암담한 현실과 이에 맞설만한 능력이 없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자아,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한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오는 초라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격고 있는 고통이고, 근심과 걱정의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42편은 성경에 기록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린 그 방법 또한 본문을 통하여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본 시편은 저자의 낙망과 불안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극복한 저자의 믿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였을까요?

1. 하나님을 갈망하라(1,2).
낙망과 불안은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신앙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낙망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인도 낙심하고 불안해합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란 시에 보면, 시인은 예수님을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예수님은 고뇌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에 하나님의 뜻인 범죄한 인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근심과 걱정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막14:34)고 자신의 심경을 떨어 놓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점은 근심과 걱정의 내용이 다릅니다. 불신자들의 염려와 걱정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로 귀착되는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것들입니다. 반면 신자의 염려와 걱정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소원과 뜻을 이루어 들릴까에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염려와 걱정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일어나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저자는 근심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낙망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았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생존하시는 하나님’(2), ‘생명의 하나님’(8), ‘반석이신 하나님’(9)이었습니다. 그는 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살다보면 염려와 걱정에 싸여 낙망하고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낙망하고 불안할 때 하나님을 갈망하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내 생각과 지혜와 환경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2. 믿음의 공동체를 사모하라(4).
저자는 성전에서 섬겼던 때를 사모합니다. 예배를 그리워하고, 성전을 그리워하고, 함께 했던 성도들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에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마18:20). 그냥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합심하여 기도하면 시행하신다는 약속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의 일종입니다(마18:19). 예배에 참석했을 때 그냥 눈물이 나고, 죄가 생각나고, 왠지 모르는 평안함이 넘쳐 나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하셔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모이기에 힘써야 하고, 공동체를 사모해야 합니다. 물론 신앙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 공동체를 통하여 치유를 받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 회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동체 자체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사모하는 기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 영적인 위로와 도전을 받고, 환경을 이고 자신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3. 자신에게 말하라(5,11)
저자는 낙망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의 영혼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격려합니다. 자신에게 말하면서 자신을 세워나가는 그의 모습을 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신앙인은 자기 영혼에게 말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비난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힘내라, 용기를 내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자다, 이 시험은 감당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환경에 질식하는 자아를 건져내고, 자기란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입니다.

대영박물관에는 세계 각국의 진귀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특히 그 박물관에 있는 것들 중에 방문객들의 눈길을 끄는 미술품이 하나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지막 한 수’라는 제목의 그림인데, 악마와 인간이 서양장기를 두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게임의 승리를 확신한 악마가 인간을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 작품을 자세히 보면 게임을 역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한 수가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희망과 용기를 얻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 아무리 어려운 형편, 벗어날 수 없는 처지라도 나에게 마지막 한 수, 내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음을 기억합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곁에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기억하면서 스스로에게 말하시기 바랍니다.  ‘힘내라, 용기를 내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자다, 이 시험은 감당할 수 있다.’

신앙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뿐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다면, 신앙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그렇게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라. 공동체를 사모하라. 자신에게 말하라. 그러면 암담한 현실과 무능한 자아로 인한 어떤 낙망과 불안 속에서도 주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이 지금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소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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