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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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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571회 작성일 10-10-03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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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11:23~26

2010. 10/3(세계성찬주일) 08:00, 11:00

목회는 먹회다!

한자에 화할 ‘화’(和)자는 평화(平和), 조화(調和), 화목(和睦), 화평(和平)처럼 아름다운 낱말에 주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和’는 곡물류의 총칭인 ‘벼’ 화(禾)에 사람의 벌린 입모양을 나타내는 ‘입’ 구(口)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글자로, ‘和’가 먹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곡식을 수확하여 여럿이 함께 나누어 먹으니 잘 어우러지고 보기에 좋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인관관계의 시작은 먹는데서 비롯된다. 음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준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막힌 것을 뚫어준다. 그래서 관계를 가깝게 만들어준다. 흔히 더 없이 절친한 사이를 ‘한솥밥 먹는 사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반대로 함께 하기 싫은 사람에 대해서는 ‘밥맛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족을 ‘식구’(食口)라고도 말한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이란 뜻이다. 영어로 ‘친구’, ‘동료’, ‘동반자’를 ‘companion’이라 하는데, 이 단어는 라틴어 ‘cumpanis’에서 왔다. cumpanis=cum(함께)+panis(빵)로, ‘함께 빵을 먹는 자’란 뜻이다. 이처럼 밥을 함께 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인간관계가 규정되기도 한다. 어느 원로 목사님이 목회에 대한 이런 명언을 남겼다. ‘목회는 먹회다!’ 영/육간에 잘 먹고, 자주 먹고, 많이 먹으면 ‘즐거운 교회’되고, 즐거운 교회가 되면 부흥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먹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인생에서 먹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가 없고, 먹는 자리만큼 행복하고 즐거운 것도 없다. 이는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식탁교제, 천국잔치의 그림자

성경에는 두 그룹의 식탁교제가 등장한다. 당시 사회의 지도층이었던 바리새인들의 식탁교제와 하층민이었던 죄인들의 식탁교제가 그것이다. 주님은 후자를 더 선호하셨다(바리새인들의 식탁교제에도 참석하심). 당시 사람들이 주님께 붙여준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11:19)라는 별명도 실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복음서를 보면 주님의 식탁교제에 대한 기사가 자주 나오고, 식사를 무척 즐기셨다. 그래서 이를 언짢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탐식가’라, 혹은 ‘술고래’라고 비꼬기도 했다(마11:19). 하지만 함께 밥을 먹는 식탁교제는 말 그대로 천국의 표징이요, 천국잔치의 예표였다(눅5:29, 19:1).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과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잡수셨던 만찬(晩餐)은 우리 신자들에게는 성찬(聖餐)이 되었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이 되었다. 오늘(매년 10월 첫 주일)은 세계교회가 ‘세계성찬주일’(World Communion Sunday)로 지정하여 함께 지키는 날이다. 이 시간에는 성찬예식에 앞서 성찬의 의미(기독론적 입장에서)를 간단하게 새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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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Christ, ‘일치와 연합’

성찬의 두 재료 빵(떡)과 포도주(술)는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주시며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24)이라 하시고, 포도주 잔을 돌리시며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25)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를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4,25)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념하여 행하는 이 거룩한 식탁은 ‘주님의 살이 내 살이 되고, 주님의 피가 내 피가 되는’ 주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일치)의 순간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in me)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and I in him) 거하나니”(요6:56). 거기다가 우리 모두 한 식탁에서 하나의 빵과 하나의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마셨으니 모두가 한 지체가 되는 신자간의 신비로운 일치(연합)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찬을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라고 부른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걸림이 없이(理事無碍) 한 몸이 되는 신비, 우리 사이에 아무 걸림이 없이(事事無碍) 한 지체가 되는 신비가 성찬이다. 이것이 성찬의 의미이고,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기억하고 확인해야 할 내용이다. ‘주님과 연합(일치)! 지체와 일치(연합)!’

 

2. with Christ, ‘함께 나눔’

성찬은 나눔의 사건이다. 주님의 몸을 나누고(24), 피를 나누는(25) 것이다. 나아가서 주님의 생명을 나누는 사건이다. 앞에서 성찬을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라고 했는데, 여기서 교제, 친교의 뜻을 가진 ‘communion’은 라틴어 ‘communio’에서 왔다. 이는 ‘함께 나눈다.’(sharing in common)는 뜻이다. 그래서 성찬을 ‘거룩한 나눔’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본질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주님)처럼 살라는 명령이다. 끝까지 쪼개지고 나누어지라는 것이다. 이웃과 함께 삶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고, 축복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라는 것이다. 바로 이 나눔에 생명이 있고, 나눔이 생명을 확장하는 것이다. 생명을 풍요롭고 풍성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이것이 신령하고 영적인 식탁 성찬의 또 하나의 의미이다.

 

3. for Christ, ‘희생으로 섬김’

성찬식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주님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 성찬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림의 상징이다. 빵이 쪼개지는 상징적인 모습 속에서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를 위한 주님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며, 우리 또한 주님처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 있는 산제사로 드리는 삶을 결단하는 것이 성찬식이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서례와 성찬을 ‘성례’(sacrament)라고 한다. 이 ‘sacrament’라는 단어는 라틴어 ‘sacramentum’에서 왔다. 이 단어는 ①원래 재판하는 당사자가 공탁한 금액을 가리키며, 재판에서 승소한 사람이 패소자의 금액을 신에게 드리는 일종의 제물로 ‘신성한 무엇’, 곧 ‘신성한 것을 내어 놓은 것’이란 의미다. 이것이 군사적 용어로 사용되면서 ②군인이 사령관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군중선서’를 의미하게 되었고, 교회는 이 단어를 ③성례의 용어로 차용하여 주께 순종을 서약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우린 이 용어에서 또 하나의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식을 주님의 몸과 피 앞에서 다시금 삶을 바치는 헌신의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26). 그리고 자신을 헌신한다는 것은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하나의 선물로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을 감수하며 섬기는 것이다.

 

하지만 헌신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다. 헌신은 자기성화의 길이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자기를 희생하며 헌신과 섬김의 길을 묵묵히 걸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이 거룩하신 주님을 닮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영어로 희생을 의미하는 단어 ‘sacrifice’는 ‘sacrum facere’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문자적으로 ‘성스럽게 하다'(to make sacred), 또는 ‘신성하게 하다’(to consecrate)는 뜻이다. 이 말을 풀어보면 우리가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바로 자신을 성화시키는 길이라는 의미이다.

 

나를 기념하라

무엇이든 습관화되면 생명력을 잃게 된다. 예배도, 기도도, 찬양도 습관화되면 생명력을 상실하고 만다. 성찬식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this do in remembrance of me/24)고 하셨다. 이는 주님에 대한 ‘기억’ 없이 그저 하나의 예식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의 경고이며, 동시에 주님에 대한 ‘기억’ 없이 이것을 행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기억’이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는 ‘recordari’인데, 여기서 ‘re-cor’는 ‘다시 마음으로 돌아간다.’(to bring back to the heart)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기억은 단순한 지성의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행위’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사랑을 갖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삶 전체를 사랑으로 그리워하는 것이며, 현재의 내 삶으로 다시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체험 속에 살아 있는 주님, 내가 경험한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행위다. 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이런 마음으로 이 시간 주님이 베풀어주신 이 거룩한 예식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예식을 통하여 주님과의 아름다운 교제(일치와 연합), 풍성한 나눔, 즐거운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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