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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희귀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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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9,722회 작성일 10-12-0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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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희귀한 시대

삼상3:1~9

2010. 12/5 08:00, 11:00(성서주일)

코끼리의 생존법

코끼리는 덩치가 커서 둔해 보이지만 생존을 위한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정말 경이로울 정도다. 코끼리는 날씨가 더우면 귀로 부채질을 하거나, 물이나 진흙으로 샤워를 하여 더위를 이겨낸다. 햇볕이 따가우면 나무 그늘을 찾아가서 몇 시간이고 꼼짝하지 않고 서 있을 때도 있다. 코끼리의 지혜는 음식섭취에도 있다. 코끼리는 튼튼한 이빨을 위해 칼슘을 섭취해야 하는데, 칼슘섭취를 위해서 대나무를 즐겨먹는다고 한다. 그 단단하고 질긴 통 대나무를 발로 으깬 다음, 그것을 코로 말아 올려 입으로 씹어 먹는다고 한다. 또 건조한 아프리카 초원지대의 코끼리는 죽은 동물의 뼈를 먹음으로 부족한 칼슘을 보충한다고 한다. 비록 먹기에 까다롭고 불편하고 더럽게 여겨질지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서슴지 않고 먹는 것이 코끼리다. 그래서 자기 건강을 지켜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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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 건강도 그가 섭취하는 음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영적 건강은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가능하다. 코끼리처럼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한다면 영적 결핍(가뭄)은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 아모스는 말세의 특징을 이렇게 외쳤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끝 날에 심각한 영적 기근과 기갈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엘리시대의 특징

본문은 사사시대 말기의 모습으로, 엘리가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때이다. 1절은 그 시대의 영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rare) 시대, 그래서 하나님의 이상(vision)이 보이지 않은 영적으로 심히 어두운 시대였다는 뜻이다. 잠언에 ‘묵시(vision)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perish).’(잠29:18)고 하였다. 묵시(vision)가 없는 백성이 망하는 까닭은, 비전(묵시)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눈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명확히 파악하는 통찰력(insight)과 미래를 내다보는 청사진(foresight)을 아우르는 눈이 비전이다. 그런데 그 눈이 없으면 그 나라와 백성, 개인이 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엘리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질 수가 없었다. 때문에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통찰력은 물론 미래에 대한 전망과 기대가 없는 절망의 시대였다. 이 절망이 현실이 되었던 것을 보여준 것이 4장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엘리시대가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잘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가 되었을까? 본문은 그 이유를 엘리 제사장의 신상을 통하여 밝히고 있다.

 

1.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2).

여기서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2)라는 표현은 엘리의 개인적인 신상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엘리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했다(마6:22). 그래서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 했다(마6:23). 눈이 어두우면 인생도 어둡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눈이 어두우면 영적인 일에 어두울 수밖에 없고, 영적인 일에 민감하지 못하여 영적 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어떤 분이 백내장 수술을 받고나니 너무 또렷하게 잘 보여 참 좋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바빠졌다는 것이다. 무슨 얘긴가 했더니, 눈이 밝아지니 먼지도 잘 보이고 어질러진 것들도 잘 보여서, 눈에 잘 보이니 치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눈이 밝아지면 영적인 일에 민감하게 된다. 그래서 전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와 허물이 보이고, 연약함이 보이고, 가난함과 가련함이 보이게 된다. 영적인 눈이 뜨인 다윗은 이렇게 고백의 기도를 드렸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시38:4,5). 바울도 자신의 모습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로다.”(딤후1:15)하면서 주님의 은혜에 자신을 묶었다. 이것은 자기 비하도 아니고 연기도 아니다. 진실한 고백이다. 밝은 빛을 향하여 가까이 가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어두움의 실체를 정확하게 진단한다. 또한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도 분명히 보게 되고, 영광의 기업과 천국의 보배들을 보게 된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열심히 기도하게 되고, 또한 부지런히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시대는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깊은 절망에 놓이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 이렇게 기도하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2. 마음이 둔하여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3,6).

흔히 본장(삼상3:)을 사무엘의 소명장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소명을 통하여 점점 장성해 가는 사무엘의 모습에 비해 날로 쇠약해 가는 엘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이 사무엘에게 주어졌다는 점(4,6,8,10)과, 사무엘이 세 번째 자신에게 달려왔을 때 비로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깨닫게 되었던 점(8)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엘리의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엘리는 눈은 물론 귀도 어두웠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마음까지 둔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는 것도 더뎠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귀한 것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겐 무용지물이다. 어느 유럽인이 아프리카 여행 중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돌멩이가 심상치 않아 다가가서 보니 다이아몬드 원석이었다. 깜짝 놀란 이 사람은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면서 그 돌멩이와 바꾸자고 했더니, 사탕 맛을 본 아이들이 도리어 고맙다면서 그것을 바로 내주었다. 아이들이 그 돌멩이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값비싼 보석도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겐 한갓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이라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겐 단잠을 깨우는 귀찮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동일한 예수님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미운 물건처럼 생각하여 십자가에 죽여야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하면서 그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이것이 곧 깨달음의 차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설교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의미가 있고, 사건이 되기 위해선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깨닫는 마음은 ‘이해하는 마음’(understanding heart)과 같은 뜻이다(마13:51). 그런데 이 이해하는 마음을 히브리어로 ‘지혜로운 마음’(레브 쇼메아)이라고 한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며 구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왕상3:9). 이것을 위해서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렸다(엡1:17~18).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은 좋은 밭이란 곧 깨닫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마13:8).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임하고, 이상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고 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깨닫는 마음, 특히 하나님의 음성(말씀)을 깨닫는 마음에 있음을 역설하는 말씀이다.

 

3. 이것은 거처하는 장소와 깊은 관련이 있다(2,3).

본문에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장소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곳은 그가 평상시 생활하였던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3)이다. 반면에 엘리는 “자기 처소”(2)에 누웠다. 이것이 엘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을 보지 못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다. 일반적으로 성전은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로 사람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만나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성전을 가까이 하면서 성전중심의 생활을 하였던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온 인물들이 그토록 하나님의 전을 사모했고(시84:), 그 사모함에 자신을 불살랐다(요2:17).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이고 예레미야이고, 또한 예수님이시다.

 

신앙생활은 주님과의 영적인 거리를 좁히는 일이다. 이 영적인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에 비례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주 읽고(공부, 암송, 묵상하고), 주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자주 드리고, 주님과의 만남의 시간인 예배의 자리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확률이 높다. 물리적으로 가까이하다보니 영적인 거리도 가까워진 것이다. 첫 인상은 별로였는데 자주 만나다보니 호감이 가고, 정이 생기고, 간절함이 생기고, 그래서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많다. 반대로 친한 사람도 만남이 뜸해지면 서먹해 진다. 관계는 자주 만날수록 가까워지고, 가까울수록 관계지수가 높아진다. 물론 본문에서 자기 처소에 누운 엘리보다 하나님의 전에 누운 사무엘이 하나님을 더 사랑했다고 단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이 어떤 사람에게 있는 지는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에 누운 사무엘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오셨고, 또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사무엘뿐만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세의 특징을 ‘모이기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히10:25)이라고 하였다. 즉 주님과의 물리적인 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단의 고도의 전술이다. 사단은 ①분주함, ②나태함, ③사소한 시험, ④긴급한 일들, ⑤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 등 여러 가지 핑계로 모임을 포기하도록 하여 물리적으로 주님과 멀어지도록 한다. 그러면 자연히 영적인 거리도 멀어지게 된다. 현재 장기결석을 하고 있는 분들도 만나보면 신앙생활에 대한 거부감이나 교회에 대한 반감이 있어서 아니다. 위에서 열거한 이런 이유들에 묶여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 교회모임에 빠지다보니 주저앉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이기를 더욱 힘쓰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주님과의 영적 거리를 좁히기를 바란다. 일상생활에서 기도로, 찬양으로, 말씀묵상으로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기 바란다. 베드로는 ‘멀찍이’ 주님을 따르다가 주님을 부인하게 되었고(마26:58), 유두고라는 청년은 세상과 교회의 경계인 ‘창에 걸터앉아’ 졸면서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떨어져 죽었다(행20:9).

 

말씀을 들어야 산다.

지금까지 세 가지로 말씀이 희귀한 시대의 특징을 이야기했다. 결국 이 세 가지를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무관심’이다. 하나님이 말씀을 감춰버리셨기에 말씀이 희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해서 말씀이 희귀한 시대, 그래서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가 된 것이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말씀에 대한 무관심은 영적인 어둠을 초래한다. 이것이 엘리시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본문에서 이 점만 보면 그것은 본문을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니 그 시대를 변화시키고 개혁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으로 그 어두운 시대를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다. 그래서 본문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점을 부각시키면서 그 시대를 밝힐 인물로 어린 ‘사무엘’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어둠의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그 주체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와서 변화한 나라다. 최초 성경번역자 중에 이응찬(李應贊)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아편쟁이었다. 만주에서 아편을 구하기 위해 번역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가 아편보다 센 구약과 신약을 먹고 변화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권하는 사람인 ‘권서인’(勸書人)이 되었다. 그는 콜레라 위험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다. 아편쟁이를 순교자가 되게 하는 것이 말씀이다. 상인 서상륜(徐相崙)도 만주에서 장티푸스 때문에 돈을 없어서 번역아르바이트 하러갔다가 변화 받고, 동생 서경조(徐景祚)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서경조는 한국 최초교회(소래교회)를 세우고, 최초 7인 목사 중에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손자가 경실련의 서경석 목사다. 말씀을 붙들면 가문이 살아나고, 나라가 일어난다. 잠언13:13에,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고 하였다. 주님의 말씀이 능력이고, 복이고,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구원이고, 영생이다. 이 성서주일에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말씀에 대한 순종을 다짐하자. 그 말씀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자. 그래서 사무엘처럼 시대의 어둠을 뚫고 광명한 새날을 여는 주역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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