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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Ⅰ, “깨어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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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466회 작성일 10-11-2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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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Ⅰ, “깨어있는 삶”

마25:1~13

2010. 11/28 08:00, 11:00

고수와 하수의 웃긴 차이

무슨 일이든, 그리고 어느 분야든 고수와 하수가 있다. 인터넷에 보니, ‘골프에 있어서 고수와 하수의 웃긴 차이’라는 글이 있어 잠시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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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고수는 자신의 티샷(Tee Shot) 차례가 오기 전에 이미 장갑을 끼고 있다. 물론 티와 볼도 함께 주머니에 넣고 대기하고 있다. 하수는 자신의 차례가 돼서야 장갑을 찾고 허둥지둥 낀다. 그런 뒤 다른 동반자에게 티를 달라고 한다.

 

둘째, 고수는 골프 약속이 잡히면 며칠 전부터 몸 관리에 들어간다. 하수는 전날 먹은 술이 깨지 않는다며 술 냄새를 풍기며 입으로 골프를 한다.

 

셋째, 고수는 티오픈(Tee off) 전에 적당히 몸을 푼다. 대개 티오프 1시간 전에 골프장에 도착해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다. 하수는 티오프 시간에 딱 맞춰 골프장에 오거나 늦는다. 사전 준비 없이 티잉 그라운드(Teeing ground)에서 윙윙 거리며 연습 스윙을 오래 한다.

 

이 외에도 몇 개가 더 있는데 그것들은 여기서 생략하겠다. 사소한 것이지만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한마디로 ‘준비’에 있다는 것이다. 골프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도 얼마나 준비를 잘하느냐에 달려있다. 결국 기회란 준비된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주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그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생활에서도 준비가 중요하다. 준비된 만큼 주님께 쓰임을 받고, 준비된 만큼 복을 받고, 준비된 만큼 은혜도 받는다. 그래서 성경에 준비와 관련된 말씀과 사건이 많이 나온다. 특히 오늘 본문이 가장 대표적인 내용이다.

 

기다림의 절기, 대강절

오늘 주일부터 성탄절 전 주일까지 4주를 우리 교회력에서는 대림절(待臨節), 혹은 대강절(待降節)이라고 한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이다. 이는 가장 큰 소망의 절기다. 신자들에게 주님 재림만큼 중요하고 결정적인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력에서는 이 대강절이 가장 먼저 나온 절기인데, 일반 달력에서는 가장 마지막 절기로 표기되어 있다. 우연한 일이겠지만 이는 우리 기독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정서는 무엇이 되었든 ‘끝’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끝에는 항상 후회와 아쉬움을 갖는다. 한해를 보내는 행사를 ‘망년회’(忘年會)라고 부르고, 개인의 끝인 죽음을 사망(死亡)이라 부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한해의 끝을 주님 재림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맺고 있다. 끝을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으로 보지 않고 주님 재림이라는 최대의 소망을 가지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기독교를 소망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절망과 좌절의 끝에서도 항상 기대와 소망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은 세 가지 비유로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비유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자세와 관련된 교훈이다. 금번 대강절에 이 세 비유를 통하여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문의 열 처녀 비유는 ‘항상 깨어있는 삶’(13)에 대한 교훈이다. 여기 ‘깨어있는 삶’은 잠들지 않은 삶(5)이 아니라, ‘준비하는 삶’(4)이다. 본문은 왜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가? 깨어있는 삶이 왜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 주님은 예기치 않은 때에 오시기 때문이다(5,6,13).

우리 인생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다. 저도 여러분에게 분명히 예언(?)할 수 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가장 불확실한 것은 그 죽음이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밖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주님의 재림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주의 재림이 ‘도둑 같이’(마24:43, 살전5:2, 벧후3:1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마24:50, 눅12:46), ‘전혀 예기치 못한 때’(마24:39)에 있게 되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누구도 그날과 그 때를 알 수가 없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주님의 재림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누구도 그 시기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사건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우리의 죽음이나 주의 재림을 아무도 모르게, 그렇지만 갑작스럽게 닥치게 한 것일까? 그것은 항상 깨어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본문 역시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졸며 잠이든 ‘밤중에’ 신랑이 왔다(5,6)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시간에 오셨다는 뜻이다. 여기에 이 비유의 목적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주님이 곧 오신다는 임박한 재림신앙에 들떠 있었다. 이런 그들에게 ①주님의 재림이 그렇게 이르지 않다는 것(“신랑이 더디 오므로.......밤중에 소리가 나되......”)과, ②그리고 재림이 지연되더라도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있어야 한다(13)는 것이다. 13절의 “깨어 있으라.”는 ‘그레고레오’(gregoreo)라는 동사는 현재 명령형이다. ‘늘 깨어 있으면서 계속해서 지켜보라’는 뜻이다. 언제 주님이 오시든 맞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준비가 곧 지혜다(4). 지혜로운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면 항상 준비하는 삶이어야 한다.

 

2. 준비된 사람만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10).

예나 지금이나 믿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그 날을 기다리기 마련이다. 특히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그들은 인사도 ‘마라나타’(maranatha!)였다. 이는 선포적인 의미로 사용할 땐 ‘주님 곧 오십니다!’는 뜻이고, 기원적인 의미로 사용할 땐 ‘주님 어서 오십시오!’라는 뜻이다. 처음엔 주로 선포적인 의미인 ‘주님 곧 오십니다!’란 뜻으로 사용하였다(그런데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자 기원적인 의미로 사용하게 됨).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주님께서 곧 오시니 ‘깨어 있자’는 것이다. 깨어서 준비한 사람에겐 그 날이 도둑같이 임하지 않는다. “형제들아 너희들은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5:4)라고 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깨어서 준비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다. 갑작스러움이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항상 준비하고 있는 사람에겐 갑작스러운 일이란 없다. 그저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여기 ‘어둠에 있지 않은 사람에겐 그 날이 갑작스럽게 임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주님께 특별한 사람들에게 그 날을 가르쳐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어둠에 있지 않는다는 것은 잠들지 않았다는 뜻이고, 이는 깨어서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깨어서 준비한 사람에게 주님의 임하심이 갑작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본문에 열 명의 처녀(신부 들러리)가 나온다. 그들은 모두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함께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랑이 더디 오자 졸며 자는 것도 같고, 등불도 똑같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다섯 명의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여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함께 수고하였지만 다른 다섯은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왜 이런 결과가 일어났을까? 성경은 그 이유를 ‘준비’에 있었다고 말씀한다. 다른 그릇에 기름을 준비한 것(4)과 준비하지 못한 것의 차이다(3). 그런데 이 사소함의 차이가 결정적인 차이가 되고 말았다. 결국 이 차이로 인하여 다섯은 혼인잔치에 참여하였고(10), 다섯은 참여할 수가 없게 되었다(11). 기회는 준비된 사람의 몫이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겐 후회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항상 깨어서 준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걱정이 없다. 깨어서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닫힌 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11,12).

1941년 12월 7일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날이다. 당시 하와이 주재 일본 총영사가 동경에 보고한 정기보고서가 있다. 그 보고서에는 진주만에 거하는 미 해군전함의 동태가 자세히 적혀있었다. 이러한 비밀내용을 탐지한 연방수사국(FBI)은 정부당국에 긴급히 보고서를 올렸다.

 

‘진주만 근처를 배회하는 일본 어선들은 간첩(spy)선이므로 경계요함.’

 

그러나 정부당국은 이 긴급보고서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냥 흘려버렸다. 또한 당시 동양에 선교사로 갔다가 돌아온 월터 저드(W. Judd) 박사도 일본이 전쟁준비에 광분해 있다고 경고하였다. 정부는 한낱 선교사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12월 7일, 저드 박사는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한 교회 설교에서 또 경고했다. 그리고 그는 설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러한 경고를 무시한 정부당국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으나 이미 진주만에서는 많은 군인과 배가 파괴되고 말았다. 지나간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때 늦은 후회는 소용이 없다. 한자어에 ‘시불가실’(時不可失)이란 말이 있다. ‘때가 되었으니 (그 때를)잃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신랑과 신부, 준비된 하객이 들어가고 나면 결혼식장의 출입문을 봉쇄했다. 그것은 결혼식의 어수선한 틈을 타 도둑이나 강도들이 자주 침입했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런 유대인의 결혼풍속을 반영하고 있다.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신랑이 도착했고,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10). 늦게 도착한 처녀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호소했지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는 말과 함께 출입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도 든다. 동료 처녀들은 이기적이고, 신랑은 너무 냉정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일어날 엄연한 사실에 대한 경고이다. 신앙이란 전적으로 주님과 나만의 문제라는 것과, 준비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하는 것이지 문이 닫힌 후에는 결코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그래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고 외쳤다. 기회나 때가 지나갈 때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은혜의 문, 구원의 문이 열렸을 때를 잘 선용하라는 것이다. 한 번 닫힌 구원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

안전등(安全燈)을 발명한 영국의 유명한 화학자 험플리 데이비(H. Davy)라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결혼식 날도 잊을 정도였다. 결혼식은 시작되었는데, 기다려도 신랑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결혼식을 진행할 수 없었다. 화가 난 신부가 연구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무엇을 잊으신 것이 없습니까?’고 물었다. 그러자 데이비는 ‘무엇을 말입니까?’고 되물었다. 기가 막힌 신부는 ‘결혼식은 어떻게 되었죠?’라고 따져 물었다. 그제야 데이비는 오늘이 자신의 결혼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신부는 자신의 결혼식조차도 잊어버린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없다며 파혼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런 집중력이 있었기에 유명한 학자가 되고, 또한 발명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힘들어도 이 사실만은 기억하며 살아야겠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구약에 1,845번, 신약에 318번 언급되어 있다. 왜 이렇게 많이 강조하고 있을까? 그만큼 주님의 재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주의 재림은 우리 신자들이 꼭 기억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이다. 대강절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큰 소망의 절기이다. 날마다 깨어서 준비하므로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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