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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Ⅲ, “사랑으로 섬기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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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954회 작성일 10-12-1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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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Ⅲ, “사랑으로 섬기는 삶”

마25:31~46

2010. 12/19 08:00, 11:00

진짜 바보 

어느 주인에게 하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바보였다. 주인은 그를 쫓아내면서 지팡이 하나를 주고 말했다. ‘이 지팡이를 갖고 나가라. 다니다가 너보다 더 미련한 바보를 만나면 주어라,’ 바보는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아도 자기보다 더한 바보가 없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에게 옛 주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는 자기를 내쫓은 주인이지만 지난날의 정이 생각나 주인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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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아주 많이 아프시군요.’

‘그래, 나는 곧 떠나야 할 것 같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가야한다.’

‘거기가 어딘데요? 먼가요? 가시면 언제쯤 오시는데요?’

‘이 바보야! 세월이 흘러도 너는 여전히 바보구나. 이 세상을 떠난다는데 언제 오느냐고 묻니? 그곳은 한 번 가면 결코 돌아올 수 없다.’

‘그럼 그곳에 가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셨지요?’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다.’

‘그렇게 먼 곳을 떠나면서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고요. 그러면 이 지팡이라도 가지고 가세요.’

 

바보는 죽어가는 주인에게 옛날 자기보다 더 한 바보를 만나거든 주라고 했던 그 지팡이를 내밀었다. 결국 주인이 바보 하인보다 더 바보인 샘이다. 진짜 바보는 세상살이에 어눌하고, 지적인 능력이 떨어진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끝에 대하여, 영원한 삶에 대하여 준비하지 않은 사람이다. 세상에 이런 똑똑한 바보들이 많다. 아무리 지혜롭게 멋지게 살았어도 영원한 삶을 모르고, 그것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처럼 어리석은 바보는 없다(눅12:16~21).

 

끝은 반드시 온다.

본문은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자세에 대한 세 번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다(이를 비유라기보다는 간단한 ‘묵시문학’으로 분류하는 학자들도 많음).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 그리고 본문의 공통점은 반드시 끝이 온다. 즉 주님께서 반드시 오신다는 것이다. 앞의 두 비유는 ‘먼 어느 날’ 주님이 오신다(6,19)고 했고, 본문은 그 주님이 이미 오셨고 심판이 시작되었다(31). 그리고 주님의 오심은 ‘심판’을 동반하게 된다. 열 처녀 비유에서는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달란트 비유에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심판이 행해졌고, 분문에서는 복 받을 자와 저주를 받을 자, 곧 영생에 들어갈 의인과 영벌에 들어갈 악인으로 심판이 행해졌다. 특히 본문이 강조한 것은, 주님의 심판 때 중요시 되는 것은 사랑의 계명,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22:39)는 말씀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천했는가 하는 점이다.

 

심판의 특징

25장의 비유들은 독립적이면서 또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열 처녀 비유는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는 것이고, 달란트 비유는 깨어 준비하는 것은 달란트를 맡겨주신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양과 염소 비유는 우리가 충성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 여섯 가지가 제시되어 있다. 굶주린 자를 먹이는 일, 목마른 자를 마시게 하는 일, 나그네를 영접하는 일, 헐벗은 자를 입히는 일, 병든 자를 돌보아주는 일, 그리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보는 일이다. 이런 사랑의 행동이 네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다(35~36, 37~39, 42~43, 44). 이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 육체적으로 연약한 지극히 작은 자들이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행한 사랑의 실천이 곧 주님 자신에게 행한 것(40, 45)이라고 강조하셨다. 이런 사람들을 성심껏 섬기는 일이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고, 깨어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행하신 최후 심판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주님의 심판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데 있다.

주님의 최후 심판에서 다루어지는 죄는 우리가 범한 악행이나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sins of commission),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함에도 게으름과 무관심으로 그냥 지나쳐 버리고 행하지 않은 것이다(sins of omission). 본문에 “저주를 받을 자들”(41)이라 하여 “영벌”(46)에 처하게 된 사람들의 죄 목록에는 그들이 행한 악행은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고, 오직 작은 자들에게 사랑의 행위를 하지 않은 일들만 언급되고 있다(42~43절에 “아니하였고”라는 표현이 5회 반복). 물론 “복 받을 자들”(34)로 인정이 되어 “영생”(46)에 들어가게 된 사람들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아서라기보다 오히려 작은 자들에게 사랑의 행위를 한 것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앞의 두 비유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어떤 악행을 저질러서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준비해야 할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 역시 그가 저지른 악행 때문에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긴 것이 아니라 게을러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 때문이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는 마땅히 깨어서 준비해야 하고, 종은 주인이 맡겨주신 것에 마땅히 충성해야 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이 사랑하는 지체들(이웃)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이런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이 죄다. 결국 이를 야고보의 표현을 빌리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인 것(약2:26)이다. 본문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핵심사상이다(5:20,48, 7:24~27, 18:21~35, 21:19 등). 본문은 이런 의미에서 마태사상의 요약이고 결론인 샘이다(전통적으로 마태복음을 신앙공동체를 위한 ‘훈련독본’, 혹은 ‘교회교과서’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 아무튼 이웃을 사랑하는 것, 특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은 교회와 신자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이다. 이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며(40), ‘산 믿음’의 증거다.

 

2. 주님의 심판은 영적 ‘파종의 법칙’에 의존한다.

바울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고 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심는 대로 거둔다.’는 중요한 영적 원리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연약한 이웃들에게 사랑의 행위를 심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영생을 선물로 주셨고, 그것을 외면한 사람들에겐 영벌을 주셨다. 주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요, 아무리 사소한 것, 심지어 “냉수 한 그릇”까지도 그 행한 것을 갚으시는 분이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0~42).

 

우린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의 삶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마음가짐과 태도에서 미래의 내 모습이 결정된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이 저 나라에서의 삶을 결정한다. 그래서 성경은 현재, 여기에서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현재 무엇을 심고, 어디에 심고, 얼마나 심느냐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한다. 아울러 현재라는 시간을 미래를 위한 투자의 기회로 알고 선용하라고 권면한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8,19).

 

물리학에 원소불멸의 법칙이 있다. 이 강대상이 불에 타서 없어지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강대상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는 없어지지 않고 이 우주공간에 영원히 남아있다는 것이 원소불멸의 법칙이다. 물리학이 원소불멸의 법칙을 믿듯, 신자는 ‘섬김 불멸의 법칙’을 믿어야한다. 우리가 역사의 이랑에 심은 작은 사랑의 씨앗은 언젠가는 꽃피어 열매를 맺을 것이다. 물론 남이 보지 않는 데서 하는 일이라 사람은 모를 수 있다. 그렇지만 주님은 완벽하게 기억하셨다가 반드시 보상해 주신다. 주님은 영적 파종의 법칙에 따라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물리학의 ‘인과율’과 다르다. 인과율은 합리적이지만 덤이나 용서, 은혜가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이 영적 파종의 법칙은 ‘증대의 법칙’이다. 한 개를 심으면 하나의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에서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거둔다. 본문에서 의인들이 사소한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내가 쏜 화살을 어디서 찾을까 염려하지 않고, 기회가 있고 힘이 있는 한 무한히 화살을 날려 보내는 그것이다. 본문의 의인들은 자신이 행한 선행에 대하여 전혀 기억을 못하였다(반면에 악인들은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변명함). 그것은 섬기는 것을 ①마땅히 해야 할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이고, ②습관화(일상화) 되었기 때문이다. 저는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은밀한’ 섬김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다 보시고 또한 기억하셔서 영생으로 보답하셨다.

 

사랑의 청지기

어느 목사님이 신장에 이상이 있어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 검진결과 신장이식을 해야만 목회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어느 주일, 다른 교회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설교 중에 목사님의 안타까운 사정을 알리면서 목사님을 위해 신장 기증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여기 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천 여 명의 신자 거의가 손을 들었다. 이 목사님은 이 교회 신자들의 사랑과 헌신에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모두가 기증하겠다고 나서니 그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목사님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모두가 기증을 원하고 있는데 특정인을 지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으니 오리털을 날려서 그것이 내려앉는 사람을 기증자로 정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오리털을 하나 뽑아 회중석을 향하여 날려 보냈다. 그런데 그 오리털이 어느 곳으로 내려앉으려고 하자 그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공중을 바라보며, ‘주여! 할렐루야! 아멘!’을 외쳤다. 그러자 내려앉으려던 오리털이 다시 공중으로 올라가 다른 곳으로 갔고, 그곳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고, 결국 오리털은 밖으로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가 아닌지 모르겠다. 분명한 사실은 사랑은 언어유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구체적인 실천이고 희생이다.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여 환대하는 것이 사랑이다.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자신의 소중한 것까지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청지기다. 특히 이웃을 돌보고 섬겨야 할 ‘사랑의 청지기’다. 본문은 사랑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 이 일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여 주님 다시 오실 때 영생의 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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