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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추고 낮추심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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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898회 작성일 10-09-2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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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추고 낮추심Ⅲ, “능력”

고후12:7~10

2010. 9/26 08:00, 11:00

힘을 빼라!

무슨 운동이든 처음 배울 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힘 빼!’라는 말이다. 수영을 할 때 몸에 힘을 주면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고 힘을 빼는 순간 저절로 물에 뜨게 된다. 탁구도, 야구도, 배구도, 축구나 골프도 마찬가지다. 운동뿐만 아니라 피아노를 배울 때도 자주 듣는 말이 손목과 손가락에 힘을 빼라는 말이고, 발성을 하거나 찬양을 부를 때도 목에 힘을 주지 않고 힘을 빼야한다. 글을 쓸 때도 펜 끝에 힘을 빼야 하고, 말을 할 때도 힘을 빼야 한다. 특히 운동에서는 힘이 들어가면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고, 도리어 사고를 당할 수가 있다. 초보와 고수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사실 신앙생활도 힘을 빼는 훈련이다. 신앙의 미숙과 성숙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어떤 분야건 수없이 ‘힘 빼’를 강조하는 것을 보면 힘을 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이는 강력한 힘은 유연한데서 나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운동선수가 힘을 빼면 몸이 유연해져서 안에서부터 더 강한 힘이 나오듯, 힘을 빼야 안에서부터 참 힘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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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힘이 들어가면) 힘들다.

우리는 자주 ‘힘들다’, 혹은 ‘힘난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말장난(word play)을 해보면 힘이 들어가니까 힘이 든 것이고(힘들다=힘+들어가다), 힘이 나가니까 힘이 나는 것이다(힘난다=힘+나간다). 어디든지 힘이 들어가면 틈이 생기고 금이 간다. 그러면 그곳으로 바람이 들어가고, 물도 스며들어 결국은 무너지게 된다. 우리 삶도, 관계도 힘이 들어가면 틈이 생기고 금이 가서 나중엔 무너진다. 닉 스켈론(N. Skellon)의 「기업들의 전쟁」에 힘 있는 기업이 어느 날 힘을 잃은 이유를 ‘3C’로 설명하고 있다. ①자기만족(Complacent), ②과신(Confidence), ③오만(Conceit)이 그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힘과 관련이 있는 단어들이다. 힘이 있다고 힘을 주다가 힘을 잃게 된 것이다.

 

이는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도 교회도 마찬가지다. 중세시대에 교회처럼 힘 있는 기관은 없었다. 교회만능, 교권만능의 시대였다. 권력도, 물질도, 명예도 교회가 다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사에서는 중세를 타락한 시대, 암흑시대라고 평가한다. 힘이 있다고 그 힘을 쓰다가 참된 힘(영적인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스도를 본 받아」의 저자 토마스 아킴퍼스가 교황청을 방문했을 때, 당시 교황이 토마스 아킴퍼스에게 교황청 보물창고를 열어 보이며, ‘자 보라, 베드로와 요한시대처럼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의 시대는 지나갔노라.’고 자랑했다. 그러자 토마스 아킴퍼스가 ‘교황폐하여,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시대가 지나갔으므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시대도 지나갔나이다.’고 대꾸했다. 세속적인 힘은 가졌지만 영적인 힘은 상실했다는 일침이다. 교회는 물질이나 권력, 명예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신령한 힘으로 움직인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가 아니다. 노자는 ‘발 돋음 하려고 발을 곧추세우면 발밑이 불안해진다.’고 했다. 그는 또 ‘세상의 가장 큰 죄는 욕망에서 비롯되고, 최대의 화는 족함을 알지 못 한데서 오며, 최대의 과오는 이익을 탐내는 데서 기인한다.’고 했다. 인생이란 자신의 힘을 줄수록 불안해지고, 힘을 빼지 못한 것, 온전히 자신을 비우지 못함이 죄이고, 화를 부르는 일이란 말이다. 오히려 힘이 있을수록 힘을 빼야 한다. 이것이 평안함의 비결이고, 무너지지 않고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

 

힘 빼(비우)면 힘난다.

시인 안도현 씨의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펜 끝에 힘을 빼라. 그러면 생각의 힘이 살아난다.’ 힘을 빼면 새로운 힘, 참 힘이 생긴다는 뜻이다. 어떻게, 무엇을 쓸 것인가? 혹은 잘 써보겠다는 욕심을 비우면 창조적인 생각이 솟아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글쓰기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마음이든 물건이든 빼고 비우면 그만큼 채워진다. 잔을 비워야 또 다른 무언가를 채울 수 있다.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것이 기적을 만들어낸다. 더하기만 하면 고여서 썩고 주변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빼면 흘러서 넘치게 되고 주변을 풍성하게 만든다(요12:24). 이에 대한 가장 좋은 모델이 우리 주님의 삶이다. 주님의 삶은 힘을 주는 삶이 아니라 힘을 빼는 삶이었다. 한없이 비우고 나누는 삶이 주님의 삶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았다. 특히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뺌(비움)으로 생명을 살리는 기적의 사건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삶이 있었기에 저와 여러분이 구원의 생명을 얻게 되었고,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비움은 채움이다. 비울수록 인생은 수많은 아름다움으로 채워지게 된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은혜, 주님이 주신 신령한 능력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래서 나의 힘, 능력, 지혜로 사는 것보다 훨씬 힘 있고 능력 있게, 지혜롭게 살 수가 있다. 오늘 본문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이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려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9,10).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가시를 위한 바울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과 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다.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하나는, ‘가시의 은혜’ 됨이다. 여기서 주님은 가시가 주님이 바울에게 주신 은혜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는 가시 자체가 은혜라는 말이 아니다. 가시를 통하여 자신의 약함을 깨닫게 된 것, 겸손하게 된 것이 은혜라는 말이다. 병이 은혜이고 가난이 은혜이고 핍박이 은혜가 아니라, 이것들로 인하여 자신의 힘을 내려놓고, 자기를 비울 수 있게 된 것이 은혜이다. 앞에서 힘을 빼면 힘이 나고, 비워야 채워진다고 했는데, 문제는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골프에서 ‘힘 빼는데 3년, 힘을 주는데 또다시 3년’이란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께서 그의 몸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셔서 자연스럽게 힘을 빼게 하신 것이다. 자기를 비우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 가시를 은혜라고 한 것이고, 나아가서 가시를 기뻐하고 자랑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가시가 좋아서가 아니라 가시 때문에 자기를 비울 수가 있고, 자기를 내려놓을 수가 있고, 자기 힘을 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때때로 환경이라는 가시, 질병이라는 가시, 핍박이라는 가시, 가난이라는 가시를 주심도 같은 이유이다. 결국은 우리를 무너지게 하는 우리의 힘을 빼기 위함이다. 우리를 겸손히 낮추고 비우기 위함이고, 우리의 공과와 업적을 무너뜨리고 내려놓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낮추고, 힘을 빼고, 비우고, 무너뜨리고, 내려놓게 하심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도록, 그래서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은혜를 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9). 우리의 능력은 자신을 무너뜨리고 주님의 신뢰하는데 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다른 하나는, ‘채움의 은혜’이다. 주님의 힘 빼기, 비우기, 낮추고 무너뜨리기, 내려놓기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음을 위한 예비동작일 뿐이다. 체조경기나 높이뛰기 경기에서 가끔 첫 도움에 실패하여 경기를 망친 선수들처럼 예비동작이 잘못되면 전체를 망칠 수 있기에 이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비움은 채움을 전제로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힘을 빼신 것은 새로운 힘과 능력으로 채우시기 위함이고, 겸손히 낮추심은 높이기 위함이며, 무너뜨림은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내려놓게 하심은 더 좋은 것으로 풍성히 안겨주시기 위함이다. 주님의 은혜로 채우시고, 능력으로 채우시고, 복으로 채우신다. 가시가 은혜가 되고, 약함이 강함이 될 수 있음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며 겸손하고 낮은 태도를 취하는 것이 주님의 능력이 발현되기에 가장 좋은 태도이다. 그리고 주의 능력이 임하면 평범한 자가 비범하게, 무능한 자가 유능하게, 어리석은 자가 지혜롭게, 연약한 자가 강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약한 곳에 주님의 능력이 임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는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흐르고, 비어있는 곳을 가득 채우고, 또한 주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약한 곳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온전하여 진 것은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은혜의 성격 때문이다. 또 하나는 자신의 약함과 부족 때문에, 주님만 전폭적으로 신뢰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이다. 본문의 바울이 좋은 예다(8). 주님의 은혜와 능력은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에게로 향한다. 주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시다(시107:9). 그래서 약함이 복이고, 약함이 은혜이고, 약함이 능력이 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은 강할 때보다 약할 때 더 성장한다. 더 안전하다. 그러므로 약함은 약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머물게 하는 강점이다. 하지만 사모함이 없는 사람에게 가시는 은혜의 통로, 능력의 통로가 아니라 삶을 파괴시키는 올무이고, 사망의 독(毒)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가시를 주심은 자신의 약함을 알라고 주신 것이다. 그 동안 내가 붙잡고 있고 추구하던 것들의 실상, 곧 그것들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익한 것인가를 알고, 그것들을 다 내려놓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만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고 주님의 능력이 풍성히 임하여 약함을 통해 강함을 드러낼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약한 자라도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주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히면 강하게 되기 때문이다(모세의 지팡이, 오병이어 등). 우리의 능력은 주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부서진 자를 사용하신다.

탈무드에 ‘하나님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는 말이 있다. 낱알 그대로인 밀을 가지고는 빵을 만들 수가 없다. 밀을 부서뜨려 밀가루가 되어야 비로소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다. 으깨지지 않고는 맛있는 포도주, 좋은 기름, 값진 향수가 될 수 없고, 흙이 잘 부서지지 않고는 좋은 그릇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 귀한 그릇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깨어지고 무너지고 비워지고 낮아져야 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는 중요한 원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힘을 빼는 것’이다. 요셉은 13년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였고,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동생활을 하였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10여 년을 도피생활을 하였고, 바울도 아라비아 사막과 고향 다소에서 13년 간 생활하였다. 이런 세월들은 하나님께서 이들의 삶 속에서 힘을 빼는 시간들이었다. 그들을 낮추고, 깨뜨리고, 비우는 시간들이었다. 하나님은 자아가 강한 사람, 부서지지 않은 사람은 쓰시지 않으신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다. 이는 인간적인 모든 힘들과의 완전한 결별선언이다. 바울이 그토록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내려놓았고, 자신은 ‘영’(0)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부어졌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철저한 부정! 주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 이것이 바울의 생애였다. 그러니 그가 탁월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약함을 알고, 그 약함 때문에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자! 이것이 우리가 주님은 은혜를 받고, 능력을 받고, 나아가서 주님께 쓰임 받는 값진 인생이 되는 비결이다. 이번 특별 기도회는 은혜 받고, 능력 받고, 쓰임 받는 인생이 되는 소중한 통로가 될 것이다.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필요 없을 만큼 자신이 있는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나와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도제목 - 영향력 있고 능력 있는 삶을 위하여”

1. 아직도 빼지 못한 나의 힘을 알게 하소서!

2.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님을 의지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주소서!

3.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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