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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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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262회 작성일 10-11-0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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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은혜

삼하9:1~8

2010. 11/7 08:00, 11:00

아버지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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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아마 여러분 중에도 이 사진들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미국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책상 밑에 들어가서 신나게 놀고 있는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아들 사진과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오바마(Barack H. Obama) 대통령 딸 사진이다. 이 두 사진이 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아이들이 실린 사진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유명해진 걸까? 이 아이들이 유명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들의 아버지가 유명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아이들이 어떻게 해서 대통령 집무실까지 들어가 마치 자기 안방에서 놀듯이 놀 수 있었던 걸까? 모든 게 이들의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 때문에 아이들의 사진이 유명해졌고, 아버지 때문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대통령 집무실까지 들어가 놀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 역시 주님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고, 우리 가정이 있고, 우리 교회가 있다. 주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 주님 때문에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게 되었고, 주님을 섬기게 되었고, 주님 때문에 천사도 흠모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았다. 이렇게 우리의 삶 모두를 주님의 때문이고, 주님의 은혜 때문이라 고백하는 것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앙이다.

 

몰락한 왕가의 손자

본문의 므비보셋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몰락한 사울 왕가의 손자다. 요즘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이란 미명하에 사정의 칼바람이 권력을 상실한 세력들에게 향하는 것을 본다. 왕조시대는 더 처절하고 비참했다. 새 왕조를 연 사람들이 이전 왕조를 진멸하여 모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도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서자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성을 바꿔서 목숨을 유지했다고 한다(全씨나 玉씨, 金씨 등). 몰락한 왕가의 자손으로 태어난 므비보셋도 모든 소유를 잃고,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란 사람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였다. 여기 ‘로드발’은 요단강 건너 길르앗 지방에 있는 지명인데, ‘목초가 없는 황무지’란 뜻으로 당시 이스라엘에서 몸을 숨길 일이 있는 사람들이 자주 가는 곳이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다윗과 정적이 된 그가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살았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가 5살 때,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도망하다가 유모가 그를 떨어뜨려 다리까지 절게 되었다(삼하4:4, 9:3). 그는 몰락한 왕가의 비참함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다윗 왕 앞에서 자신을 “죽은 개”(8)에 비유를 했는데, 이는 당시 그의 처지에 대한 적절한 묘사다.

 

그런데 이런 그가 다윗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 그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 ‘요나단 때문’이다(1). 사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생명의 은인이고, 다윗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푼 사람이다(삼상18:1, 19:~20:). 다윗은 요나단에게 받은 은혜를 그의 아들에게 갚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 사울 왕으로 인한 저주가 아버지 요나단으로 인하여 축복으로 바뀌었다(롬5:12~21 참조). 본문은 므비보셋의 깨어진 삶이 다윗의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회복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은혜는 므비보셋의 삶을 세 가지 측면에서 회복시켰다.

 

1. 자아회복.

다윗 앞에서 므비보셋이 자신을 ‘죽은 개’에 비유한 것은 왕이 베푼 은혜를 감당할 수 없는 자라며 자신을 낮춘 겸양의 태도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의 ‘낮은 자존감’의 표현이다. 개는 부정한 짐승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것도 죽은 것이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참으로 하찮은 사람, 형편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누구라도 힘든 환경과 형편에 처하게 되고, 사람들과 만족스럽지 못한 관계를 갖게 되면 이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잃고 낮은 자존감에 떨어지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왕상18:36~40), 하늘의 문을 닫고 열(약5:17~18)만큼 탁월한 영성을 지녔던 선지자 엘리야의 삶이 이를 잘 보여준다(왕상19:1~4 참조, 내용설명 생략).

 

그런데 다윗 왕이 그를 찾아 자기 앞에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 첫 번째가 그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다윗은 먼저 “므비보셋이여”(6) 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사실 그 동안 므비보셋은 이름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자신의 신분과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은 그의 신분과 존재를 회복시켜 준 것이다. 왕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으니 이제는 어디서든지 자신의 존재를 떳떳이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윗은 그를 자기 가족처럼, 자녀 중 한 사람처럼 대우했다(11). 죽은 개와 같은 그가 졸지에 새로운 왕가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의 존재가 완전히 새로워지고, 낮은 자존감이 극복되는 순간이었다. 므비보셋은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 역시 존재감을 잃어버린 죽은 개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더럽고 추하고 악한 자들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셨고, 주님의 은혜로 정결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고, 주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 이와 같이 은혜는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켜 자아를 회복시켜 주었다. 참된 자아회복은 존재의 변화에 있다. 그리고 존재의 변화는 주님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누구든지 주님의 은혜를 입으면 존재가 변한다. 이는 신앙 안에서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다.

 

2. 기업회복.

앞에서 말했듯이 왕조시대엔 패배한 왕조는 몰살(沒殺)을 당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물론 그에게 속한 모든 소유도 몰수(沒收)당했다. 므비보셋이 자신을 ‘죽은 개’에 비유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그의 삶은 생명을 보장받지 못한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이었다(8, 19:28). 그러니 잃어버린 소유(기업)를 다시 회복하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윗이 그의 생명을 보장해 준 것은 물론, 그의 존재를 변화시켜 주었고, 그의 기업(소유)도 회복시켜 주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7).

 

사실 다윗 앞에 엎드린 므비보셋은 무서워 떨고 있었다. 자신의 왕권을 돈독하게 하는 목적으로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를 자기 앞에 부른 것이 그를 해(害)치기 위함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기 위함이라고 위로했다. 그것은 빼앗긴 기업을 다시 회복시켜 주겠다는 약속이다. 신분과 기업은 밀접한 관계다. 신분을 잃으면 기업도 잃게 되고, 신분을 회복하면 기업도 회복된다. 므비보셋은 은혜를 받아 신분도 회복되고 기업도 회복되었다. 주님의 은혜는 잃어버린 신분을 회복시켜 주고, 잃어버린 기업도 회복시켜 주신다. 아담의 범죄로 낙원에서 추방당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기업을 소망하게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 때문이다.

 

3. 풍성한 교제를 누림.

다윗은 므비보셋의 신분과 존재를 회복시켜 주고, 그에게 속한 모든 기업을 회복시켜 주는 은혜 외에도 한 가지 더 은혜를 그에게 베풀었다.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7下).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11).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13).

 

그동안 므비보셋이 산 것은 산 것이 아니었다. 모든 소유 다 빼앗기고 신분을 숨기고 황무지 로드발에서 숨어사는 것은 말 그대로 죽지 못해서 산 것이었다. 그런 그를 왕이 찾아서 신분을 회복시켜 주고, 기업을 회복시켜 준 것도 감사한데, 예루살렘에 살면서 항상 왕의 상에서 음식을 먹도록 한 것이다. 전에는 왕과 왕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살아야 했던 그가 이제는 왕과 함께 거하면서 왕의 식탁을 누리게 된 것이다. 실로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이는 왕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누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교제가 가장 중요한 복이다. 왕과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 신분도, 기업도 문제가 되지를 않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간격을 좁혀서 풍성한 교제의 자리로 이끄는 것이 은혜의 특징이다. 은혜는 므비보셋을 요단강 건너 로드발에서 왕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왕궁으로, 왕의 식탁에까지 이끄는 장소의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 역시 하나님과 너무 멀리 떨어진 존재,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엡2:12). 그런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가까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외인도 나그네도 아닌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엡2:19). 주님의 식탁에서 떡을 나누는 거룩한 교제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자아회복, 기업회복은 물론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의 삶

성격이 괴팍한 사람이 있었다. 배운 것과 가진 것이 좀 있다고,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집에서 시집 온 아내를 평생 무시하며 구박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큰 실패를 하여 다 죽게 된 형편에서 형편이 조금 회복되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변했다. 그는 그 후에 누구든지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하고 인사하면, ‘예. 아내 덕에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답을 했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누가 ‘왜 그런 인사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제 고집이나 성깔이 대단하잖습니까? 내 성질대로 되었으면 나는 벌써 쪽박 찼을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다 아내 덕이지요.’

 

자신을 보면 도저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 같지 않은데 아내를 보고 자신에게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철이 든 것이다. 사람이 철이 들면 은혜를 알게 된다. 철이 없어서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던 자식도 철이 들면 부모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철 든 신자는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전15:10)고 고백했다. 이런 은혜의식이야말로 철 든 신앙인의 고백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신분과 존재를 회복하였고, 천국의 기업도 얻었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 속에 살고 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도 다윗처럼 감당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그 은혜를 풍성히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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