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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행복한 마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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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110회 작성일 10-12-2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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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행복한 마침표

신34:1~12

2010. 12/26 08:00, 11:00

웰 다잉(Well-dying)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는 그의 책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은 확실한 일인데도 무의식중에 있는 ‘나는 죽지 않는다.’는 잘못된 신념 때문에 불행하다고 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기분 좋게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어야할 과정이기는 하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지 모르기에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요즈음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최소화하고 현실의 삶을 건강하고 의미있게 보내자는 뜻에서 ‘웰 다잉’(Well-dying)이 유행하고 있다. 한 마디로 죽음을 준비해서 ‘잘 죽자’는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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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로 ‘죽다’는 뜻을 가진 단어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verenden’(동물의 죽음)이란 단어로 ‘정신과 육체가 쇠약해져서 그대로 삶을 마치는 것’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sterben’(인간의 죽음)이란 단어로 ‘육체가 쇠퇴하여 죽음에 이르지만 정신적 인격적으로 성장을 계속하여 존엄한 상승과정을 밟아 지상의 삶을 마치는 것’을 뜻한다. 바울이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고 한 것처럼 그렇게 생을 마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sterben’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verenden’(동물적인 죽음)으로 끝내버리고 있다. 바로 이것에 대한 진지한 반성에서 웰 다잉이 나온 것이다. ‘웰 다잉’이 곧 ‘웰 빙’(Well-being)이다(위대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의 생애를 보면 죽음을 직면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많다).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0,23)는 말씀을 들으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다(Well-being)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모세처럼.......

늘 느끼는 것이지만 연말이 되면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이다. 엊그제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새해를 다짐한 것 같은데, 벌써 12월 마지막 주일이 되었다. 사실 연말이니 연초니 하는 표현은 사람들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그렇지 달력의 숫자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일 년을 주기로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을 계획하고 다짐해 보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나아가서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해 볼 수 있다(Well-dying)면 더욱 유익한 시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오늘 이 시간이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본문은 행복한 삶을 살다(Well-being)가 행복한 마침표(Well-dying)를 찍은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 주인공은 이스라엘 출애굽의 영웅 ‘모세’다. 모세의 마지막 모습을 통하여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당에, 우리 역시 ‘삶의 행복한 마침’을 위한 성찰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본문은 모세오경 마지막 책, 마지막 장으로 모세의 임종 장면이다. 성경 인물들 대부분 그렇지만, 특히 모세를 보면 떠나가는 뒷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나도 모세처럼......’하고 욕심을 부려본다. 우리 모두 모세처럼 이 땅에서 충성스럽게 살다가 멋진 뒷모습을 남기고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본문은 모세를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할 것인지에 대한 좋은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믿음

본문 10~12절은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잘 보여준다.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대면할 수가 없는데,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10)을 할 만큼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온갖 역경을 뚫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 맞은편까지 인도한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느보산 정상 비스가 봉우리로 오르게 하신 다음,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땅 가나안 전체를 보여주기만 하시고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1~5). 그래서 결국 숙원이었던 그 땅을 바라보기만(eye shopping) 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어야했다. 당시 모세의 나이가 비록 120세였으나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7). 나이는 많으나 강건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얼마든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강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그 동안 그가 쏟은 수고, 게다가 충분한 건강까지 유지하고 있으니 모세가 가나안 입국1호가 되어야 마땅한데, 하나님은 그에게 입국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모세는 이런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했다. 우린 이 사건을 통하여 모세가 참으로 믿음의 영웅이고, 그가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그의 믿음의 성격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충성과 순종’이다. 모세의 믿음은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성경은 모세를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스럽게 섬기는 종(히3:2,5)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으로 자기 백성들을 여기까지 인도하였다(물론 므리바에서 단 한 번 불순종한 사건이 있긴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칠고 완악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너는 ‘여기서 멈추라’고 하시니, 모든 것을 여호수아에게 내어주고 물러섰다. 모세는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생명까지 드리면서 충성스럽게 섬겼던 사람이다. 그래서 본문은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10)라는 말씀으로 모세를 추억하고 있다. 모세는 우리가 닮아야 할 소중한 믿음의 선배다.

 

2. 마르지 않은 깊은 영성

‘마르지 않은 깊은 영성’은 모세가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 배경이다. 믿음은 교육이나 훈련과 같은 자기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하여 ‘주어진 것’이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모세는 깊은 영성의 사람이었다.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대면할 수가 없는데, “하나님과 대면”(10)을 했던 유일한 사람이 모세다. 이것은 곧 그의 영성을 반영해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7)는 말씀 역시 그의 육체적인 강건함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의 정신적 영적 상태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죽는 순간까지 마르지 않은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주님의 탁월한 일꾼이 되게 한 비결이다. 

 

모세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아 최상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남달랐다. 그래서 고통받고 있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고자 했는데, 결국은 지명수배를 받은 도망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애굽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광야로 가서 그곳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냈다.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한 번쯤 모세처럼 ‘인생의 광야’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인생이 갈린다. 어떤 사람은 이런 광야 앞에서 좌절과 낙심, 절망, 그리고 원망과 불평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그곳을 스스로 자기 인생의 무덤으로 만든 사람이 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모세처럼 광야를 연단과 훈련을 통한 새로운 출발의 장소, 부활의 장소로 승화시킨 사람도 있다. 모세에게 광야경험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영성훈련의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영성이 깊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그 힘으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성공적으로 인도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은 불순종과 반역의 연속이었다. 그런데도 모세는 그들에게 맞서지 않고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었고, 은혜와 능력을 구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깊은 영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경이 그토록 모세를 귀하게 보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삼상16:7)고 성경은 말씀한다. 여기서 중심이란 마음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보신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자. 또한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렘17:9)고 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보신다는 말인가? 결국 여기서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보신다는 뜻이다. 그렇다. 주님은 우리의 외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믿음을 보신다. 그 믿음을 통하여 드러나는 깊은 영성을 보신다. 그래서 주님은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시고,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 모세는 죽는 순간까지 깊은 영성을 소유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요동을 치는 우리의 믿음과 크게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우리 역시 모세와 같은 마르지 않은 깊은 영성의 소유자가 되자. 그래서 주님께 기쁨이 되고, 주님께 쓰임받는 복된 인생이 되자.

 

3. 사역의 성공적인 승계

흔히 사람이 죽을 때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죽음 이후에 대한 불안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떠난 후 가족이나 공동체가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다. 사실 믿는 우리에겐 이 두 가지는 염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천국이 예비되어 있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특히 두 번째 요인은 평생 훌륭하게 사역을 했던 많은 주님의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문제다(큰 성취를 남긴 사람들일수록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음). 그리고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자주 발생하여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선임자의 ‘멈춤-내려놓음-물러섬’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세는 이 점에 있어서도 아주 멋진 모범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여호수아에게 인계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났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9). 여기서 안수는 ‘전수’(傳授)의 뜻이다. 모세가 자신의 모든 권한을 여호수아에게 승계했다는 뜻이다. 이 사건 또한 모세의 순종하는 믿음과 깊은 영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위임하라 하니까 위임하고, 멈추라 하니까 멈추고, 내려놓으라 하니까 내려놓고, 물러서라 하니까 물러선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사역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종은 사라져도 사역은 계속되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전례가 모세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신약에서는 세례요한이 또한 좋은 모범이다. 그는 예수님의 선구자로서(마3:3) 주님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자 “그는 흥하여야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하면서 조용히 무대 뒤로 물러섰다.

 

신학자 몰트만(J. Moltmann)은 교회를 ‘연장된 그리스도’(Christus prolongatus)라고 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났다고 그의 사역이 끝나서는 안 되고, 비록 주님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가 ‘연장된 그리스도’가 되어 그의 사역을 계승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세처럼 자신의 사역을 다음 사람에게 위임하고, ‘멈춤-내려놓음-물러섬’이 있어야한다. 입장도 중요하지만 물러섬은 더 중요하다. 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이것이 명쾌하지 못하여 그 동안 쌓아온 명성에 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역이든 삶이든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만큼 하다가 주님이 ‘이제 그만’ 하면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름답다.

 

짚신장수 부자(父子) 이야기

짚신장수 부자가 있었다. 짚신을 만들어 시장에서 팔면 아버지 짚신은 잘 팔리는데, 아들의 것은 그렇지 못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 비법을 가르쳐달라고 졸랐으나 직업상 비밀이라며 가르쳐주지 않았다. 드디어 아버지가 죽게 되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며 그 비법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했고, 아버지는 단지 ‘털! 털! 털!’ 이 세 마디만 남기고 죽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이 세 마디의 말을 놓고 며칠을 씨름하다가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마무리로 털 손질을 잘하라는 뜻이다.

 

일도 삶도 마무리가 중요하다(All is well that ends well)는 이야기다. 일본과 우리 사이에 기술적 차이는 없는데, 마무리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제품이 일본을 넘어서지 못한 이유다. 무엇이든 마무리가 잘 되어야하고 마무리가 중요하다. 옛 사람들은 인간이 소망하는 오복(五福)중에 마지막을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했다. 특별한 병고(病苦)없이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일생을 마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가 복(福) 중에 마지막 복이라는 것이다. 모세처럼 멋진 마무리를 위해선 주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깊은 영성을 바탕으로 충성스럽게 섬기는 순종하는 믿음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주님과의 관계를 확인해 보자. 그래서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하여 잘 준비하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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