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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으로 부르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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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858회 작성일 10-10-1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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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으로 부르신 주님

마4:18~22

2010. 10/10 08:00, 11:00

북을 치는 사람

미국이 개인의 생일을 국가 공휴일로 정해 경축하는 사람은 조지 워싱턴(G. Washington)과 마르틴 루터 킹(M. L. King) 둘 뿐이다. 킹은 보스턴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로, 인권과 정의와 평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35살에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나 39살에 암살을 당했다(1968.4.4). 그가 암살당하기 꼭 두 달 전, 애틀란타 에벤에셀 교회에서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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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나의 죽음을 가끔 생각한다. 따라서 나 자신의 장례식 광경도 연상해 본다. 나는 긴 장례식을 원치 않는다. 누가 조사를 한다면 제발 짧게 하라.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느니, 3,4백 개의 표창을 받았다느니 하는 말은 죽은 뒤에도 듣고 싶지 않다. 그러나 조사에 이런 말을 넣어 달라. 킹은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북을 치는 사람이었다. 이 한 마디 조사는 나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돈이나 값진 물건을 남길 것이 없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내 생명을 내놓는 헌신적인 섬김과 사랑의 삶을 남기고 가려할 뿐이다.’

 

북을 치는 사람, 그는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사람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해 앞장서서 가는 사람이다. 앞장서서 북을 치는 사람은 자기 일신보다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이고, 소극적인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협력자이다. 앞장서서 길을 여는 사람이고, 공동체의 사기를 끌어올려 난관을 극복하게 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 보이는 하나님의 일꾼이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북을 치는 사람이란 소중한 사명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찾아오신 주님

우리 기독교 신관의 독특한 점에 하나가 ‘찾아오시는 하나님’(seeking God)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속담처럼 필요한 사람, 아쉬운 사람이 찾아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안타깝고 억울한 문제가 있으면 변호사를 찾아가고, 병이 들면 의사를 찾아가고, 학생이 선생을 찾아가고, 제자가 스승을 찾아간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배우려고 하면 등록금을 들고 원하는 랍비를 찾아가 신청을 했고, 그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그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주님은 죄를 범한 인간,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친히 찾아오셨다. 주님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으심의 역사’다. 죄를 범하여 두려워 숨은 자, 길을 잃고 방황한 자, 질병으로 낙심한 자, 슬픔과 절망에 빠진 자,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 삶의 곤궁에 처한 자에게 친히 찾아오셨다. 찾아오셔서 친구가 되어 주시고, 위로하시고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여 주셨다.

 

본문은 주님께서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장면이다. 물론 그들이 제자로 삼을 만큼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질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주님의 제자들 중에 세상에 내세울 만한 변변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 앞에는 항상 ‘무식’이란 수식어가 따라 붙었고, 평생 멸시의 눈초리를 지고 살았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제자로 삼겠다고 친히 그들의 작업현장까지 찾아오신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나의 나됨이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일방적인 찾아주심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 신앙생활을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감사히 받아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부르시는 주님

주님의 부르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구원에로의 부르심’이다. 우리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이 되도록 부르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명에로의 부르심’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이 세상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모두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그러기에 교회와 신자는 온 인류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마28:18~20). 이를 위하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는 동시적인 사건이다. 권리에 의무가 따른 것처럼 구원에도 사명이 따른다. 본문에서 주님은 이 둘을 동시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구원)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사명) 하시니”(19).

 

여기서 “나를 따라오라”는 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를 헬라어로 ‘마데테스’(μαθήτης)라고 한다. 이는 스승의 말이나 사상, 행동을 따르는 자란 뜻한다. 신자는 주님의 말씀과 사상, 행동을 따르는 자로서 주님의 제자들이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것은 장차 사명자로 삼겠다는 뜻이다. 즉 우리의 사명과 관련된 말씀이다. 주님은 이 두 가지의 말씀을 동시에 하셨다. 그렇지만 의무(사명)를 행사하기까지는 일정기간이 요구된다. 대한민국 국민은 국방의 의무가 있지만 만20세가 되어야 이를 수행할 수가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본문은 시제를 달리하여 이 둘을 구분하고 있다. 따르라는 것은 ‘현재 명령형’(Follow me!)이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미래형’(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an)이다. 그것도 주님이 반드시 그렇게 하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는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동시에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구원뿐만 아니라 사명에로의 부름을 받았고, 또한 모두가 잠재적 사명자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우선순위를 따지면 ‘따르는 것’(구원)이 ‘어부가 되는 것’(사명)보다 먼저지만 요즈음 청문회 정국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병역문제를 보면서 어부가 되는 것이 따르는 것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부르심에 대한 반응

그리고 본문은 이와 같은 주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에 대한 처음 제자들의 반응을 매우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모든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태도이다.

 

“그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0).

“그들이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2).

 

 

1. 즉각성   

 

      “.......곧........”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곧” 응답하였다. 주저하거나 머뭇거리거나, 또는 며칠 동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지 않고 ‘즉시’ 주님을 따랐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이와 같은 ‘즉각성’이 제자됨의 중요한 조건이다. 누가복음 9장에 제자됨의 조건과 관련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①주님이 원하는 사람이라야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57~58)과, ②주님의 부르심에 무조건 즉시 순종하는 것이다(59~61). 그러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 주님의 일꾼은 내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원해야 되며, 그리고 주님이 부르실 때 세상에 대한 미련, 주저함을 버리고 ‘아멘’하고 즉시 순종해야 된다. 주님은 부름 받은 자들에게 조건 없는 따름, 절대적인 추종을 요구하신다. 이런 ‘수동적 적극성’이 주님을 따르는 자의 태도이고, 또한 주님을 섬기는 자세이다.

 

본문에 나온 네 명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9장에 나온 마태, 삭개오(눅19:), 빌립과 나다나엘(요1:), 그리고 사도 바울(행9:) 등이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했던 사람들이다. 구약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였을 때 즉시 순종하였고, 선지자 엘리사는 열 두 겨리의 소로 밭을 갈고 있다가 부름을 받았는데 소 두 마리를 잡아서 백성들을 먹인 후 일어나 엘리야를 따랐다. 여기서 ‘즉시’는 순종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순종은 따르는 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인데, 그것은 즉시 해야만 한다. 지체하거나 미루면 순종할 수가 없다. 순종은 즉시 해야 하고, 순종하면 불가능한 상황도 열리게 되고, 문제도 해결이 된다. 믿음의 역사는 순종의 현장에서 나타난다.

 

2. 철저성    

 

      “......버려두고.......”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처음 제자들의 또 하나의 태도는 ‘버림’이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고(20), 요한과 야고보는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22). 여기서 배와 그물은 어부인 이들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구들로 소유의 상징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든 관계를 상징한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와 인간적인 모든 관계까지 포기했다는 뜻이다. 이는 이들의 순종이 얼마나 ‘철저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준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고, 첫째이며, 다른 어떤 것도 이보다 앞설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많은 지식이나 경험이 필요치 않다. 세상적인 명예나 지위가 없어도 좋다. 학위나 자격증이 없어도 괜찮다. 다만 주님을 삶의 1번으로 여기는 마음과 태도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게 내려놓고, 포기할 수가 있다.

 

여기 이 ‘철저성’은 희생(헌신)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희생과 헌신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치러야 할 마땅한 대가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을 거스르는 인간적인 본성, 육신적인 욕구를 부정하는 것을 뜻한다. 사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다른 사람이나 주위 환경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안일함과 편안함, 세상적인 욕구와 열망을 따르고자 하는 부패한 본성이 문제다. 이것을 철저하게 거부해야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인 본성, 육신적인 욕구를 부정하기 위해선 많은 희생과 헌신이 요구된다. 이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삶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 이는 신자의 별명이자 사명이다. 생명을 구하고 살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것이 신자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먼저 죄악된 세상에서 구원하시고,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을 주신 것이다. 오는 10월 31일 종교개혁주일에 우리 교회에서 첫 집사/권사 선거를 하게 하심도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함이다. 특히 (물론 우리 모두가 북을 치는 사람들이지만)우리 교회에게 있어서 이 번 선거는 교회를 위해 앞장서서 북을 치는 사람들을 세우는 소중한 일이다. 그 사람들이 누구일지는 주님밖에 모르는 일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즉각적인 순종과 철저한 헌신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런 각오로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란다. 개척의 북을 울리며 황량한 땅, 광야를 물이 솟아나고, 꽃이 피는 낙원으로 바꾼 한 사람의 이야기로 오늘 저의 설교를 마치고자 한다.

 

‘무사 알라미라’라는 사람 이야기다. 그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그 땅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사람이다. 그는 풀 한포기 나지 않는 황량한 광야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실직자들과 노동자들을 모아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한 달, 두 달, 계속해서 물이 나올 만한 곳을 찾아다녔지만 물줄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험 많은 노인들과 관리들, 전문가들 모두가 그의 생각에 반대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지질학자들도 이 땅에서는 물을 얻을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모래땅 어딘가에 반드시 물이 있다고 확신했고, 그 물줄기를 찾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 메마른 광야에 샘물을 흐르게 하고 장미꽃을 피워보겠다는 꿈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6개월 만에 생명수와 같은 물줄기를 찾아냈다. 그는 두 손에 물을 떠서 높이 들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죽어도 좋습니다.’라고 외쳤다. 그 후 그는 물줄기를 15군데나 찾았다. 그는 광야에 목장을 만들고 밭을 일구어 과일과 채소도 생산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꾼 ‘키부츠’(qibbutz)라는 농장운동이 생기게 되었다.

 

무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한 일에 도전을 하였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냈다. 주님은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선 이곳에 생명과 구원의 샘이 솟고,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풍성하기를 기대하신다. 이와 같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하고 '철저히'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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