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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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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249회 작성일 10-08-29 13:21

본문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8:1~11

2010. 8/29 08:00, 11:00

태도가 사람의 차이를 만든다.

사람의 차이는 그가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태도에 있다. 태도란 ①‘생각의 습관’이다. 습관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것으로, 반복적인 활동의 산물이다. 그런데 습관은 행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도 있다. 바로 이 생각의 습관이 태도이다. 긍정적인 생각의 습관은 긍정적인 태도를 낳고, 부정적인 생각의 습관은 부정적인 태도를 낳는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태도가 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래서 태도를 ②‘행동으로 나타난 자기 내면의 감정’이라고도 한다.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즉 긍정적으로 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가를 한다. 모든 면에서 그렇다. 또한 태도는 ③‘마음의 렌즈’이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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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로 박스터(S. Baxter)는 「내 마음이 깨어 있을 때」(In Awake, My Heart)에서 ‘장애물과 기회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이는 상황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기회에는 어려움이 있고, 모든 어려움은 기회를 수반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즉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도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은 그 상황을 잘 활용하지만, 나쁜 태도를 가진 사람은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성경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고 말씀하고 있다. 시험, 환난, 고난이 어찌 기쁜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장은 어렵지만 장차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믿는다면 얼마든지 기쁘게 여길 수가 있다. 그러므로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생각의 습관,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것이 사람의 차이를 결정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인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인간은 앱티튜드(aptitude:적성, 재능)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애티튜드(attitude:태도)에 의해서 사는 것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적성이나 재능이 아니라 태도라는 말이다.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

오늘 본문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동일한 사건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 다루는 자세, 그리고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다를 수 있을까? 놀라울 뿐이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장막절이 끝난 다음 날,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여인이 손에 돌을 든 살기등등(殺氣騰騰)한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끌려왔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다(4). 그들은 ‘율법은 이런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5, 신22:22)고 했다며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의견을 듣고자 함이 아니라 주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나쁜 의도이다(6). 질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모르는 사실을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과 알면서도 상대방을 떠보기 위해 하는 질문이 있다. 이들의 질문은 후자에 속한다. 여기서 주님이 돌로 치라고 하면 실정법 위반이 되고(당시 유대인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고, 로마총독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용서하라고 하면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 된다.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는 묘한 질문으로 주님을 괴롭혔다. 이런 나쁜 의도가 그들의 행동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는 사람들

본문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겪은 수치, 상처, 고통 뒤에는 교활한 음모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명절 다음 날 아침이라는 이 여인이 붙잡힌 시점이다. 7장을 보면 명절 내내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화제의 인물이었다(40~44). 이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을 붙잡고자 했으나(45~52), 명절이고 명분이 없어서 붙잡지를 못했다. 그래서 명절 다음 날을 택하여 이 사건을 기획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 여인이 간음현장에서 붙잡혔다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들킬만한 장소에서 간통하는 남녀는 없다. 그것도 주님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가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 현장을 덮쳐 붙잡았다. 그리고 셋째는, 간통한 상대 남자는 없고 여자만 끌고 온 점이다. 율법은 당사자 둘 다 죽이라고 했다(레20:10, 신22:22). 율법에 따라 처벌하기를 원했다면 남자도 함께 끌고 왔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정말 율법을 수호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보다 앞서 헤롯 궁으로 달려갔어야 했다. 헤롯왕은 자기 동생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가로챈 살인과 간음을 저지른 무도한 죄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헤롯왕의 악행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도 힘없는 여인에게는 모질게 대하고 있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들에게 율법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의지가 없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의 목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6) 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한 여인의 약점을 이용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열하고 비겁한 사람은 자기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약점과 불행을 이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약점과 불행을 발판으로 삼고 일어서려는 사람이다. 본문에 나온 유대교 지도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이 여인의 영혼은 안중에도 없고,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님을 무너뜨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다.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신앙인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율법도 하나의 수단이다. 결국 그들 스스로 율법을 무너뜨리고(3), 이익의 수단으로 만들고(6), 정죄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이 모두가 잘못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 정죄의 대상으로 보고, 심지어는 신앙도 율법도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다.

 

주님의 반응

그렇다면 이 사건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이는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것과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본문은 명절 다음 날, 평화로운 성전의 모습을 간단하게 소개한다(2). 이는 성전의 주인이신 평화의 주님이 그곳에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을 모신 마음, 가정, 교회의 행복한 모습의 상징이다. 그런데 간음한 여인을 끌고 등장한 이 사람들에 의해 그곳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변했다. 이 또한 우리 마음과 가정, 교회 안에서 범죄사건이 발생하고, 악한 자에게 점령을 당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이 여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주님께 물었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주님의 입술에 고정되었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 주님은 아무 말씀 없이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다 글씨를 쓰셨다(6). 그리고 나서 일어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이 사건에 대한 주님의 첫 반응이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셨다(8). 그러자 그 살기등등한 사람들이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젊은 사람들까지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났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함정을 보기 좋게 뛰어넘은 것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행동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는, 사람들의 흥분된 감정, 격한 마음을 가라앉히기(cool down) 위해서이다. 흥분된 감정과 격한 마음에 사로잡히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진다. 자신을 그 사건으로부터 객관화시키지 못하고 그 속에 함몰되고 만다. 무슨 일이든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그래서 주님은 조용히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다. 둘째는,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라. 그리고 경청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 마음속에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들으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라. 그리고 행동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집단화된 흥분을 개별적으로 분산시켜서 스스로 반성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셋째는, 자기성찰에 대한 도전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격한 마음이나 집단화된 흥분상태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주님은 감정을 가라앉히고, 집단화된 흥분을 분산시켜서 스스로 반성하도록 한 다음 이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젊은 사람까지 그 자리를 떠났다. 자신을 생각해보니 동일한 죄는 아니라도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만큼 떳떳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다. 죄가 드러난 죄인이 있고,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 있다. 죄가 드러난 죄인은 서면(교도소)에 있고, 죄가 드러나지 않은 죄인은 가정과 일터, 우리처럼 이렇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뜻이다(롬3:23). 단지 드러나지 않은 것뿐인데,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진지하게 자신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은 함부로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를 살펴 그런 자리에 빠질까 조심하게 된다. 우린 여기서 남의 허물을 덮어주시고, 용서하시는 주님, 일으켜 세워 새로운 삶을 살도록 격려하시고, 심지어는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까지 널리 품어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사람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태도이다.

 

2.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주님은 모두가 떠나고 그 여인만 남았을 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11)고 하셨다. 사실 이 여인을 정죄하고,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님뿐이다. 주님은 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격도 없는 사람들은 정죄하고 나섰으나 주님은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주님은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살리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우린 여기서 한 영혼의 상태를 세밀하게 보시고 용납해주시고 안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대신 주님은 이 여인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하셨다. 그것은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는 말씀이다. 이것이 주님의 두 번째 반응이다. 이는 절대로 죄를 짓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의 말씀이다. 우리 성경은 뒤에 나온 부정문을 강조하는 ‘다시는’이란 보조사를 사용하여 절대로 죄를 짓지 말라(이는 희망사항이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는 의미처럼 보이나 원문에는 ‘지금부터’(απο του νυν)라는 부사구가 들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주님을 만난 ‘지금’을 분기점으로 하여, ①지금까지의 모든 죄의 고리를 끊으라는 것(NIV/.......and leave your life of sin), 즉 과거를 철저히 청산하라는 의미이고, 그래서 ②지금부터는 새로운 삶을 살라는 촉구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 이후의 삶에 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관심은 ‘지금부터의 삶’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죄의 고리를 끊는 것을 넘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이 이 여인에게 당부하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지금까지의 삶은 기억하지 않을 것이니(“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지금부터는 새로운 삶을 살아라(“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렇다. 우리는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았다. 그러므로 이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특히 우리는 지난 신앙수련회를 통하여 풍성한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이렇게 은혜를 받았으니 이에 합당한 생활을해야 한다. 그래서 받은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 열매를 삶으로 드러내보여야 한다. 저가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한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이 여인에게 요구하신 주님의 음성에 기억하여 받은 은혜에 합당한 열매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자.

 

마음의 렌즈를 바꾸자.

어느 시골 통나무집에 병약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집 앞에 바위가 하나 있어서 출입이 불편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사랑하는 아들아, 매일 집 앞의 바위를 밀거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은 매일 바위를 밀었다. 그렇게 일 년이 되었는데 바위는 단 한 뼘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람은 그 동안의 수고가 억울해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 바위를 밀라고 해서 일 년 동안 쉬지 않고 밀었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은 너무 한 것 아닙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바위를 밀라고 했지, 언제 그것을 밀어내라고 했니? 대신 거울로 가서 내 모습을 한 번 보거라.’ 거울을 본 이 사람은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병약한 모습은 사라지고 근육질의 건장한 남자가 나타났다. 바위를 미는 동안 그의 건강이 회복되고, 그의 몸에 근육이 생긴 것이다.

 

주님과 우리의 관심의 차이를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환경에 관심이 있지만 주님은 환경보다 우리 자신에 관심이 있다. 우리 자신이 변하기를 기대하시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데 관심이 있다. 그 목표는 주님처럼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주님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고, 일으켜 세워 새로운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심지어는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까지 널리 품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기도’이다. 명절 후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으나(7:53), 주님은 홀로 감람산으로 가셨다(1). 그곳에서 밤을 새우며 기도하신 것이다. 이는 기도를 통해서만 생각의 습관, 마음의 렌즈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기도의 큰 능력은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 자신이 변하고, 특히 우리의 태도가 변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냉온수가 동시에 나온 어느 온천지역 사람들은 비누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한다고 한다. 이처럼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마음의 렌즈’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야 태도가 바뀌고, 태도가 바뀌면 절망적인 사람도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로, 절망적인 사건 속에서도 소망을 볼 수가 있다. 본문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아름다운 모습을 닮을 수가 있다. 거룩한 새로운 삶, 건강하고 행복한 삶, 건강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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