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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추고 낮추심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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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368회 작성일 10-09-1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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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추고 낮추심Ⅱ, “겸손”

고후12:7~10

2010. 9/12 08:00, 11:00

화장실이 어디죠?

최고의 실력으로 의대를 졸업한 두 명의 수련의(修鍊醫)가 있었다. 하루는 이 두 사람이 병원 복도를 걷고 있는데, 복도 저편에서 한 사람이 매우 고통스런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 걸어오고 있었다. 이것을 본 한 사람이 자신있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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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저 사람은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야!’

 

그러자 다른 사람이 친구의 말을 부정하며 말했다.

 

‘천만에, 저 사람은 디스크 환자가 틀림없어!’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옥신각신했다. 그때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주 힘겹게 물었다.

 

‘저, 지금 몹시 급한데, 화장실이 어디죠?’

 

우리 지식의 한계, 판단력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얼마 전에 세계적인 물리학자(S. 호킹)가 ‘우주는 신의 창조가 아니라 중력 법칙으로 만들어졌다.’고 발표하여 학계와 종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종교계의 많은 반발을 사고 있다. 저명한 학자의 주장이니 존중은 하지만, 이는 결국 자기 한계를 모르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교만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공자를 생각해 보았다. 제자 중 한 사람이 공자에게 죽음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는 ‘아직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며 답을 회피했다. 이런 공자의 태도에서 현재에 충실하라는 의미와 함께,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공자처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학자다움의 참 모습이다. 알아도 모르는 것처럼,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이 삶의 미덕인 것이다.

 

사단의 심리적 핵심

심리상담가이고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M. Scott Peck)은 그의 책 「거짓의 사람들」에서 사단의 심리적 핵심을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나르시시즘을 ‘자기도취적인 자기애’라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스캇 펙이 말하는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외모에 도취되어 거울만 바라보고 있는 공주병 정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교만한 태도를 말한다. 결국 사단의 심리적 핵심이 교만이라는 뜻이다. 교만이 사단의 심리적 핵심이라면 사단에 붙잡힌 인간의 심리적 핵심 또한 교만이다. 이런 사람이나 단체는 자신은 완벽하고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를 향해 책임을 전가하고, 그 책임전가는 애매한 희생양을 만들게 된다. 이런 악순환이 악을 확대 재생산한다. 그래서 인간이 망할 수밖에 없고, 세상 역시 멸망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치명적인 아킬레스 건

그리스 신화에 ‘휴브리스’(Hubris)라는 신이 나온다. ‘신의 영역에 다다르려는 오만’으로 해석되는 '휴브리스'는 탁월했지만 교만했기에 제우스로부터 버림을 받은 신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 Toynbee)는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역사는 창조적 소수가 바꾸어간다. 그런데 한번 역사를 바꾸는데 성공한 이 창조적 소수들이 자신들이 성공한 방법을 모든 곳에 다 통하는 절대적 진리인양 우상화하는 것(즉 자기 성공경험의 절대화)을 그는 ‘휴브리스’라고 불렀다. 일리아드(Iliad)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트로이 전쟁(The Trojan War)에서 아킬레스(Achilles)가 죽은 헥토르(Hector)의 시체를 마차에 매달아 끌고 다니면서 조롱을 하는 모습을 ‘휴브리스’라고 표현했다. 더 이상 자신을 상대할 경쟁자가 없음을 과시하는 그 태도가 휴브리스라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 토인비의 해석, 그리고 일리아드를 통해 교만의 성격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자기 우상화요, 자기 절대화이다. 흔히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을 ‘아킬레스 건’(원래는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뜻임)이라고 부르는데, ‘교만’이 바로 그 아킬레스 건(Achilles tendon)이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고 말씀하시면서, “그런즉 선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는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만은 인간이 빠지기에 가장 쉬운 것인 동시에 인간이 극복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다.’(St. 어거스틴).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교만 때문에 무너지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가장 아름다운 지위를 가졌던 천사장 루시엘(하나님의 보좌를 덮는 찬양과 경배를 담당하는 천사)도 교만으로 인하여 사탄(루시퍼)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사14:13~14).

 

가시, 교만을 막는 안전장치

지난주에 말씀 드렸듯이 바울은 많은 장점을 가진 사람이다(고후11:22~28 참조). 게다가 영적인 체험도 깊은 사람이다(고후12:1~6). 토인비의 지적대로 장점이 많고, 체험이 깊은 사람은 자신의 그것들을 절대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크다. 특히 이것은 영적 체험을 깊이 한 신자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바울 역시 사람이기에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바울에게 주님께서 사단의 사자 곧 ‘가시’를 주셨고, 바울은 이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 응답은 가시의 제거가 아니라 가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었다. 그리고 가시를 주신 목적에 대한 깨달음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7).

 

여기서 바울은 주님이 자신에게 가시를 주신 이유와 목적을 거듭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 커서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주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만을 막는 ‘안전장치’로서 가시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가시가 바울 자신에게 있어서는 교만을 막는 안전장치라는 고백이다. 자동차로 말하면 제동장치와 같다. 사실 제동장치는 달리는 자동차에게 있어서 불편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있기에 자동차가 안심하고 달릴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안전이 확보될 때 유익하게 작용할 수 있지 안전이 확보되지 못하면 그것은 재앙으로 이어진다(물, 불, 바람, 전기, 가스, 짐승........). 우리 인생에서 가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와 같다. 그렇지만 가시 때문에 우리 인생이 안전하고 유익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고 고백한 것이다. 일찍이 주님께서도 요한복음에서 병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9:2)으로 해석하셨다.

 

이렇게 가시를 ①교만을 막는 안전장치, ②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기회, ③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도구로 이해하는 것은 가시에 대한 관점의 변화이다. 관점이 변하면 해석도 변하고, 의미도 변하고,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그래서 가시는 더 이상 바울에게 무거운 짐도, 고통거리도, 해결 받아야 할 기도제목도 아니었다. 가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방편이요, 은혜와 축복의 통로요, 삶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막아주는 안전장치였다.

 

주님은 우리 형통을 바라신다.

세상에 자식 잘못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항상 잘해주고 싶고, 좋은 것 주고 싶고, 많이 주고 싶고, 귀한 것 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그래서 때로는 훈계를 하기도 하고, 제재를 가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징계를 가하기도 한다. 주님의 마음은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과 같다(마7:11). 그러니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을 주실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주님의 숨은 뜻이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시를 허용하심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사실만 굳게 믿어도 만사 안심이다.

 

교만은 모든 악의 뿌리이다. 때문에 주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하셨다. 반면에 주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낮은 땅에 물이 고이듯, 낮추면 주님의 은혜와 복이 넘친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낮추지를 못한다. 그것은 죄가 근본적으로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비상수단으로 우리에게 때때로 질병이라는 가시, 가난이라는 가시, 사고라는 가시, 실패라는 가시, 고독이라는 가시를 허락하셔서 억지로 낮추실 때가 있다. 이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교만을 막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그러니 가시는 교만한 우리를 낮추시는 은혜인 것이다. 우리를 은혜의 강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주님의 손길이요, 받은 은혜를 유지하여 더욱 풍성한 은혜 안에 머물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다. 바울은 이런 주님의 손길, 주님의 마음을 기도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가시를 자랑하고, 기뻐하게 된 것이다.

 

낮춘 만큼 잘된다.

영국 극작가 플레처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를 들어 큰일을 시키실 것이다.’라고 했다. 신앙생활은 낮아짐의 훈련이다. 담이 낮을수록 정원의 풍경이 잘 보이는 것처럼, 낮아질수록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고, 주님의 모습이 잘 보이고,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잘 임한다. 그래서 때때로 주님께서 사람을 무너뜨리고 낮추시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미국 재벌 페니는 슈퍼마켓 2,000개를 운영했는데, 55세 때 몽땅 망하고 말았다. 많은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나서 그가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는데, 바로 주님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주님을 발견하기 전에는 내 능력으로, 내 수완으로 땀 흘려 번 돈이니까 내 마음대로 쓰겠다고 교만하게 생각하고 재물을 사용했다. 그랬더니 결국 사업은 실패하고 모두 잃고 말았다. 그렇게 낮아져서야 나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모든 것이 은혜요, 주님의 것이니 그의 뜻대로 쓰겠노라고 겸손하게 항복하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이후 삶이 회복되면서 성공한 삶을 살게 되었다.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주님을 발견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투자를 한 셈이니 감사할 뿐이다.’

 

낮아지니까 주님이 보였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재기에 성공하여 대규모 백화점 체인을 만들어 백화점 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낮추심은 주님을 알게 하는 비결, 주님의 능력을 머물게 하는 비결, 형통의 비결, 참으로 능력있는 삶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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