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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편으로 건너가자.(0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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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402회 작성일 06-07-10 11:40

본문

저편으로 건너가자.
눅8:22-25

미국에 키티 가린이란 지독한 구두쇠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평생 오트밀만 먹고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녀의 병명은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녀에게는 발을 사용하지 못하는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려서 종아리에 종기가 났는데 수술을 하지 않아 그것이 곯아 다리를 절단하고 평생불구로 살았습니다. 가난해서 그랬느냐, 결코 아닙니다. 그 할머니가 죽었을 때 그녀의 침대 밑에서 통장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그 통장 안에는 돈이 무려 1억 달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까워서 그 돈을 사용하지 못하고 자신은 영양실조로 죽고, 아들은 평생불구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달리생각해 보면 이 할머니의 모습이 곧 우리 신자들의 모습이고, 우리 교회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우주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자녀요, 그분의 상속자들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기도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으로도 산을 바다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실제 삶 속에서 이와 같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생활 속에서 그 능력을 확신하고 활용하면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양실로 죽은 이 구두쇠 할머니처럼 엄청난 특권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초라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본문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우리 모습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밤늦게 갈릴리 호수를 건너다 광풍을 만난 사건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지형적인 특성(서쪽에 있는 지중해보다 300미터가 낮고 북쪽은 헐몬산과 동쪽은 광야로 쌓여 있어 저녁으로 헐몬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광야의 뜨거운 바람이 만나 자주 돌풍을 일으킴)때문에 자주 돌풍이 일어나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바람을 만나 고생하는 모습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은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는 선언입니다. 동시에 믿음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사나운 바람과 파도도 잔잔케 하는 능력임을, 이 능력을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몇 가지 사항을 도전하고 하고 있습니다.

1.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라! -새로운 비전에 도전하라!
지난주에 교회 매입에 대한 잔금과 등기완료에 대하여 광고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여러분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 혼자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전혀 아닐 수도 있지만 세 가지 정도의 반응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①잘한 일이다. ②잘했지만 부담스럽다. ③우리 형편에 아직은 시기상조다. 저의 경우는 ‘잘했지만 부담스럽다’는 생각입니다. 무슨 일이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적절하게 잘 선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저는 이번 교회구입이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게 주신 중요한 기회요, 은혜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담을 느끼는 것은 우리 지체들 중에 이 일로 인하여 힘들어 할 분들이 계실 것 같아 마음의 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응을 넘어 일단 구입을 했기에 교회는 일정한 원칙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교회를 운영할 것입니다. 먼저는, 모두가 참여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한 두 사람이 세워나가면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개미군단식으로 어린이들까지 포함해 모두가 참여하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몸된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비교하지 하지 않고 받은 은혜대로 은사 따라 섬기는 교회입니다. 문제는 항상 비교하는데서 비롯됩니다. 비교의식에 빠지면 하나님의 은혜나 믿음은 자취를 감추고 체면과 경쟁심만 남습니다. 체면과 경쟁심에 사로잡히면 원망과 불평이 생깁니다. 교회는 순수성을 상실한 이전투구장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받은 은혜대로, 은사를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위적으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에 교회들에서 보면(요즈음도 그런 교회가 가끔 있음) 땅을 사거나 건축을 하려 하면 부흥회 등을 통해 헌금을 거두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혹은 각자 (자신의 힘을 헤아려)작정을 하게 하여 헌금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결코 이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저나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시도하고자 하면 여러분들께서 항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억지나 강요가 아닌 자원하므로 동참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야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나 일을 성사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며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칙에 따라 교회를 세워가자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우리 지체 한사람, 한사람이 견고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믿음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교회의 힘은 조직이나 재정 상태,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지체들의 믿음에 있습니다. 얼마나 믿음에 헌신되었느냐가 교회의 힘입니다. 비록 무리하게 보이는 일이지라도 믿음으로 시도하면 은혜로 마칠 수 있고, 사소하고 하찮게 보이는 일도 믿음을 떠나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도전한 이 일을 아름답게 이룰 수가 있고, 몸된 교회를 세워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호수 이편의 한계에서 벗어나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새로운 도전이요, 새로운 비전제시입니다. 제자들이 가야할 목표입니다. 신앙인들과 교회에게는 ‘호수 저편의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에는 호수 이편 신앙과 호수 저편 신앙이 있습니다. 호수 이편신앙은 현실에 안주하는 신앙입니다. 성장이나 성숙을 기대할 수가 없고, 나아가서는 신앙적 매너리즘에 빠지고 맙니다. 반면 호수 저편신앙은 도전하는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원래 명사가 아니고 동사입니다. 활동하고 도전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끊임없이 호수 저편으로의 도전입니다. 도전하는 곳에 신앙의 감격이 있고, 성장과 성숙이 있습니다. 풍성함이 있고, 날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게 왕지지역으로의 이사는 호수 저편의 비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뻐하는교회에게 주신 새로운 도전입니다. 이는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닙니다. 새로운 비전에의 도전입니다. 이는 우리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이 일에 성도 여러분들의 즐거운 헌신과 참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교회는 물론 우리 개인의 신앙에도 커다란 성장과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우리가 죽겠나이다! -광풍에 주눅들지 말라! 대가를 지불하라!
죽음을 넘나드는 산고 끝에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있습니다. 비전 역시 거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호수 저편으로 가는 도중 ‘광풍’을 만납니다. 주님의 명령과 요구에 따라 가는 길이지만, 특히 주님과 함께 가고 있는데도 광풍을 만납니다. 이 광풍은 제자들에게 죄가 있거나 문제가 있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는 갈릴리 호수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자연현상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자연현상을 넘어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도 광풍은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비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지불해야 할 대가인 셈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제자들이 이 광풍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유능한 갈릴리 어부출신입니다. 바다에 대해, 특히 바람과 파도에 대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다, 바람과 파도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저들의 갈릴리 호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는 다급함(“주여, 주여”)과 긴박함(“죽겠나이다”)의 표현으로 광풍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자들 모습을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제자들의 마음과 믿음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광풍 앞에서 마음이 무너지고, 믿음이 산산조각난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광풍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항해는 주님의 명령이고, 주님이 함께 하신 것이기에 안전하리라는 ‘잘못된 평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광풍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준비없이 당하고 보니 이렇게 당황하고 놀란 것입니다. 죽겠다고 아우성을 친 것입니다.

특히 이 광풍사건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 대한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평안하고 안락한 항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노도광풍이 몰아치는 악천우 속을 항해하는 것과 같음 보여준 것입니다. 즉 많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몸으로 체험케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광풍이라고 하는 대가를 지불하고서 안전하게 호수 저편에 안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거저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고, 이룰 수 있고, 거둘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의 존재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이를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왕지지역에서 평안한 항해만 있지 않고 때때로 시련의 광풍이 몰려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미리서 주눅들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되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시고, 시험을 당할 땐 피할 길을 주시든 아니면 감당할 힘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고전10:13). 오히려 크고 작은 풍랑들을 지불해야 할 비전의 대가로 생각하며 당당히 맞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시련의 광풍이 축복의 광풍, 교회부흥의 광풍으로 변할 줄로 믿습니다.

한 농부에게 늙은 당나귀가 있었는데, 이 당나귀가 빈 우물에 빠졌습니다. 농부는 슬프게 울부짖는 당나귀를 구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마침 당나귀도 늙었고, 쓸모없는 우물도 파묻으려고 했던 터라 농부는 당나귀를 단념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우물을 파묻기로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우물을 파묻기 위해 제각기 삽을 가져와서는 흙을 파 우물을 메워갔습니다. 당나귀는 더욱 더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웬일인지 당나귀가 잠잠해졌습니다. 사람들이 궁금해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고 털어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래서 발밑에 흙이 쌓이게 되고, 당나귀는 그 흙더미를 타고 점점 높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해 무사히 그 우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자신을 매장하기 위해 던진 비방과 모함과 굴욕, 고난, 고통, 시험의 흙이 오히려 자신을 살린 것입니다. 고난의 진흙을 맞을 때 그것을 털어버려 자신이 더 성장하고 높아질 수 있는 ‘영혼의 발판’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 날 그 ‘곤경의 우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을 맞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건이 나를 구해 주는 ‘기적의 사다리’가 될 것이요, 영혼이 높아지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우린 광풍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광풍에 대한 태도, 즉 광풍에 두려움이 문제입니다. 광풍에 주눅들지 말고, 주님이 주신 비전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로 알고 당당히 맞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을 사용하라!
이와 같은 제자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에 대한 책망이 아닙니다. 이 말씀 속에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상황에서 그 믿음을 적용하지 않느냐는 책망입니다. 바람과 파도를 잠재울 능력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믿음을 활용하지 못함에 대한 책망입니다.

여러분, 우린 주님의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는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오늘 본문이 보여주듯 광풍을 잠재울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의 믿음을 우리는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믿음을 삶의 현장에서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삶 속에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들의 문제요, 이 때문에 주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장식용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적용하여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용할 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감정이나 저절로 작동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가 조정하고 작동해야 할 그 무엇입니다. 그러므로 벌어지는 상황과 처한 형편에 믿음을 적용해야 합니다. 지난주일 설교 본문이었던 시42편에서 보았지 않습니까! 저자는 낙망과 불안이 찾아올 때, 믿음을 적용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11) 아무리 앞이 캄캄하고 어려움에 처해도 ‘나는 믿는다. 하나님은 하나의 창문을 닫으시면 다른 창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이런 믿음을 현실과 상황에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께서 그 믿음대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교회가 작고 어렵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주님이 찾으시는 제물과 같은 교회가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교회를 통하여 이 시대는 교회개척이 안된다는 잘못된 신화를 깨뜨리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교회는 부흥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영적 거인들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확신하는 것은, 저나 여러분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우리 안에 있는 믿음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에서 광풍을 잔잔케 하신 주님의 보고 제자들이 놀라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제자들처럼 다른 사람의 능력있는 삶을 보고 놀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능력있는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놀랄 것이 아니라 우리교회가 믿음의 능력을 보이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는 책망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적용하여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우린 새로운 도전을 주님으로부터 명령 받았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믿음을 잘 사용하여 주님의 이 명령을 성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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