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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손Ⅰ, “안드레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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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545회 작성일 10-08-0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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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손Ⅰ, “안드레의 손”

요6:1~15.

2010. 8/1 08:0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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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손 이야기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 중 하나가 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손으로 일을 하고, 손으로 도구를 사용하고, 손으로 만들고, 손으로 세우고, 손으로 가꾸고, 손으로 글을 쓰고, 손으로 요리를 하고, 손으로 표현을 한다. 점자책을 읽을 때의 손은 ‘눈’이고, 수화(手話) 즉 손으로 대화를 나눌 때의 손은 ‘입’이다. 또한 손은 중요한 감각기관이다. 보통의 경우에도 느낌(촉감)은 손에 의해 완성된다. 흔히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팻말에 ‘손대지 마시오.’는 보고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손과 발을 ‘행동의 주체’라고 하는데, 발은 일어서거나 이동의 도구 등으로 쓰임이 제한적이지만 그 외 모든 행동은 손을 통해 이루어진다. 때문에 법원에서 노동력을 평가할 때 발은 30%, 손은 70%로 한다. 그러므로 손은 인간을 대표하는 아주 소중한 지체라 할 수 있다.

 

한자로 손을 뜻하는 손 ‘수’(手)자는 다섯 손가락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솜씨를 가진 사람)을 의미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궁수(弓手), 투수(投手), 선수(選手), 고수(鼓手), 고수(高手) 등. 또한 농부의 손을 농심(農心)이라 하고, 어부의 손을 어심(漁心)이라 한다. 그리고 의전행사에선 반드시 손에 장갑을 낀다. 손의 노출은 몸을 노출한 것과 같은 것으로 여긴 까닭이다. 스타를 기념하기 위해서 명예의 전당에 그의 손바닥을 찍어 놓은 것도 손이 곧 그 사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손은 그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손 관리는 결국 인생 관리이다. 인생처럼 손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깨끗한 손과 더러운 손, 아름다운 손과 추한 손, 건강한 손과 병든 손, 강한 손과 약한 손, 격려하고 돕고는 손과 파괴하는 손 등. 앞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기적을 만들어낸 손들

본문의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은 네(四)복음서에 모두 나온 내용이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인생의 수많은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2, 마14:13). 그들은 육신의 주림보다 더 절박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주님을 따랐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주님의 은총을 기다렸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요기라도 하도록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했다(마14:15). 하지만 주님은 그대로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무언가 먹여서 보내고자 하셨다. 그래서 무리를 돌려보내자는 제자들의 의견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14:16)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6). 그리고 주님은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장정 오천 명을 먹이고 열 두 광주리가 남는 대 기적을 보이셨다.

 

이 사건이 주님께서 베푸신 기적이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을 하신다는 전제에서 보면, 이는 여러 손들의 아름다운 조화를 통해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래서 주님의 베푸신 이 기적에 사용된 아름다운 손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 시간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주님께로 인도했던 안드레의 손(8,9)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제자 안드레(Andrew)

본문이 소개한 대로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였다(8). 안드레는 원래 세례요한의 제자였으나(요1:40),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증거(:36)를 듣고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이다(:40). 그리고 자기 형 베드로에게 가장 먼저 예수님을 소개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했던 사람이다(:41). 또한 예수님 뵙기를 청하는 헬라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도 했다(요12:22).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제자 안드레에 대한 전부이다. 하지만 유대의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책 「교회사」와 위경 「안드레 행전」(AD 260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 있다. 안드레는 에베소 지방에서, 그 후 카프카스 지역과 카스피해 지역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였고, 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에 해당하는 비잔티움에서 그리스 지역까지 복음을 전했다. 남쪽으로는 고린도에서 파트로스까지 이르렀고, 파트로스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X형의 십자가에 밧줄로 묶여 서서히 죽게 되었는데, 그 고통 속에서도 이렇게 기도하며 하늘나라로 갔다(주후 69년 11월 30일).

 

‘오, 그리스도 예수님이시여, 나를 받아 주소서! 내가 본 그 분, 내가 사랑한 그 분 안에서 나는 내가 되었습니다. 주님이시여, 당신의 영원한 나라의 평안 가운데 이제 나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천주교에서는 ‘X’형 십자가를 ‘성 안드레 십자가’(St. Andrew Cross)라 부르고, 11월 중 하루를 ‘안드레의 날’로 지키면서 열심히 전도한다. 그리고 전도 방법도 안드레처럼 가장 친한 사람을 전도한다(이를 ‘안드레식 전도’라고 부름). 안드레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짧지만 그에 대한 인상은 분명하다.

 

찾아 나서는 손을 가진 사람

본문에 두 사람이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빌립과 안드레다. 두 사람 다 갈릴리 출신이다(요1:43). 그런데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게 하겠느냐”(다른 곳에서는 “너희가 먹을 주라”고 하심)는 주님의 말씀에 두 사람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빌립은 앉아서 계산하기에 바빴다. 그는 이렇게 주님의 말씀에 반문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 돈도 없거니와 돈이 있어도 그 많은 떡을 구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빌립의 민첩한 상황파악, 냉철한 현실인식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하지만 안드레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떡을 구하러 나섰다. 그리고 한 아이에게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찾았고, 그것을 주님께 알렸다(9).

 

물론 이들의 태도를 두고 둘 중 누가 더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빌립보다는 안드레의 태도가 주님께 쓰임을 받았다는 점이다(주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했다는 점). 신앙이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올바른 응답을 위해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뜻)을 알아야 한다. 본문에서 빌립과 안드레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빌립은 합리적이고 상황판단과 현실인식이 뛰어나지만 주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게 하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 특히 빌립의 태도를 알아보시기 위함이었지 그렇게 하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6). 이런 주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빌립의 문제이고, 그러다보니 할 수 없다, 못한다는 말만 늘어놓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소위 ‘이성적인 믿음’의 한계이다.

 

반면 안드레는 주님의 마음을 알았다. 때문에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소년을 발견했고, 그 사실을 주님께 알렸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9). 여기 ‘그러나’란 접속사는 안드레의 신앙과 성숙함을 잘 보여준다. 이는 ➀안드레 역시 빌립 못지않은 합리적인 현실인식과 상황판단을 하는 사람인 것(신앙과 이성이 균형 잡힌 신앙인), ➁자신의 일을 겸허하게 낮출 줄 아는 사람인 것을 보여준다(자신의 공과를 드러내지 않는 겸손).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는 겸허한 그의 모습에 주님은 기적을 베풀어 허기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게 하셨다. 주님은 이렇게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다. 이런 놀라운 주님을 빌립처럼 어리석은 자신의 지식과 판단으로 제한하지 말자. 안드레처럼 묵묵히 찾아 나서는 순종의 사람이 되자. 할 수 없다는 빌립의 고백은 사실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우리에게는 해결할 능력, 지혜, 방법이 없다. 자신의 무능과 부족과 이리석음에 대한 고백은 바람직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앉아만 있는 것은 신자의 태도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안드레처럼 순종하는 마음으로 찾아나서는 것, 그리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알리는 일이다.

 

인도하는 손을 가진 사람

사람들은 대개 리더에게 주목하지만 앞장서서 ‘하는’ 사람 못지않게 ‘하게 하는’ 사람도 중요하다. 안드레는 자기가 한 사람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으로 하게 한 사람이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그런 지도자를 있게 만든 사람이다. 드라마로 말하면 임현식 씨나 성동일 씨 같은 빛나는 조연이다. 성경에 기록된 그의 기사가 모두 사람을 찾아서 주님께로 인도한 일이었다. 가장 먼저 자기 형 베드로를 주님께로 인도하였고, 본문에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소년을 찾아서 주님께 고했다. 그리고 예수님 뵙기를 청하는 헬라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했다. 안드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개인전도의 좋은 모범과 모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안드레의 삶이 보여준 소중한 교훈은 ‘한사람 비전’(one man vis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 사람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사람이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을 찾아 주님께 인도하는 일을 하였고, 그 중 한 사람이 베드로였다. 베드로가 우리 기독교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이런 베드로가 한 사람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 안드레의 인도로 탄생한 것이다. 오병이어 기적도 마찬가지다. 비록 어린 아이일지라도 그 영혼을 소중하게 여긴 안드레가 있었기에 주님께로 인도되었고, 그 아이의 적은 음식이 갈릴리 초원의 기적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찾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가를 알 수가 있고, 그것을 몸소 보여준 사람이 안드레다. 그래서 성경은 전도자에게 약속된 복이 “하늘의 별처럼 영원토록 빛나는 삶”(단12:3)이라고 하신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매일 저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도록 초청하였으나 사흘째 되는 날 저녁 어린 소년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집회를 인도한 강사나 그 집회를 주최한 목사님 둘 다 크게 실망했다. 그들은 그 집회가 완전히 실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집회에서 주님을 영접했던 그 소년이 누구인줄 아는가? 훗날 아프리카 선교사가 된 리빙스톤(D. Livingstone)이었다. 여러분, 이래도 그 집회를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육신의 눈으로, 짧은 시각으로 보면 분명한 실패였다. 그러나 긴 안목과 영적인 눈으로 보면 그 집회야말로 가장 성공적이었다. 그 집회를 통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주님께로 인도한 위대한 선교사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안드레가 품었던 한사람 비전이고, 우리가 안드레의 삶을 통해서 배워야 할 소중한 교훈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한사람 비전을 품고, 그 한사람을 찾아 주님께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손이 되어야겠다. 죽을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다. 저와 여러분이 이 아름다운 손의 주인공이 되자.

 

한 영혼을 위한 기도

한 익명의 경건한 신자의 아름다운 기도문이다. 비록 어린 아이일지라도 주님께로 인도하는 손이 되게 해달라는, 그래서 함께 손잡고 주님이 계신 천국에까지 이르도록 해달라는 소박한 기도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기도가 항상 있기를 소망한다.

 

‘사랑하는 주님, 나는 주님이 나에게 고귀한 일이나 거룩한 부름이나 놀라운 임무를 주실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에게 내 손이 잡을 수 있는 자그만 손을 주시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낯설지만 사랑스러운 길을 가르쳐 줄 어린 아이를 주소서. 목소리 모아 기도할 수 있는 작은 목소리를 주시고,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빛나는 두 눈을 주소서. 나는 행여 지혜있는 사람이나 고귀한 사람이나 위대한 사람 속에 끼일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포근하게 손에 손잡고 어린 아이와 내가 천국의 문을 들어가기를 구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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