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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손Ⅱ, “한 아이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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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910회 작성일 10-08-09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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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손Ⅱ, “한 아이의 손”

요6:1~15

2010. 8/8 08:00, 11:00

작은 것도 중요하다.

일본에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라는 사람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幸州大捷)에서 권율 장군에게 패해 돌아간 사람이지만 일본에선 명장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아직 무명일 때 간온지(觀音寺)라는 절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이 절을 찾아 차를 한 잔 달라고 청했다. 그는 처음에 커다란 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주더니, 두 번째는 중간 정도 크기의 잔에 조금 뜨거운 차를 따라주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히데요시가 또다시 차를 달라고 하니, 이번에는 작은 잔에 뜨거운 차를 내놓았다. 그 이유를 묻는 히데요시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큰 잔에 따뜻한 차를 대접한 것은 목이 마른 듯하여 빨리 마실 수 있도록 적당한 온도에 양을 많이 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미 목을 축였으니 차의 향내를 맡을 수 있도록 양을 줄이고 조금 뜨거운 물에 차를 우린 것입니다. 세 번째 뜨거운 차를 작은 잔에 따라 드린 것은 차를 두 잔이나 마셔 충분히 목을 축였을 것이기에 온전히 차의 향만을 음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고, 그를 신하로 삼아 중용했다. 차 석 잔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 사회의 큰 병폐 하나가 큰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그러나 크다고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고, 또한 강한 것도 아니다. 작은 것 하나도 소홀이 하지 않는 충성됨, 작지만 무슨 일이든 온 마음을 다하는 성실함, 이시다 미쓰나리처럼 차 한 잔에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마음, 이런 것들은 작지만 강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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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 적(작)은 것의 힘

오병이어 기적은 적은 것의 힘을 보여준다. 우선 이것을 드린 사람이 어린아이다(9). 오늘날은 어린아이를 단순하고 맑고 순진하고 순수한 존재의 대명처럼 생각하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 어린아이는 중요하지도 않고 어떤 관심이나 호의를 받을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 축에도 못 드는 멸시의 대상이었다. 사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신 것은 (순수하고 순진하고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기꺼이 자신을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인정하고 중요치 않은 사람으로 여기라는 의미이다. 본문도 어린이와 여성을 제외한 남자장정의 수만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가 드린 오병이어 역시 아이의 한 끼 식사밖에 안되는 적은 양이다. ‘보리떡’(αρτος)은 밀기울이 제거되지 않아 빛깔이 검은 밀가루로 만든 것으로 당시 가난하고 비천했던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먹던 식량이고, 물고기도 마찬가지다(이것만으로도 이 아이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어떤 부류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물고기 두 마리하면 웬만한 크기의 고기를 연상하기 쉽다. 그런데 원문에는 일반적으로 물고기를 가리키는 ‘익스투스’(ίχθυς)라는 단어 대신 ‘옵사리온’(όψαριον)이란 단어로 되어 있다. 옵사리온은 요리된 생선을 일컫는 ‘옵손’(όψσον)의 지소사(指小辭)이다. 지소사는 본래의 크기보다 작은 개념이나 애칭(愛稱)을 나타내는 접사다. 이를테면 ‘망아지’나 ‘송아지’가 여기에 속한다. 망아지는 말의 지소사이고, 송아지는 소의 지소사이다. 본문에서 물고기에 지소사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요리된 생선의 작은 조각이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아이가 지니고 있던 것은 물고기 두 마리가 아니라, 생선 두 토막이라 함이 정확한 표현이다. 참으로 미미하기 짝이 없는 분량이다.

 

문제는 드림에 있다.

어린 아이, 보리떡, 물고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모두가 적(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 아이를 주님 앞으로 인도했던 안드레마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9). 먹을 것이 있긴 한데 너무 적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가지고 수많은 허기진 사람들을 먹이는 놀라운 기적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본문은 많아야 된다(빌립처럼), 큰 것이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동시에 그것이 아무리 작(적)고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인생일지라도 주님께 드려지면 귀하게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크고(많고) 작(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드림’에 있다. 그래서 이 시간 자신의 도시락을 ‘드린’ 이 아이의 아름다운 손 이야기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드림은 믿음의 원리다.

저는 이 아이를 생각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우선 어린아이가 주님께로 나왔다는 것이 기특하고, 도시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배고픔을 참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 무엇보다도 그것을 선뜻 주님께 드린 것이다. 배부른 사람에게 도시락은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배고픈 사람에게는 사정이 다르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자신의 배고픔을 뒤로 하고 그것을 고스란히 주님께 드린 것이다. 그것도 자제력이 떨어지는 아이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 아이가 드린 것은 단순한 도시락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드린 헌신이고, 자신의 배고픔을 참고 드린 희생이다. 나아가서 아름다운 믿음의 표현이다.

 

사람들이 기꺼이 드리지 못한 중요한 이유가 이기심 때문이다. 드림은 희생과 헌신을 전제로 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도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드릴 수가 없다. 그런데 이기심은 그 반대로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드림을 믿음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주님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희생이고 헌신이다. 영어로 믿음 ‘Faith’라고 한다. 어떤 분이 이 단어의 글자를 하나씩 풀어서 다음과 같이 믿음을 설명하였다.

 

F/ Forsake: 버리다. 포기하다.

A/ All: 모든. 전부.

I/ I: 나

T/ Take: 가지다. 취하다.

H/ Him: 그(그분)

 

믿음(Faith)이란 ‘나(I)의 모든 것(All)을 포기하고(Forsake) 그분(Him)을 취하는 것(Take)’, 혹은 ‘그분(Him)을 가지기(Take) 위해 나(I)의 전부(All)를 버리는 것(Forsake)’이다.

 

믿음이 드림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지만 드림의 생활을 통하여 믿음이 풍성해 진다. 신앙생활의 역동성은 드림의 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무엇보다 주님께 마음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보라! 신앙생활의 풍성함과 역동성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드림은 기적의 원리다.

의미 있는 일들은 희생과 헌신을 감수한 작은 ‘드림’에서 시작된다. 드리는 아름다운 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오병이어 기적도 아이의 희생과 헌신으로 드려진 아름다운 손에서 시작되었다. 오병이어가 아이의 손에 있을 땐 겨우 한 사람의 한 끼 식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 드렸더니 장정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게 되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주님 앞에 드려질 때 쓰임을 받고, 능력이 된다. 그러므로 드림은 쓰임의 원리이고, 또한 기적의 원리이다.

 

당장에 열두 제자들의 삶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갈릴리 사람들’(행2:7)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무식한 촌뜨기’라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이는 제자들을 무시하는 표현이다. 그런 그들이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 주님께 드려졌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베드로는 보리떡 같은 정말 별 볼 일없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주님의 수제자가 되고, 천주교회의 수장이 되고, 모든 교회와 신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주님께 드려졌기 때문에, 주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말씀하셨고, 친히 밀알처럼 죽으심으로 죄로 죽은 인류에게 생명과 영생을 선물하셨다. 드리는 삶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해 보이신 것이다.

 

드림이 있는 삶이 쓰임을 받고, 능력과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드림이 있는 곳에 열매가 있고, 능력이 있고, 기적이 있다. 작은 드림의 실천으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준 한 아이의 아름다운 손을 기억하자. 그리고 저와 여러분도 이런 아름다운 손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주님께 쓰임 받는 인생, 주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 드려야 할 ‘나의 오병이어’는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

<?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아름다운 여인 ‘고다이버’(Godiva)

영국 중부 코멘트리(Coventry)에 행인들의 눈길을 끄는 여인의 동상이 하나 있다(옆의 그림)고 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벌거벗은 동상이어서가 아니라 여기에 깃든 감동적인 이야기 때문이다. 11세기 무렵, 이 지역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주 부인이 영주(Leofric)에게 세금을 감해줄 것을 탄원했다. 하지만 영주는 ‘만일 당신이 알몸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돈다면 그렇게 하겠다.’며 빈정댔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부인이 정말로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영주 부인이 자기들을 위해 알몸으로 마을을 돈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집에 들어가 커튼을 내리고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부인의 이름은 ‘고다이버’로 당시 16세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다 내려놓은 그녀의 아름다운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동상을 만들었고, 천년이 가깝도록 그녀를 기억하며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치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귀한 희생과 숭고한 헌신에 있다. 그녀가 벗고 있어도 아름다운 것은 외모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운 희생 때문이다. 희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이름 없는 한 어린아이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신자는 모름지기 먼저는 주님을 감동시키고, 다음으로 이웃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그것은 희생과 헌신을 감수한 드리는 아름다운 손에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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