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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immediately)Ⅲ, “잡아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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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935회 작성일 10-07-25 18:29

본문

 즉시(immediately)Ⅲ, “잡아주심”        

마14:28~33

2010. 7/25  08:00, 11:00

Homo symbious.

작은 연못에 뱀장어 한 마리와 미꾸라지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뱀장어는 연못을 휘젓고 다니는 미꾸라지 존재가 무척 불편했다. 그래서 미꾸라지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들을 못되게 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뱀장어의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돌아다니다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미꾸라지 두 마리가 다 죽고 말았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뱀장어는 이 공간을 자기 혼자 누릴 수 있다는 게 너무 신이 났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해 뱀장어 역시 죽고 말았다. 그것은 죽은 미꾸라지의 썩은 물로 오염된 연못물을 마셨기 때문이다. 


다른 연못에는 금빛 물고기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금빛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어떤 물고기가 금빛 물고기에게 부탁을 했다. 자기에게도 비늘 하나만 떼어달라는 것이었다. 금빛 물고기는 기꺼이 금빛 비늘 하나를 떼어주었다. 그러자 금빛 비늘을 몸에 붙인 물고기도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떼어준 그 자리에서는 새로운 비늘이 돋아났다. 금빛 물고기는 자신의 비늘을 연못의 모든 물고기들에게도 하나씩 나누어 주었고, 그러자 연못 전체가 금빛으로 빛나게 되었다.


미래학자 최재천 교수는 21c형 인간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라고 했다. 이는 ‘공생인’(共生人), 즉 ‘더불어 사는 인간’이란 뜻이다. 두 연못 이야기는 더불어 사는 것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뱀장어처럼 다른 존재를 부정하면서 나 혼자만 잘살겠다는 것은 자신도 살수 없고, 금빛 물고기처럼 불편해도 다른 존재와 더불어 나누며 사는 것이 함께 잘사는 비결이다. 함께 살줄 안다는 것이야말로 성숙함의 징표다. 너를 위해 나의 욕망을 절제하고, 나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나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 그리고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돌보아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가치관이다. 사실 성경의 윤리는 ‘서로 함께’ 윤리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는 이 한 말씀 속에 다 녹아있다.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본문의 베드로 이야기는 풍랑사건 속에 끼어 있는 작은 그림(삽화)과 같다(내용설명은 생략). 이는 베드로와 관계가 깊은 마태복음에만 유일하게 나온 사건이다(마태공동체를 일명 베드로 교회라고 함). 이 사건은 베드로의 실패담 같지만 실재는 베드로의 영웅담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풍랑이 이는 바다에 도전했고, 주님처럼 물 위를 걸었던 유일한 제자라는 것이다. 본문을 통해 ‘도전, 실패, 회복’이란 세 개의 단어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것은 건강한 인생의 싸이클(cycle)이다.


1. 도전(28)

우리는 ‘한계에 대한 도전’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항상 뉴스거리가 된다. 본문은 베드로가 도전의 사람임을 은연 중 강조하고 있다. 물 위로 걸어오신 주님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고, 그는 주님의 “오라”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여 비록 몇 걸음일지라도 그 위대한 도전에 성공을 했다. 주님을 만나 이제 겨우 불안과 두려움에서 숨을 돌리고 있던 터라 제자들 중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일을 해낸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 믿음이란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 그 환경, 그 일을 떠나 전혀 경험해 보지 않은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다(창12:1). 오병이어 기적 후 그 곳을 즉시 떠나게 하심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을 모험이라고 한다. 믿음의 역사는 도전할 때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살아있는 믿음은 도전을 통해 증명된다.


그런데 이 도전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배에서 내리는 것’(29)이다. 배 안에 머물러 있는 한 물 위를 걸을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가 내려야 할 배는 무엇인가? 창세기 표현을 빌리면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12:1)이고, 이를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고정관념, 선입관, 길들여진 습관, 불신앙 등이다. 이것들이 믿음의 도전에 심각한 장애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전하는 신앙, 도전하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려면 고정관념이라는 배, 선입관이라는 배, 길들여진 습관이라는 배, 불신앙이라는 배에서 내려 주님께로 가야한다.


길들여진 습관이나 고정관념, 선입견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보여주는 실험이 있다. 방 안에 원숭이 네 마리를 집어넣었다. 방 한가운데 높은 장대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에는 바나나 한 송이가 달려있다. 원숭이 한 마리가 바나나를 보자 그것을 따려고 장대위로 올라갔다. 바나나를 잡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머리 위쪽에 붙은 샤워기에서 찬물이 쏟아졌다. 원숭이는 소리를 지리며 장대 밑으로 내려왔다. 여러 차례 물세례를 받자 마침내 모든 원숭이들이 포기했다. 이렇게 조건반사훈련이 된 원숭이 네 마리 중 한 마리를 옮기고 새로운 원숭이를 집어넣었다. 멋모른 신참원숭이가 바나나를 보고 장대위로 오르자 다른 동료원숭이들이 따라가서는 그 녀석을 끌어내렸다. 몇 차례 시도하다 신참은 물을 맞지 않았어도 바나나 따기를 포기했다. 한 마리씩 처음의 원숭이들이 모두 교체되었고, 새 원숭이들 중에 장대 끝에 오르는 데 성공한 녀석은 없었다. 샤워기를 없앤 후에도 장대위로 오르려는 원숭이는 없었다.


컴퓨터의 문자는 숫자 ‘0’과 ‘1’로(이진법) 되어 있다. 0은 ‘멈춤’이고, 1은 ‘작동’을 뜻한다. 인생도 멈춤 인생, 작동 인생이 있다. 그 차이는 0과 1이다. 숫자상으로 ‘1’이지만 내용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0과 같은 교회, 1과 같은 교회가 있다. 모쪼록 우리 교회는 도전하는 교회, 1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우리 모두 그런 삶이 되기를 축복한다.


2. 실패(30)

냉소적인 사람은 몇 걸음 못가서 물속으로 빠지고 마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며 ‘결국 그렇게 실패할 일 무엇 때문에 도전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 또한 잘못된 길들여짐의 결과다. 넘어지지 않고 걸음마를 배운 아이가 없다. 마찬가지로 실패 없이 성공한 사람도 없다1). 사실 실패를 많이 경험했다는 것은 그 만큼 도전을 많이 했다는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요즘 일본에서는 실패학(失敗學)이 유행이고, MS사 같은 경우는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을 더 우대한다고 한다. 실패를 많이 경험했다는 것은 그가 도전의 사람이고 창의적인 사람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 까닭이다(실패를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다). 도전에 실패한 사람은 그가 도전한 그 사건에 대해서만 실패한 것이고, 도전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인생 자체를 실패한 것이다.


아무튼 베드로는 멋지게 도전했다가 보기 좋게 실패했다(30). 하지만 베드로의 실패가 주는 소중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주님의 음성을 들은 자는 풍랑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초점을 주님께 맞추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몇 걸음 못가 물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본문은 그 이유를 “바람을 보고 무서워”(30)라고 기록하고 있다. 초점을 놓쳤다는 뜻이다. 초점이 주님께 맞춰져 있을 땐 바람도 파도도 문제가 되질 않았는데, 초점을 놓치자 바람과 파도가 보였고, 그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믿음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물속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라고 한 찬송가(204장 3절) 가사처럼 주님께 초점을 맞추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보다 크신 주님만 보이게 된다. 베드로의 실패 원인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베드로의 실패를 교훈 삼아야 할 내용이 바로 이점이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그러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포기하지 마!’ 영상보기.


3. 회복(31)

어느 목사님이 기차 여행 중에 한 사람을 만났다. 삶에 대한 좌절과 절망이 깊은 듯 보였고, 무언가 극단적인 일을 결심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 목사님이 조용히 그 사람 곁으로 가서 앉으며 말을 걸었다.


‘혹시 이 만년필을 세울 수 있을까요?’


그러자 뭔 이런 물건(?)이 있어 하는 표정으로 힐끗 보더니 내뱉듯 말했다.


‘어떻게 만년필을 세워요!’

‘그렇지요. 만년필 혼자는 세울 수가 없지요. 하지만 이렇게 내가 손으로 붙잡아주면 만년필은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나서 이 목사님은 그에게 우리 인생도 만년필처럼 혼자는 설 수가 없고, 그래서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게 되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붙잡아주시면 설 수 있고,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말로 격려했다. 참으로 소중한 교훈이다. 인간은 혼자서 설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을 ‘호모 심비우스’라고 한 것이다.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다. 넘어질 때 누군가 곁에서 붙잡아주면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 주님이 바로 우리의 삶과 인생을 ‘붙잡아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한다. 한동안 내가 잘나서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주님이 나를 잡아주셨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30) 하니, 주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주셨다(31). 인생에서 실패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실패에 대한 우리의 태도다. 베드로는 즉시 주님께 구원을 요청했다. 이것이 곧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실패에서 회복되는 비결이다. 주님의 손은 능력의 손이고, 치료와 회복의 손이고, 축복과 구원의 손이다. 그 손에 붙잡힐 때 보리떡 같은 인생이 장정 오천 명을 먹이는 능력 있는 인생이 되고, 그 손이 나를 붙잡을 때 모든 질병이 떠나고, 나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악한 세력들이 떠나게 된다. 그 손에 붙잡힐 때 저주 받은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되고, 무너진 인생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주님 손에 붙잡힐 때 쓸모없는 인생이 유용한 인생, 쓰임받는 인생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요청에 ‘즉시’ 반응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여 이 손을.......

토마스 도르세이(T. A. Dorsey)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12세 때부터 파티에서 피아노를 치며 돈을 벌만큼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다. 결혼 후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시카고 필그림침례교회 지휘자로 40년을 섬기며 복음가수로 활동을 했다. 그가 세인트 루이스 집회에 참석하고 있을 때 만삭인 아내가 출산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행이 아이는 살았으나 그 역시 그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아이를 아내와 같은 관에 넣어 장사를 지낸 그는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졌다. 정말 이 풍랑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고, 절망 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그 때 그의 친구가 찾아와서 그를 그의 작업실 피아노 앞에 앉혀 놓았다. 여러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석양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피아노 건반을 천천히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경험했고,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했다. 아래 찬양이 그가 지어 부른 것이다. 이는 좌절과 절망 속에서 주님의 붙잡아주심을 간절히 바라는 그의 외침이다. 그리고 붙잡아주시는 주님의 손길에 의해 그는 회복되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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