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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받은 사람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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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9,670회 작성일 10-11-1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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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받은 사람의 특징

행2:43~47

2010. 11/14 08:00, 11:00

마지막 최고의 단어

지난 한 주간, 가장 화제가 되었던 단어는 ‘G20’(세계정상회담)이라 생각한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이 시대 마지막 최고의 단어’를 말해보라고 하면 어떤 단어를 꼽겠는가?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란 책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은혜를 ‘이 시대 마지막 최고의 단어’라고 했다. 그가 이것을 마지막 최고의 단어라고 부르는 것은 물 한 방울 속에 해의 모습이 숨어 있듯 복음의 진수가 은혜 속에 들어 있고, 안식처 없이 표류하는 세상이 믿음의 닻을 내리기에 은혜만큼 좋은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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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오닐(Eugene G. O´Neil)은 ‘인간은 부러진 채 태어나 고침을 받으며 살아간다. 주님의 은혜가 접착제다.’고 했다. 인간은 상처와 흠집투성이다. 그런데 그곳은 주님의 은혜가 흘러드는 틈이다. 그래서 상처를 치료하고 흠집을 제거하여 회복시켜 주는 것이 주님의 은혜다. 그리고 클라이브 루이스(C. S. Lewis)는 ‘거울인 우리에게 밝은 구석이 있다면 그 밝음은 오직 우리를 비추는 햇빛에서 온 것이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 거울은 무용지물이다. 거울은 빛이 있어야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거울에게 있어서 빛과 같은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존재가 주님의 은혜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또한 은혜에 대한 태도로 그는 ‘.......어린아이처럼 순전히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이요, 기쁨으로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다. 즐거운 거지가 되는 것이다.’고 했다. 신자는 믿음 안에서 이 시대 마지막 최고의 단어를 경험하고 간직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믿음을 복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충만한 은혜 가운데 머물기 위하여, ①순전히 즐겁게 받아들이고, ②기쁨으로 완전히 의존하며, ③즐거운 거지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즐거운 거지’라는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든다. 주님과 주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 이보다 멋진 표현이 없을 것 같다. 풍성한 영적 생활을 위해선 모든 면에서 ‘즐거운 거지’가 되어야 한다.

 

모이기를 힘쓴다.

지난 주일에 죽임을 당해 마땅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 므비보셋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므비보셋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의 특징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은 초대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의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모든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이 닮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이들의 아름다운 신앙적인 삶의 배경은 주님의 은혜다. 주님의 은혜로 이런 멋진 삶을 살 수 있었다. 당시 신자들 대부분이 가나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종일 일해서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46). 이것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다.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환경을 넘어 ①날마다 ②마음을 같이 하여 ③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게’ 된다. 그리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모였다. 본문은 최소한 네 가지 이유로 이들이 힘써 모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함이다(42).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가르치는 기관이고, 신자는 그 진리를 배워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배워야 하고, 모든 기회를 배움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 ‘힘써’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여기서 사도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정통성과 통일성을 확립하고, 유지하며, 전승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때문에 당시 예수님이 이단이고 가짜라고 하는 상황에서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교회의 사명을 신자를 온전케 함에 있다고 하였다(엡4:12~16). 이를 위해선 교회는 가르치는 사명에 충실해야 하고, 신자는 진리를 배움에 힘써야 한다. ‘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처럼 어리석고 비참한 사람은 없다. 모든 신자는 진리를 배우는 영원한 학생이다. 이렇게 부지런히 배움을 지향하는 자세가 곧 은혜를 받은 사람의 특징이다.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 주님에 대하여 더 알고 싶은 열망과 갈급함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둘째는, 서로 교제하기 위함이다(42). 교회란 그 옛날 제자들이 경험한 ‘주님과의 아름다운 사귐’이 성령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속되는 ‘믿음의 공동체’다. 그래서 교회(敎會)를 ‘교회’(交會)라고도 한다. 즉 사귐의 공동체, 교제의 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리고 전도란 신자들이 ‘사귐을 통해서 변화된 자기들의 인격과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서로 사귐은 성전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 결과 충만한 기쁨을 경험하였다(46). 주님의 은혜를 입으면 지체들이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나누고 싶어진다. 그래서 신자들의 이런 특별한 사귐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행11:26).

 

셋째는, 기도하기 위함이다(42). 이것이 신앙 공동체인 교회가 다른 공동체와 가장 차별이 되는 점이다. 교육이나 교제는 다른 공동체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기도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신자들의 모든 모임은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를 끝을 맺는다. 더 나아가 기도하기 위해서 모인다. 그래서 신앙공동체를 ‘기도공동체’라고도 부른 것이다. 특히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하여, 혹은 받은 그 은혜를 유지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은혜라고 하는 것이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선물이기에 그것을 받은 사람으로 더욱 기도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여서 기도에 전혀 힘썼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기도가 은혜의 통로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행1:12~14, 2:1~4).

 

넷째는, 예배하기 위함이다(47). 47절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며”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뜻이다. 신자가 성전에 모인 궁극적인 목적은 예배하는 일이다. 위에서 말한 교육과 교제, 그리고 기도 역시 예배의 일부분이다. 예배생활은 은혜생활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 은혜로 충만하면 우선 예배가 즐겁고 기쁘다. 예배가 기다려지고 기대가 되고 사모함이 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먹는 문제 해결을 위한 일상도 버거운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이것이 억지로 될 일인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은혜를 입은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전에 ‘모여서’ 말씀을 배우고, ‘모여서’ 교제를 나누고, ‘모여서’ 기도하고, ‘모여서’ 예배하는 생활에 힘썼다. 이런 저들의 모습이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주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어 주님께서 그 교회 위에 구원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베푸셨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 이 말씀은 교회부흥뿐만 아니라 개인과 가정, 산업, 사회에도 적용된다. 아무튼 이 네 가지는 내가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인 동시에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모여서 배우고, 모여서 교제하고, 모여서 기도하고, 모여서 예배하는 생활에 힘쓰자!

 

나눔을 실천한다.

모임과 더불어 은혜를 받은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나눔’이다. 공동생활, 공동사용, 각 사람의 필요에 따른 나눔은 모든 교회들이 닮고 싶어 하는 초대교회의 가장 놀라운 특징들이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44,45).

 

이들이 이런 멋진 삶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혜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로 다음 두 가지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첫째, 주님의 은혜로 재물에 대한 욕심을 극복했다. 사람에게는 많은 욕심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이 ‘물욕’(物慾)이다. 성경은 이것을 신앙생활의 커다란 장애로 말씀하고 있다(딤전6:9~10). 복음서를 보면, 주님의 교훈 중 거의 ⅔가 물질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그만큼 물질이 우리의 삶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과, 물질에 대한 욕심을 극복하기가 어렵고, 나아가서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중요한 관건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초대교회 신자들은 ①함께 생활하면서 ②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③자신의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다. 이것은 그들이 물질에 대한 욕심을 극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을까? 채근담에 ‘마음을 채워두지 않으면 안되며, 마음이 채워지면 물욕이 들어올 수 없다.’(心不可不實, 實則物慾不入)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있을까? 사실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다(눅18:27). 주님의 은혜만이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있고, 주님의 은혜로 채워진 마음은 물욕을 극복할 수가 있다.

 

둘째, 주님의 은혜로 서로의 필요에 민감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헤아리는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 요즈음 「더 룰」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유태인의 부와 생존의 불문율에 대한 내용인데, 이 책에서 저자는 ‘마음 우선 사상’을 그 중 하나로 말한다. 성공의 중요한 비결이 생대방의 생각에 민감하고, 그 마음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 우선 사상의 중심에 ‘자선’(베풂: 慈善)이 있다. 저자는 이것을 유태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사상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에 민감한 태도를 지니게 한 하나의 바탕이 되었다’고 말한다. 나눔은 상대방에 대한 깊은 ‘헤아림’(민감한 태도)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관심과 사랑이 생기고, 필요를 알게 되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은혜란 자기 밖에 보지 못하는 거울을 그 뒷면에 붙은 은색 물질을 제거하여 상대방을 볼 수 있는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자신보다는 상대방에게 초점을 맞추게 하는 것이 은혜의 특징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필요에 민감하여 나눔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비움’과 더불어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헤아림’(민감한 태도)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부족한 중에도 탁월하게 나눔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혜로 서로의 필요에 민감했기 때문이다. 나도 힘들지만 주변에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나눌 것이 있다. 문제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 그와 무언가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다. 문제는 그 마음이 없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는 그 마음을 회복시켜 없는 중에도 나누게 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없는 중에도 풍성하게 나눌 수가 있었고, 나눔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주님의 은혜로 물욕을 비우고, 상대방에게 민감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한 점 푸르른 땅

1980년 5월 18일(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나던 날)에 미국 워싱턴(Washington)주에 있는 세인트헬렌스 산(Mount St. Helens)의 화산이 폭발했다. 뜨거운 열기에 토양은 녹아버리고 화산재를 외투처럼 뒤집어 쓴 바위만 남았다. 산림청 학자들은 오랜 세월동안 그곳에 생명체가 자라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공원 직원이 폐허 속에서 야생화, 양치류, 잔디 등이 뿌리를 튼튼히 박고 무성하게 자란 모습을 발견했다. 등골이 오싹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잠시 후였다. 풀이 자란 땅은 고라니 모양을 하고 있었다. 고라니가 재에 묻힌 자리에 유기물이 생겼고, 식물은 거기서 싹을 틔운 것이다. 그 때부터 삼림 학자들은 죽은 야생동물의 수를 헤아리는 수단으로 풀이 무성한 곳을 찾아다녔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 신자의 사명과 관련이 있다. 화산재로 뒤덮인 폐허와 같은 우리의 삶에 주님은 은혜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켰다. 이제는 우리가 화산재로 뒤덮인 폐허가 된 세상에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신자와 교회의 시대적 사명이 있다. 최소한 우리가 선 곳을 ‘한 점 푸르른 땅’이 되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것은 받은바 은혜를 주변에 베푸는 삶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먼저 주님 앞에서 힘써 모이는 것이요, 다음으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다음주일은 추수감사주일이다. 드려진 헌금은 주변 어려운 교회들과 나누려고 한다. 받은 만큼, 깨달은 만큼 동참해 주기 바란다. 이것이 지금 당신이 선 그곳, 이 삭막한 세상을 ‘한 점 푸르른 땅’이 되도록 하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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