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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돕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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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316회 작성일 10-09-0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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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돕더라.

눅22:39~46

2010. 9/5  08:00, 11:00

천사의 존재

성경에 천사의 활동에 대한 내용이 이렇게 많이 나온다는 사실에 놀랐다. 로랜드 벅(R. Buck)은 성경에 나온 천사를 네 종류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돕는 천사(Ministering Angel)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마4:11, 행12:1~11, 27:23),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민22:23), 적에게 포위가 되어 위급한 상황에 놓였을 때(왕하6:17) 우리를 도와주고, 보호해 주고, 지켜주는 일을 하는 천사이다. 흔히 말하는 수호천사(Guardian Angel)가 여기 속한다. 둘째는, 예배하는 천사(Worship Angel)이다. 성경에 나온 스랍(seraphim)과 그룹(cherubim)이 여기에 속한다. 스랍은 제단을 맡은 천사로 우리 영혼을 정결케 하는 일과 영적 부흥을 돕고(사6:1~7), 그룹은 하나님을 직접 모시는 천사이다(시99:1). 셋째는, 전쟁하는 천사(Warring Angel)이다. 하나님과 그의 택하신 백성을 대적하는 세력과 맞서 싸우고(수5:13~15, 왕하19:35), 악한 마귀와 그 군대를 쳐부수는 일을 하는 천사이다(단10:). 미가엘(Michael) 천사가 이 천사의 장이다. 그리고 넷째는, 소식을 전하는 천사(Messenger Angel)이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이다(창18:10, 삿13:3, 눅1:13, 26~30, 2:10~11, 행10:3). 가브리엘(Gabriel) 천사가 이 천사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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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지상주의를 부르짖는 현대인들에게 천사의 이야기는 허구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얼마 전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가 ‘미국인 55%가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고 했다며 놀랍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유감스러운 일이고, 이 시대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성경에 수백 번 나온 천사의 존재를 45%나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안타깝고 놀라울 뿐이다. 주님의 생애는 천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잉태(눅1:26~30)에서부터 이름(마1:20~21), 탄생(눅2:10~11), 이집트로 피난(마2:13),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와 나사렛에서 생활하신 것(마2:19~20), 공생애 시작과 함께 40일 금식기도하실 때(마4:11),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무덤에 묻혔을 때(요20:12), 그리고 주님 부활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것도 천사였다(마28:5~7). 오늘 본문에도 천사가 등장하고 있다.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 선택’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드린 기도였다. 여기에 하늘로부터 천사가 나타나서 주님을 도왔다(43).

 

천사의 도움을 받는 사람

천사는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적 존재들이다. 본문의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과 그 현장에 보내서 그들을 도우신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는 사람과, 그 사역의 현장에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돕는다. 신자라면 마땅히 주님의 뜻을 위해 살고, 그 뜻을 이루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러면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보내신 천사의 도움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그의 천사를 보내어 도우신다.

 

1.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거룩한 고민’을 한 사람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조종사였던 앙투안 드 생떽쥐페리(Antoine. de Saint Exupery)가 야간 비행 중에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마을의 불빛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저 조그마한 빛 안에 고민도, 즐거움도, 기쁨도, 슬픔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고민도 산 자가 가진

특권이 아니더냐! 또한 생명이란 천하보다 귀한 것이 아니더냐?' 

 

그렇다. 우리가 고민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았다는 것, 천하보다 귀한 영혼의 숨결을 내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민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고민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특권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고민의 내용이다. 이것이 사람됨의 척도가 된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방법 중에 하나가 ‘그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무엇을 위해 고민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문제로 고민하지 말라고 하셨다(마6:31). 이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6:32). 대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하셨다. 결국 신자와 비신자의 차이가 ‘고민의 내용’에 있다는 것이고, 그러니 세속적인 고민을 버리고 거룩한 고민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천사를 통해 도우셨던 사람들을 보면 거룩한 고민의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 롯, 야곱, 모세, 엘리야, 이사야, 그리고 본문과 같은 내용의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도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26:38).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주님의 거룩한 고민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주님의 이런 고민을 돕도록 하나님께서 그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세상,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경계가 무너진 이유가 여기 있다. 고민하는 내용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신자와 교회가 그 능력을 상실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우리의 능력을 회복하고 신자다움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고민을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거룩한 열정’을 품은 사람

장 콕토(Jean M. E. C. Cocteau)라는 프랑스의 작가(시, 소설, 극)이자 영화감독이 있다. 그가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만약 당신의 집에 불이 났다면 무엇을 가지고 나오겠는가?’ 그러자 사람들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긴 것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같은 질문을 콕토에게 했다. 그는 ‘나는 불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대답했다. 그가 말한 불이 무엇일까? 그것은 ‘열정’이다. 열정만 있으면 비록 재산이나 자신이 소중히 여긴 것들이 불탔을지라도 다시 회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차이는 단순한 능력 차이가 아니라 열정의 차이다.’는 말이 있듯 사람의 일생에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열정이다. 에머슨(R. W. Emerson)은 ‘모든 위대한 성취업적은 열정의 산물이다. 열정없이 이룩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열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수많은 위인들, 동시대를 살아가며 많은 성취를 이룬 사람들, 그리고 성경에 나온 훌륭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바로 열정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특히 신앙 안에서 커다란 자취를 남겼던 영적 거인들을 보면 거룩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이 거룩한 고민과 함께 가져야할 또 하나의 태도는 거룩한 열정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열정의 본이 되신 분이셨다. 본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본문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44)는 말씀으로 주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기도에 거룩한 열정을 쏟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단순히 당시 기도하는 모습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애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시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시면서 흘리신 땀은 주님의 피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천사를 통하여 이런 주님을 도우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거룩한 열정을 품은 사람들은 누구나 경험한 사실이다.

 

거룩한 열정은 우리 신자가 품어야할 태도요, 주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자세이다(롬12:11). 신앙이란 개인의 야망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나라와 그 뜻을 실현하는데 있다. 신앙생활은 주님의 나라와 그 뜻을 실현하는데 거룩한 열정을 쏟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것들은 덤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주님은 이런 사람과 함께 하시고, 이런 사람을 돕도록 그의 천사를 보내신다.

 

3.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

한 청년이 기도에 대하여 배우고 싶다며 목사님을 찾아왔다. 목사님은 아무 말도 없이 이 청년을 데리고 강으로 갔다. 강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더니 청년을 물속에 밀어 넣고는 물위로 나오지 못하도록 어깨를 눌렀다. 청년이 허우적대자 그때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기도를 배우러갔다가 느닷없는 일을 당한 청년은 목사님에게 강하게 항의를 했다. 그러자 목사님이 청년에게 물었다.

 

     ‘물속에 있으니까 무슨 생각이 들던가? 숨을 쉬고 싶고,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지? 기도는  바로

      그렇게 하는 거야! 숨을 쉬고 싶고, 살고 싶다는 그런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하는 거야!’

 

옷을 만드는 것은 재단사의 일이고, 구두를 수선하는 것은 구두수선공의 일이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것은 누구의 일일까? 우리 신자의 일이다. 기도는 주님의 능력을 붙잡는 손이고, 기도는 어둠 속에서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탐조등과 같다. 이처럼 소중한 것이 기도이다. 신자라면 누구나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기도에도 중요한 것이 태도(자세)다. 기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어떻게 기도하느냐가 관건이다. 그것은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다. 본문에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니”(41).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우리 성경에는 ‘힘쓰고 애써’라는 단어가 기도를 수식하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 있으나 원문과 영어번역LB/for he was in such agony of spirit에서는 간절한 기도의 원인으로 되어 있음)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44). 본문과 같은 내용의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세 번 기도하셨다(여기서 '3'은 유대인이 좋아하는 완전수로서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하나님의 확고한 뜻이라는 점과 주님 기도의 간절함을 강조한 것)고 기록하고 있다(26:44). 이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주님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하게 기도하셨는가를 보여준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다보니 흐르는 땀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이런 주님의 기도 현장에 하늘로부터 천사가 나타나 힘을 도왔다(43).

 

오래전에 어느 목사님이 자신의 책에서 신자들의 기도 대부분이 천국에서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기도는 하지만 간절함이 없고, 절실함이 없는 기도를 경계하는 표현이다. 참된 기도는 말의 잔치가 아니라 간절한 마음과 태도이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신다고 했다(마6:8). (어떤 사이비 단체의 주장처럼)그러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시고, 태도를 보시고, 그 중심을 보신다는 뜻이다. 간절한 마음과 태도만 있으면 우리가 있는 어떤 곳이든 기도의 골방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말의 많고 적음이나 시간의 길이에 상관없이 기도의 강력한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사실 너무 절박하고 절실하면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삼상1:13). 목마른 사슴처럼, 메마른 땅처럼 이런 간절함으로 주님을 찾고, 이런 간절함으로 부르짖는 사람들이 되자. 기도를 통하여 흘린 땀과 쏟은 피가 주님 제단의 아름다운 향이 되고, 주님께 기쁨이 되어 응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천사의 손길을 기대하며

교회를 개척 한 그 해(2005년), 부활주일까지 ‘40명이 모여 예배드리는 40일 특별기도회’란 표어를 내걸고 기도회를 시작하였다. 교회를 시작한지 한 달 반 정도 되었던 때라 참여할 지체들도 없었지만 있는 사람들도 다들 바쁜 사람들이라 참여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지체들이 없어도 우리 부부만이라도 기도하겠다는 마음으로 교회로 갔다. 그런데 예배당 문 앞에 아무 쪽지도 없이 쌀 40㎏짜리 한 가마와 동물모양의 고무과자 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놓고 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기도회를 기뻐하셔서 격려하기 위해 먼저 그 천사를 보낸 것이라 결론을 짓고 확신을 가지고 기도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사건일 수 있지만 당시 제게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주님이 교회 개척을 기뻐하시는 구나. 그리고 내가 주님이 기뻐하는 그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과,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기도’였다. 매일 저녁 5~6명 이상씩 모여서 기도하였고, 그 기도회의 결과 가장 큰 선물은 우리 손용규 집사의 회복과 그 가족의 구원이다. 그 외에도 부활주일에 53명이 참석하고, 교회차량을 기증 받는 등 많은 은혜를 경험하였다. 항존직원(집사, 권사) 선택을 앞두고 내일(9/6)부터 실시하는 금번 ‘50일 특별기도회’ 역시 천사의 손길을 기대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풍성한 은혜와 아름다운 결실로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

 

모쪼록 모든 지체들이 자신과 가족과 교회와 세상에 대한 거룩한 고민과 거룩한 열정을 품고 이 기도회에 참석할 수 있기를 바라고, 그래서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부르짖어 주님처럼 천사의 도움을 받는 영적인 체험을 비롯하여 풍성한 은혜와 응답을 경험하고, 우리 자신의 성숙과 우리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부흥의 기회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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