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Ⅱ. “충성스러운 삶”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기다림Ⅱ. “충성스러운 삶”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522회 작성일 10-12-12 15:32

본문

기다림Ⅱ. “충성스러운 삶”

마25:14~30

2010. 12/12 08:00, 11:00

대여인생(rent life)

빌려서 타는 차를 렌트카(rent car)라고 한다. 집이며 가구를 내 것으로 갖는다는 소유(to have)의 생활이 아니라 내 것으로 가질 필요 없이 필요할 때만 빌려서 쓰는 사용(to use)의 생활을 ‘렌트라이프’(대여인생)라고 한다. 미래학자 토플러(A. Toffler)는 「미래의 충격」에서 21세기는 ‘소유’의 생활에서 ‘사용’의 생활로 옮겨갈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팔고 사는 세일즈(sales)산업보다 빌리고 빌려주는 유즈(use)산업이 유망산업이 될 것이라고 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이미 미국에서는 마이카의 신장률보다 렌터카의 신장률이 웃돌고 있고, 이웃 일본에서도 유즈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아직 미미한 수준이지만, 우리도 사소한 비디오테이프나 책과 같은 일상용품을 비롯하여 옷, 가구, 정수기와 같은 생활용품, 복사기와 같은 사무용품, 용동기구, 캠핑용품, 기계나 장비, 시설, 자동차와 집까지도 빌려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결혼식에서 부모형제를 비롯한 하객을 빌려 예식을 올리기도 하고,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외로운 사람을 위해서 남편이나 아내도 빌려준다고 한다. 그러니 ‘대여인생’이란 말이 지나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건강, 지혜, 재능, 외모, 생명도 모두 내 것이 아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는 것은 맡겨진 것(生寄)이고, 죽은 것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死歸)이라고 한 것이다. 성경도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이런 우리의 삶을 가리켜 ‘청지기 인생’이라고 한다.

 

우리는 청지기다.

본문은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과 관련된 비유들 중 두 번째로, ‘달란트 비유’다. 이 비유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다. 이 종말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하여 묻고 있다.

 

14절,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먼 나라에 가면서 자기 종들에게 장사하라고 자본금을 맡기고 떠났다. 종들의 재능에 따라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다른 종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각각 맡겼다. 여기서 주인은 예수님이고, 종들은 우리들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도록 각자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맡기셨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란 뜻이다. 청지기는 종이다. 그리고 종은 자기 소유를 가질 수 없는 신분이다. 종이 가진 모든 것은 주인의 것이다. 신자는 주님의 종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것이다. 시간도, 물질도, 가정도, 자녀도, 재능도, 생명도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Time’s up! ‘다 되었다. 끝을 내라.’ 하시면 모든 것을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위탁을 받아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에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하고, 청지기 의식에는 몇 가지 중요한 태도가 요구된다.

 

1. 청지기는 맡겨진 것을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때때로 어려운 일이 생기고, 병에 걸리기도 하고, 경제적인 손실과 타격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것은 삶의 순탄함이 내 것이 아니고, 건강이 내 것이 아니고, 경제적인 풍요가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늙어가는 내 육체를 바라보면서 청춘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모든 탈선의 원인은 청지기 의식이 소유의식으로 변질될 때 시작된다. 삶, 시간, 재물, 건강을 비롯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데, 그것들이 내 것인 것처럼 잘못된 소유의식을 가질 때 불행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건강한 삶은 건강한 청지기 의식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은혜의식, 겸손한 태도, 감사의 고백이 나오게 된다.

 

이와 같은 청지기 의식은 삶의 태도에도 영향을 준다. 무슨 일이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가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라고 묻게 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의욕이나 생각보다 주님의 뜻을 아는 것에 우선한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니까,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던 종과 주인에게 받은 달란트를 묻어 두었던 종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종들은 주인의 뜻을 받들어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였다(16,17). 하지만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18). 그것은 주인의 뜻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이 종에게 더욱 심각한 것은, 그가 주인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24). 이런 잘못된 선입견이 주인의 뜻을 왜곡시킨 것이다. 그래서 결국 주인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여 쫓겨나는(30)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은 사람들이 많다. 건강, 재능, 지위, 물질, 생명을 헛되이 사용하고, 그것들을 선한 도구가 아닌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청지기 의식의 결여와 그것들을 주신 분의 의도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있는 것들에 대한 소유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다 내려놓기 바란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이다. 모든 일에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나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고 주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따라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청지기의 올바른 태도이다.

 

2. 청지기는 맡겨진 것에 충성해야 한다.

1947년 위스콘신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천체물리학자 첸드리스카(Chandrasekhar)박사가 시카고대학으로부터 전화를 받다. 겨울방학 동안 고급물리학에 대한 강의를 부탁한다는 내용이다. 그는 기꺼이 승낙했다. 그런데 몇 주 후, 수강신청한 사람이 두 사람밖에 없어 강의를 취소해야겠다고 연락이 왔다. 이 때 첸드리스카는 이런 대답을 했다. ‘클래스가 작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강의를 하겠습니다.’ 그는 사나운 눈보라를 헤치고 두 시간 떨어진 거리인데도 일주일에 이틀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두 학생을 상대로 강의를 하였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흐른 후, 첸드리스카에게 강의를 받았던 그 두 사람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한 사람은 ‘첸닝 양’(Chen Ning, Yang)박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충도 리’(Tsung Dao, Lee)박사로 둘 다 중국계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수상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가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은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 때문입니다.’ 수에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첸드리스카의 강의가 노벨상으로 열매가 맺혀진 것이다. 인생의 성패는 수의 많고 적음, 일의 크고 작음, 그리고 중요도에 있지 않고, 그 태도에 있다. 얼마나 성실히 최선을 다하느냐에 있다. 이것을 가리켜 충성이라고 한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사람에게는 성공이라는 열매가 따르게 된다.

 

주님은 충성스러운 사람을 좋아하신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시101:6). 주님은 이 땅에서 충성된 사람을 찾으시고, 충성된 사람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님은 충성된 일꾼을 귀하게 보시고, 일꾼들에게 그 충성을 요구하신다(고전4:2). 본문도 마찬가지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이 주인에게 칭찬을 받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책망을 받은 것은 그들이 남긴 결과(이익)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주인이 맡겨주신 일에 대한 태도, 곧 충성 때문이다. 본문 역시 지연된 종말론을 언급하고 있다(19절, “오랜 후에”). 그리고 이것은 주인의 부재(不在)를 뜻하고, 주인의 부재는 종들의 태도를 평가할 수 있는 시간이다. 악한 종은 주인이 없기에 나태와 게으름을 일삼으며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한다. 하지만 선한 종은 주인의 존재와 상관없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주인이 계시지 않지만 주인이 계실 때와 똑 같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충성이다. 충성이란 상황이나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마음과 자세를 뜻한다(성경이 충성을 믿음이란 단어와 동의어로 사용한 이유). 그래서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긴 종들에게 똑같은 양의 칭찬을 하셨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23). 충성스러운 사람은 칭찬을 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며 더 큰 일을 맡게 되었지만,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은 책망과 맡겨진 것까지 빼앗기고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26~30). 물론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 것에 대하여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문제는 모두가 주인 것이고, 그것을 주인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맡겨진 것을 회수 당하고, 주인과 함께 할 수 없도록 쫓겨나게 된 것이다. 이런 불행한 일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반드시 있을 것이니 주님의 뜻을 따라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니고는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없고, 주님의 일을 맡을 수가 없고, 맡은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맡고 감격스러워 한 이유는 나 같은 것을 주님이 충성스럽게 여기셨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때문에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어려워도 어려운 줄 모르고 오히려 감사하면서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행5:41). 이것이 신앙생활이고, 주님의 청지기로서 삶이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 다 주님의 것이다. 아낌없는 충성으로 주님께 칭찬받는 삶이 되자!

 

냉수와 같은 사람

임금이 한 신하 불러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이 우물물을 길어 저기 독에 가득히 채우라.’고 했다. 그런데 그 독은 밑이 빠진 독이었다. 어떻게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울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신하는 오직 임금의 명령만 생각하면서 밤을 낮 삼아 물을 길어 날랐다. 우물 바닥이 드러나도록 물을 길어다 부어도 독을 채울 수가 없었다. 당연한 결과다. 그 때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금덩어리였다. 신하는 그 금덩어리를 가지고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용서하소서. 아직 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서 이 금덩이를 건졌나이다.’ 임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밑 빠진 독을 어떻게 채우겠소. 우물이 바닥나도록 수고했구려.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사람이오. 그 금덩이는 그대의 충성에 대한 나의 선물이오.’

 

이 신하처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있다.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이 있다. 걱정거리를 가지고 만나면 그 사람 때문에 그 걱정이 반으로 줄어드는 사람,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면 그 즐거움이 더 커지는 사람이 있다. 기분이 안 좋다가도 그 사람을 만나면 힘이 나고, 용기가 생기는 사람, 이런 사람을 성경은 ‘얼음냉수’와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바로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25:13). 신자는 얼음냉수처럼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이것이 주님의 복(즐거움)에 참여하는 비결이다(21,23절 “즐거움”이란 단어에 ‘지복’이란 뜻도 있음). 주님의 눈은 이런 사람을 찾고, 이런 사람에게 향하고 있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람이 되자.

 

대강절 첫 주일에「열 처녀 비유」를 통하여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태도로 ‘깨어있는 삶’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본문은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은 깨어있는 삶 이상이어야 함을 말씀한다. 그것은 깨어있으되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해야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신앙 생활하는 것을 넘어서 주님께서 각자에게 그 재능대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충성(섬김, 봉사, 헌신)에 묻혀서 가려하지 말고 자신의 충성을 주님께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은 이런 신자를 오늘도 애타게 찾고 계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34 / 11 page

설교말씀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