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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783회 작성일 11-01-1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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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인생

엡5:18~21

2011. 1/16 08:00, 11:00

되고 법칙(法則)

(※동영상 보기)‘되고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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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으면 벌면 되고

잘못이 있으면 고치면 되고

안되는 것은 되게 하면 되고

모르면 배우면 되고

부족하면 채우면 되고

힘이 부족하면 힘을 기르면 되고

잘 모르면 물으면 되고

잘 안되면 될 때까지 하면 되고

길이 안보이면 길이 보일 때까지 찾으면 되고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면 되고

기술이 없으면 연구하면 되고

생각이 부족하면 생각을 하면 되고

내가 믿고 사는 세상을 살고 싶으면 거짓말에 속지 않으면 되고

미워하지 않고 사는 세상을 원하면 사랑하고 용서하면 되고

사랑 받으며 살고 싶으면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진실하면 되고

세상을 여유롭게 살고 싶으면 이해하고 배려하면 되고

해보라! 된다!

 

황종열의「새로운 세기의 시작」2권에 나온 내용이다. 우리 인생을 이 ‘되고’ 법칙에 대입하면 많은 부분 성취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되고 법칙이란 한마디로 삶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갖자는 것이다. 안된다고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되게 하자는 것이다.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인생에는 노력해도 안되는 일이 많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마음대로 다 된다면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내 마음대로 안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그 주인이 따로 있음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는 것이지 되고의 법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잘되는 ‘나’

조엘 오스틴(J. Osteen)은 「잘되는 나」(이 달의 추천도서)에서 잘되는 마음, 생각, 습관, 관계, 태도, 결단, 실천 이 일곱 가지가 나를 잘되게 하는 열쇠라고 말한다. 신앙을 떠나서 자기 계발(啓發)에 의미 있는 탁월한 제안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방법론이고 본질은 비껴가고 있다. 나를 참으로 잘되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방법이 아니라 이런 방법을 가능케 하신 ‘성령님’이시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되는’ 인생이 될 수가 있다.

 

워치만 니(Watchman Nee)의 간증이다. 폐병 때문에 사역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바울처럼 폐병이라는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선교지를 향해 배를 타고 가다가 강 가운데서 큰 바위를 만난 꿈을 꾸었다. 바위 때문에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저 바위를 없애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배가 그 바위를 지나 무사히 가게 되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보니, 물이 갑자기 불어나 물속으로 바위가 잠겨서 그 위로 배가 지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우리의 삶에 은혜의 강물이 넘치면 어떤 문제도 극복할 수가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문제가 되고 장애가 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면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주님께 문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잘되는 ‘나’는 성령 안에서만 기대할 있는 일이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래서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하고 있다.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소극적인 권면이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적극적인 권면이다. 사실 성령이 아닌 ‘그 무엇인가’에 취한 것은 “방탕”한 것이다. “방탕”이란 헬라어 ‘아소티아’(ἀσωτἰα)로, ‘아’(α/부정접두어)+‘소조’(σωζω/아끼다, 구원하다)의 합성어이다. 결국 세속적인 무언가에 취한 것은 자기를 아끼지 않는 것, 자기를 망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모습을 보라! 안티(anti)들이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 자신들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스스로 부유함을 자랑하고 있지만 얼마나 가련하고 곤고한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는가?(계3:14~17). 이는 성령이 아닌 다른 것들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술 취함’은 옛 사람(엡4:22)의 특징으로 이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ἀσωτἰα). 반면에 ‘성령으로 충만함’은 구원받은 새 사람(4:24)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세속적인 것들을 다 비워내고(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 자리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아끼고, 나를 구원하는 일이다. 나를 잘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충만”이란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통치적 의미이다. 철저하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뜻한다. 성령은 신자의 삶의 근본적인 힘이다. 신자가 성령 안에 있을 때에만 신자답게 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받으라.”는 동사는 ‘현재 수동태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①현재형은 진행의 의미이다. 성령 충만은 1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사건이 되어야 한다. 어느 한순간이나 특정한 시간이 아닌 항상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②수동태는 타자(他者)성을 의미한다. 구원이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선물)인 것처럼 성령충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는 동시에 성령은 소유나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린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령께 자신을 온전히 맡겨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만이 신자로서 바르게 살 수가 있다. 또한 ③명령형은 응답의 의미이다. 성령 충만을 위해선 우리의 적극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마치 빗물을 받기 위해 비가 올 때 그릇은 준비한 것과 같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우리 편에서 사모하고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본문은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성령 충만함의 결과이다. 하지만 성령 충만함의 원인이기도 하다. 결과와 원인이 나선형(螺旋形) 구조를 이루며 충만해지고 그 충만함이 지속된다.

 

1. 찬양이다(19).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 동시에 주님을 찬양하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 주님은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고, 찬양은 그분의 명령이다. 성경에 ‘찬양하라’는 명령이 400여회나 나온다. 그러므로 신자가 해야 할 가장 선하고 아름답고 마땅한 일이 찬양이다(시147:1). 주님은 찬양의 주인이시고, 찬양 중에 거하시고, 찬양 중에 능력을 나타내시며, 찬양을 기뻐하신다. 그래서 찬양할 때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고, 머물게 되는 것이다. 19절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찬양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이다.

 

첫째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찬양하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은 당시 유행했던 찬양의 여러 장르를 의미한다. 이런 장르를 초월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주님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서로 화답하며” 찬양하라. 화답(和答)은 우리 민요 ‘강강술래’처럼 서로 주고받으며 부르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①함께 찬양하라는 것(함께 찬양하기 위해선 멜로디가 단순하고 누구나 쉽게 따라서 부를 수 있어야 함)과, ②소리를 내서 찬양하라는 것이다. 찬양은 감상하는 것이 아니다. 소리를 내서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찬양을 입술의 열매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히13:15)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마음으로” 찬양하라. 이는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라는 뜻이다. 결국 모든 장르를 초월하고, 함께 목소리를 높여서 정성껏 찬양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찬양하는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고, 또한 머물게 되는 것이다.

 

2. 감사이다(20).

찬양과 감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쌍둥이와 같다. 찬양의 생활은 자연스럽게 감사의 생활로 이어진다. 찬양이 있는 곳에 감사가 있고, 감사가 있는 곳에 찬양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 성령으로 충만함이 임하게 되고, 또한 머물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찬양에 대한 권면에 이어 감사를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20). 놀라운 것은 여기 이 짧은 구절 안에 바울의 감사신학이 잘 드러나고 있다. 감사의 범위는 “범사에”, 감사의 이유(내용)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의 빈도(頻度)는 “항상”, 감사의 대상은 “아버지 하나님께”이다. 어떻게 이런 감사생활이 가능할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된다. 그러면 이런 감사생활이 있는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물론 성령으로 충만함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은 감사의 생활에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누구에게나 배우는 사람이요,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며,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를 향하여 “범사에.......항상.......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3. 피차 복종하는 것이다(21).

많은 경우 21절을 ‘가정규범’(5:22~6:9) 단락에 포함시켜 해석을 하고 있다(가정규범의 서론으로 생각).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성경대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고, 오히려 바울의 논법(論法)에 더 어울린다. 이는 바울서신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떤 내용을 이야기하다가 어떤 단어나 주제에서 그것을 확장하여 새로운 내용으로 이야기를 바꾸는 경우가 자주 있다(그리고 문법적으로도 일치: ‘찬양과 감사, 복종’이 모두 현재분사). 본문에서도 성령충만의 결과이자 원인인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을 가정규범으로 확장시켜 이야기한 것이다. 그래서 앞 문단(15~21)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다. 사실 성령충만하지 않고는 가정규범을 올바로 지킬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복종은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복종은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요구하는 덕목이다. 그런데 본문이 강조한 것은 “피차 복종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피차(서로)’가 핵심이다. 남편이나 아내(5:22~33), 부모나 자식(6:1~4), 상전이나 종(6:5~9). 누구 한편에게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에게 요구하고 있다. 신분이나 계층,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서로’ 복종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 없이 ‘서로’ 복종하는 삶은 불가능하다. 동시에 자신의 특권을 모두 내려놓고 겸손하게 복종하는 곳에 성령께서 임하신다. 성령은 겸손의 영, 섬기는 영, 순종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비워내는 그곳에 주님의 영,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고, 머물게 되는 것이다. 회개하는 심령이나 장소에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신 것도 같은 의미이다. 회개란 주님께 복종하기 위하여 자신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서로 복종하는 것이 성령충만의 비결이다.

 

현재 명령형

찬양과 감사, 복종이 본문에서는 ‘현재분사’(그 이유는 성령의 사람은 찬양과 감사, 복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분사형을 사용한 것)로 되어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모두 ‘현재 명령형’(찬양하라! 감사하라! 복종하라!)으로 되어 있다. 만약 찬양이나 감사, 복종이 성령충만의 결과로만 주어진 것이라면 성경은 굳이 ‘명령형’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을 제외한)모두가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힘써서 찬양을 드려야 하고, 감사를 드려야 하고, 복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찬양하고, 감사하고, 서로 복종하여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경험하라는 것이다.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이라 했다.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뜻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잘되고 못되는 것도 주님 손에 있는 것이다. 주님의 성령 안에 있다. 바울은 이를 철저하게 경험한 사람이다(롬7:~8:을 보라!). 찬양과 감사, 복종을 생활화하자. 주님은 이런 우리의 삶에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신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잘되는 2011년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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