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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 받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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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142회 작성일 10-10-24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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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 받는 인생

마21:1~11

2010. 10/24 08:00, 11:00

김 병장 시리즈

어느 부대에서 최고참 김 병장이 말했다.

‘누구 피아노 잘 치는 사람 없냐?’

‘예, 접니다.’

‘어느 대학 나왔냐?’

‘y 대학 나왔습니다.’

‘s 대학은 없냐?’

‘예, 접니다.’

‘그럼, 이 피아노 저기로 옮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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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음날 김 병장이 말했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 없냐?’

‘예, 접니다.’

‘어느 대학 나왔냐?’

‘k 대학 나왔습니다.’

‘h 대학은 없냐?’

‘예, 접니다.’

‘그럼, 족구(足球)하도록 선을 그려라.’

 

또 김 병장이 말했다.

‘누구 검도 잘하는 사람은 없냐?’

‘예, 접니다.’

‘몇 단이냐?’

‘2단입니다.’

‘더 잘하는 사람은 없냐?’

‘예, 저는 5단입니다.’

‘그럼, 주방 가서 파를 썰어라.’

 

아름다움이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리더는 따르는 사람들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아무리 좋은 재능을 가진 인재도 적절하게 쓰임을 받지 못하면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무엇이든 자기 자리가 있다.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고, 빛나고, 돋보인다. 우리는 연못 속에서 헤엄치고 다니는 물고기를 보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고기가 거실 소파이나 침대에 누워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더럽다고 말할 것이다. 아름답던 물고기가 더럽고 혐오스러워진 것은 그 물고기의 본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논밭에서는 꼭 필요한 흙이나 거름이 교회바닥에 있으면 닦아내야 할 더러운 것이 되고, 담장 위에서는 그렇게 매력적이던 돌덩이가 길바닥에 놓이게 되면 장애물이 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사람에게도 저마다 주어진 자리가 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혹은 아내나 어머니로서, 자녀로서, 신자로서, 학생으로서 있어야 할 자리, 지켜야 할 자리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임의로 버리고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제자리를 지키며 그 곳에서 충성스럽게 맡겨진 역할을 해낼 때다. 그렇다면 신자로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 특히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거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묵묵히 순종하며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다.

 

아름다운 인생을 위하여

본문은 고난주간의 첫 날 있었던 사건이다(종려주일). 주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을 들어가셨다. 이는 정복자들의 개선(凱旋) 모습에 비하면 형편없이 초라한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무척 우스꽝스러운 사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지금까지 평화를 위해 일하신 주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 영광스러운 인생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주님의 쓰심에 기꺼이 헌신하라!

본문에 따르면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관련하여 삼중(三重)의 헌신이 있었다. 첫째는 제자들이다(1,2,6). 주님은 제자 둘에게 벳바게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남의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다. 값을 지불하고 사오라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끌고 오라는 것이다. 만약 주인이 시비를 걸면 ‘주가 쓰시겠다.’는 말만 하라는 것이었다. 제자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였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그저 순종하였고, 그랬더니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다. 순종은 주님을 삶의 1번에 두고, 주님의 말씀을 최상에 둘 때만 가능한 일이다.

 

둘째는 나귀 주인이다(3, 막11:5,6).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 집 앞에 묶어놓은 나귀를 풀어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가 나서서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자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나귀 주인은 두 말하지 않고 나귀를 내주었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내 부모,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이 쓰겠다고 하면 기꺼이 내놓지만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갈등하고 고민한다. 온갖 핑계를 생각해낸다.

 

특히 나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귀하고 유용한 동물이었다. 율법에 의하면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첫 것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했다. 그런데 유독 나귀의 첫 새끼는 양으로 대신하여 드리라(출34:20)고 했다. 그것은 나귀가 여러 모로 유용했기 때문이다. 나귀는 사람을 태우고, 짐도 나르고, 농사일을 거들기도 해서 쓰임이 많았다. 그래서 나귀를 제물로 죽이지 않고 양으로 대신하여 생활에 활용하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이것이 나귀가 평생 주인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해야 할 이유다. 죽을 목숨이었는데 양 때문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구속사의 소중한 진리가 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주님의 희생으로 살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순수하고 깨끗한 어린 나귀였다. 이것이 헌신이나 헌상의 중요한 원칙이다. 주님께 바치는 것은 이래야 한다. 아무도 타보지 않고 사용하지 않은 순수하고, 귀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첫 새끼, 첫 수확, 첫 소득, 첫 열매를 구별하라고 했다. 여기서 ‘첫 것’이란 첫 번째 것(the first)이란 의미와 함께 ‘가장 귀하고 좋은 것’(the best)이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의 예배나 찬양이 최상이 되어야 하고, 주일이 최고가 되어야 하고, 가장 귀한 것으로 드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께 일상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비되고 특별한 것을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새끼 나귀다(7). 아직 사람을 태워보지 않는 어린 나귀였다(눅19:30). 말(馬)이 전쟁의 상징이라면 나귀는 평화의 상징이다. 주로 일의 도구로 사용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귀는 고집이 센 동물로도 유명하다. 한번 수가 틀어지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아무리 채찍을 들어서 때리고 달래도 한발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고집이 센 사람을 ‘나귀와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나귀(ass)라는 영어 단어를 보면, ‘고집쟁이, 바보’의 뜻도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나귀가, 그것도 사람을 한 번도 태워보지 않은 어린 나귀가 순순히 주님을 자신의 등에 태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환호하는 군중 사이를 묵묵히 걸어갔다. 놀라운 순종이다. 이런 삼중(三重)의 헌신이 종려주일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만들었다. 그래서 모두가 주님께 쓰임 받는 존재가 된 것이다. 지난주에도 말씀 드렸듯이 헌신은 주님께 쓰임 받는 중요한 비결이다.

 

쓰임 받는 것이 영광을 받는 길이다!

그릇의 가치는 그릇 자체보다는 그 그릇에 담긴 물건이 좌우한다. 같은 그릇도 밥을 담으면 밥그릇, 국을 담으면 그릇이 된다. 거기에 보석을 담아두면 보석함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손에 들려지느냐에 따라 쓰임이 달라진다. 같은 칼이지만 의사의 손에 있으면 사람을 회복시키고 살리는 도구가 되고, 요리사의 손에 있으면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도구가 되지만 강도의 손에 있으면 사람을 상(傷)하고 해(害)치는 무서운 흉기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사람이든 그릇이든 누구의 손에 들려지느냐,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와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다. 명장의 손에 들려지면 명품이 되고, 더불어 영광도 받게 되는 것이다.

 

본문의 나귀를 보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것이 나귀의 일생이다.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그런 비참한 짐승이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까지 갔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텐트를 싣고 간 것도 아니고, 소금 부대를 싣고 간 것이 아니라 주님을 태우고 갔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이 나귀는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경험했다. 비록 고급 양탄자는 아닐지라도 사람들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가 놓인 길을 걸었다.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주님을 태운 나귀’로 기록이 되어 모든 세대의 신자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나귀의 역사에서 이런 호사를 누린 것은 이 나귀가 유일하다. 이 어린 나귀가 이런 영광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에게 무슨 특별함이 있어서인가? 그것은 영광의 주님을 태웠기 때문이다. 주님께 쓰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영광의 주님을 태우고, 영광의 주님께 쓰임을 받으면 영광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물론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일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주님도 그 길을 좁은 길이라,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이런 모두를 감수하며 주님께 자신을 내어드릴 때 빛나는 인생,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인물들과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증거하고 있다.

 

나를 드립니다.

어느 집에 돌잔치가 있었다. 그 날 주인공인 아기를 위해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손님들은 아기를 위해 갖가지 선물을 했다. 옷, 반지, 장난감 등.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쁜 부채를 선물했다. 아기는 그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놀고 있었다. 손님 중에 유명한 화가가 있었다. 이 화가도 아이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아이가 들고 있는 그 부채에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사인을 해 주려고 했다. 부채에 그림이 그려지고 화가의 사인이 새겨지면 그 부채는 일개 장난감에서 고가의 예술품이 될 것이다. 그래서 화가는 아이의 손에서 그 부채를 잠시 빼앗으려고 했으나 아이가 부채를 놓아주지 안했다. 결국 화가는 아이의 부채에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우리도 이런 어리석음에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나의 재능을 비롯하여, 건강, 물질, 삶을 주님께서 사용하시도록 기꺼이 내어 드리자. 주님께 드리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더 의미있고, 값진 것으로 변하는 것이다. 거기에 주님이 친히 그림을 그리시고 이름을 새겨주시기 때문이다. 내 손에 있으면 그것은 장난감에 지나지 않지만 주님 손에 들려지면 아무리 하찮은 것도 명품이 된다.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부서지고, 깨진 못난 인생이지만 주님께 쓰임 받으면 빛나는 인생, 영광스러운 인생이 된다. 우리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드려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는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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