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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손Ⅲ, “주님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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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255회 작성일 10-08-1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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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손Ⅲ, “주님의 손”

요6:1~15

2010. 8/15 08:00, 11:00 

꿈보다 해몽이다.

군에서 한 달 먼저 들어온 선임에게 시달림 당한 아들 이야기이다. 천식이 있어서 아침 일찍 뛰는 것이 고통스러운데, 그 선임이 매일 아침 연병장을 뛰고 와서 자기에게 보고하고 밥을 먹으라고 했다. 면회에서 아들에게 이 말은 들은 엄마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하지만 꾹 참고 아들에게 말했다.

 

‘기왕 하는 것 억지로 하지 말고 즐겁게 찬양하며 돌아라. 다 돌거든 선임에게 고맙다고 해라. 어쨌든 그것도 관심이 아니냐. 그 어떤 것보다 확실히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아들을 격려하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자신도 동네 초등학교운동장을 돌았다. 그 시간이 아들이 연병장을 뛰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달이 다 되어갈 즈음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로 시작된 아들의 편지 내용은 이랬다.

 

‘어머니!

나는 오늘에야 하나님의 축복이 시련이라는 가면을 쓰고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연병장을 뛰면서 때로는 화가 나고,

자존심도 상하고,

그 날로 단 번에 끝장을 낼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완전군장을 하고 구보를 하면서 저는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지난 번 구보 때는 천식으로 숨이 막혀 뛰지 못하고 쓰러졌는데,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 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선임을 통하여 저의 지병인 천식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 선임이 너무 고마워서 고맙다고 경례를 했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일부터는 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내일부터는 저 스스로 뛰겠습니다.

어머니께 이 기쁨을 ‘할렐루야’ 소리쳐 보내드립니다.

어머니, 제 목소리 들리시면 기뻐해 주십시오.’

 

믿음의 눈으로 보기

속담에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처럼, 사건보다 중요한 것이 해석이다. 같은 사건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 해석에 영향을 주는 것이 가치관이다. 신앙적 가치관을 가지면 일상의 사건에서도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깨달을 수가 있고, 모든 일에 신앙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위 이야기에서 자신을 괴롭힌 선임이 너무 고마운 사람으로 여겨진 것도 신앙적 가치관에 따른 해석 때문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렇게 해석한 사람도 있다. 이는 ‘주님의 기적이 아니라 한 아이가 도시락을 주님께 드리자 이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각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도시락을 내놓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각박한 세상에 기꺼이 자기 것을 내놓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도 기적이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오병이어 사건에 나타난 ‘주님의 신성’과 ‘신앙적 의미’를 없애려는 나쁜 의도가 깔려 있다. 이런 일은 주님이나 신앙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이 필요하고, 믿음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자신도, 자녀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주변 환경도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 그래야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신자다움’을 드러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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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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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오병이어는 주님의 손에서 시작하여 이루어진 놀랍고 아름다운 사건이다. 단 한 끼지만 허기진 사람들을 위해 초원 위에 펼쳐진 풍성하고 행복한 식탁이었다. 이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공급해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 시간에는 이런 놀라운 능력을 만들어내신 아름다운 주님의 손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필요(결핍)에 허덕이는 사람들

완전하신 하나님의 창조로 완전했던 세상이 타락으로 인해 결핍의 처소가 되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고(롬8:22), 만물은 충만할 때(온전한 회복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엡1:23). 물론 만물에 속한 인간 역시 결핍의 존재가 되었다. 결핍의 존재는 무엇으로든지 채우려 한다. 일로 채우려 하고, 관계로 채우려 하고, 돈으로 채우려하고, 성공과 명성으로 채우려한다. 때문에 우리의 삶이 잠시도 평안하지 못하고, 항상 분주하고, 요란하고,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마땅히 드려야 할 이 거룩한 주일까지 침범하면서 필요를 채우기 위해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결핍과 필요는 자기 스스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퍼마시는 것과 같고, 터진 웅덩이에 물을 가두려 하는 것과 같다(렘2:13).

 

채우시는 주님의 손길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생의 결핍과 이를 해결하는 길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요4:1~30)이다. 그녀는 생의 결핍과 목마름 때문에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다. 하지만 자기 인생의 진정한 반려자가 없었다(18). 결핍과 필요를 채울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날마다 물동이를 들고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었던 것이다(7). 이것은 목마른 인생의 고단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그 해결책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결핍이 해결되고, 필요가 채워졌다. 그녀는 결핍의 상징이요, 동시에 그것을 해결해 보고자하는 자구책의 상징인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가서 사람들에게 주님이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메시야임을 증거했다(28). 그렇다. 우리의 결핍을 해결하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주님의 손길이 닿을 때 모든 결핍과 필요가 해결될 수 있다. 본문에서도 이것이 잘 나타나고 있다. 최소한 네 가지로 인생의 결핍을 해결하고, 필요을 채우시는 주님의 손을 정리를 할 수가 있다.

 

첫째는 사랑의 손이다.

같은 내용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이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한 단어로 표현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불쌍히 여기사”(마14:14, 막6:34)라는 단어이다. 이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 감정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 말의 본뜻은 ‘내장이 뒤틀리다’(σπλαγχνίζομαι)인데, 히브리인들은 ‘내장’을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 거하는 곳’으로 생각했다(우리말의 ‘애가 녹는다’와 같은 뜻). 그러므로 이 말은 주님께서 마음 깊이 이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공감하셨다는 의미이다(compassion=com+passion). 이를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은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을 느끼고,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함께 느끼면서 그것을 해결해 주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다. 결핍과 필요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내민 주님의 손은 사랑의 손이었다. 굶주린 사람들을 돌려보내자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너희가 먹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사랑의 마음, 사랑의 손길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의 손은 사랑의 손이다. 그 손으로 나를 받아주시고, 그 손으로 나를 안아주시고, 그 손으로 나를 인도하신다. 그 손 때문에 내가 있고, 여러분이 있고, 우리 모두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치료의 손이다.

여기 갈릴리 해변에 모인 사람들은 육체적인 병이라는 결핍과, 그것에 대한 치료라는 필요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게 된 것은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 특히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2). 이 말은 따르고 있는 사람들 역시 동일한 문제와 필요(결핍)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병자를 고쳐주신 주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병자들이 자신의 병을 낳고자 주님을 따랐던 것이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주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질병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문제이다. 누구도 이 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그래서 주님은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주셨다.”(마14:14). 질병으로 고통당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그 아픔의 원인인 질병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주님의 손은 치료의 손, 회복의 손이다. 주님의 손이 닿으면 귀신이 떠나고, 문둥병이 깨끗해지고, 열병이 떠나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귀머거리가 듣고, 장님이 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심지어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치료의 역사, 회복의 역사, 살리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병든 사람들이 주님께 와서 주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사모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치료하신 주님의 손에 대한 기대와 사모를 갖자.

 

셋째는 인도하는 손이다.

같은 내용의 마가복음에서는 이들을 “목자 없는 양”(6:34)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이들의 정신적, 영적인 상태를 잘 보여준 표현이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특히 양은 미련하고 어리석고 연약해서 목자 없이 살 수 없는 동물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자주 비유하였다. 인간은 하나님께 절대 의존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인도하고 보호할 목자가 없다는 것은 이들이 정신적, 영적으로 얼마나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뜻한다. 주님은 이들의 이와 같은 상황을 불쌍히 여겨 “가르치셨다”(막6:34). 이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다는 뜻이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14:6).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떠나면 방황하게 되고(길을 잃게 되니까), 미혹에 빠지게 되고(진리를 모르니까), 죽을 수밖에 없다(생명이 없으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안전하게 저 천국에 이를 때까지 나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손은 인도하는 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내 삶을 비롯하여, 자녀도, 가정도, 일터도, 교회도, 나의 모든 계획도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그래야 주님이 책임지신다.

 

넷째는 공급하는 손이다.

사회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한 끼 정도의 식사로 살았다고 한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주님을 따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다(지난주일 ‘보리떡’에 대한 설명 참조). 그렇다면 이들은 하루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 말은 곧 먹는 것이 이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가를 보여준다(그래서 이들이 한 끼 식사 대접받고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하루 종일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주님은 이런 저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로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그래서 단 한 끼지만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겼다. 주님은 물로 질 좋은 포도주를 만드신 것처럼(요2:1~11) 하찮은 것을 값지게 하시고, 적은 것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게 하셨다. 주님의 손은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능력의 손이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누리고 사는 것도 공급하시는 주님의 손 때문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은혜이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리고 기도는 바로 주님의 이 손을 구하는 것이다.

 

궁지에 몰린 사슴

스코틀랜드의 어느 지방에 한 부자가 크고 낡은 저택을 구입하여 많은 돈을 들여 그 집을 아름답게 수리하였다. 그리고 친구들을 초청하여 파티를 열었는데, 그 가운데는 유명한 화가 에드윈 랜드시어(Sir E. Landseer)도 있었다. 저녁식사 때, 술을 나르던 하인이 유색 소다수 병을 떨어뜨려 그것이 깨지는 바람에 소다수가 값비싼 벽지에 튀겨 벽에 얼룩이 생겼다. 주인은 그로 인해 몹시 마음이 상했다. 다음날 아침, 다른 사람들이 사냥하러 나갔을 때, 랜드시어 경은 그 저택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는 붓과 물감을 꺼내들고 얼룩진 벽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 얼룩을 배경삼아 수사슴 한 마리를 아름답게 그렸다. 주인과 일행은 사냥에서 돌아와 벽에 그려진 그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 그림이 이 화가의 역작중 하나인 ‘궁지에 몰린 수사슴’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궁지에 몰린 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화가의 마음이 더욱 걸작이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고, 주님의 손이다. 주님께서 이 아름다운 손을 축복하셔서 걸작을 그리는 손이 되게 한 것 같다.

 

화가는 궁지에 몰린 한 사람을 위해서 보기 흉한 얼룩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우리 역시 얼룩진 벽처럼 인생의 수많은 결핍과 필요 때문에 아름답지 못한 인생이다. 아니 인생의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하인처럼 궁지에 몰린 인생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이 채우시는 주님의 손에 들려지면 아름다운 예술이 될 수 있다. 주님의 손은 사랑의 손이고, 치료의 손이고, 인도하고 공급하시는 아름다운 축복의 손이다. 얼룩진 인생을 명품인생이 되게 하시는 능력의 손이다. 이 손에 붙들리면 얼룩진 인생이 명품인생이 될 수가 있다. 우리 모두 주님 손에 붙들려 명품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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