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생업(生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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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846회 작성일 11-01-23 17:29본문
되는 생업(生業)
말3:7~12
2011. 1/23 08:00, 11:00
휴면계좌(dormancy account)
얼마 전에 서울 지하철 분실물 센터에 대한 방송을 보았는데, 승객들이 분실했지만 작은 액수라 찾아가지 않은 돈이 2억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휴면계좌(休眠計座)라는 것이 있다. 개설은 되어 있지만 일정기간동안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아 은행금고에서 잠자고 있는 계좌를 일컫는 말이다. 아마 그 돈도 은행마다 무척 많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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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천국을 갔는데, 천국 보물창고도 은행처럼 개인별 보관함이 가득 있었다. 그리고 많은 보관함이 보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보관함에 쌓여 있는 보물이 무엇이냐고 천사에게 물었더니, 천사가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보물들인데 사용하지를 않아 이렇게 쌓여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 사람이, ‘그러면 저 보관함을 어떻게 열수 있고, 또한 사용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 방법은 ‘기도와 십일조’라고 천사가 대답했다.
천국에도 찾아가지 않은 물건, 휴면계좌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주님은 우리가 이것을 잘 활용하기를 원하신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 기도와 십일조라는 열쇠를 통하여 천국의 보물 보관함을 잘 이용하라는 말씀이다. 금년 한 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소중한 열쇠를 잘 활용하여 천국의 보고(寶庫)를 활짝 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교회도 잘되고, 가정도 잘되고, 삶도 잘될 뿐만 아니라 주님께 생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생업도 잘되기를 바란다.
형통하지 못한 이유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소망이다. 하늘 아버지의 소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두루 잘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부모의 기대와 상관없이 잘못되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식이 있는 것처럼 신자도 그런 신자가 있다.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다. 말라기서는 이런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책망이다. 결국 이것이 형통한 삶을 누리지 못한 이유이다.
첫째는, 부정한 제물(祭物)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1:).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의 양이나 그것을 드리는 횟수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다. 그리고 제사자의 마음은 그가 드리는 예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물로 부정한 떡(7), 눈먼 희생, 저는 것, 병든 것(8), 그리고 믿음과 자발적인 헌신이 결여된 봉사(13), 토색한 물건(13) 등을 드렸다. 정성이 결여된 형식적인 예물을 드린 것이다. 즉 형식적인 예배생활이다.
둘째는, 예배자로서 올바르지 못한 생활이다(2:).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백성들의 부도덕한 생활이다. 제사장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고(8), 올바로 율법을 가르치지 않아 백성들로 율법에 거치게 하고(8), 율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공정치 못하게 판결하였다(9). 백성들 역시 이방인과 결혼을 하고(11), 이혼과 학대 등 문란한 결혼생활(16)과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고 무시하는 행위를 일삼았다(17). 결국 잘못된 예배는 잘못된 생활로 드러난다.
셋째는,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적질이다(9). 예배생활이 잘못되니까 마땅히 드려야 할 예물도 드리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십일조와 봉헌물이다(8). 특히 본문이 강조한 것은 ‘십일조’이다(9). 십일조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 부분은 백성들의 십일조 불이행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한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이라며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신자를 도둑으로 몰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9절에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라는 말씀을 보면, 제사장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십일조 불이행도 문제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는 말라기 시대의 배경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총독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BC445년), 잠시 본국으로 소환되어(BC433년) 자리를 비운 사이이다. 믿음의 사람 느헤미야는 개혁의 선봉에 서서 이방인과 결혼을 피하고 안식일을 지키며(느10:30,31), 십일조와 제사를 성실히 지키도록 하였다(느10:37~39). 그러나 그가 본국에 소환되어 자리를 비우게 되자 십일조와 봉헌물, 안식일 등이 지켜지지 않고, 이방인과 결혼, 제사장과 레위인의 타락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느13:7~31). 그래서 말라기는 이런 일련의 죄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본문에서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백성을 향한 것이다.
내게로 돌아오라!(7)
본문에서 십일조는 형통치 못한 이유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8,9). 동시에 십일조는 형통의 원리이기도 하다. 본문은 이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우선, 십일조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7). 여기서 “돌아오라”(שוב)는 말은 가던 길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완전히 뒤로 돌아서는 것을 뜻한다. 이는 회개란 말과 같은 뜻이다. 회개는 근본적으로 목적과 태도의 변화이지만 이 변화는 반드시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눅3:7~14). 이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되어 형통의 길이 열리게 된다. 그래서 본문은 십일조 생활을 회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고, 또한 형통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특히 본문은 온전하지 못한 십일조 생활을 하나님 것에 대한 ‘도둑질’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십일조의 정신과 관련이 깊다. 만물은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십일조라는 규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물질사용에 대한 권한을 위임해 주셨다. 마치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제외한 모든 것을 허락하신 것과 같다(창2:16~17). 십일조를 제외한 나머지는 임의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님께 내 소유의 1/10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9/10를 받는 것이다. 즉 9/10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런데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사용권한을 위임받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 되고, 권한이 없으면서 하나님의 것을 임의로 사용했으므로 이는 엄연한 권한남용이고 횡령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것은 포괄적 의미의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둑질이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 원리만 기억하면 십일조는 부담스러운 짐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모두 드려야 마땅한 일이지만, 단지 1/10만 드려서 오히려 9/10를 돌려받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것이 바로 십일조 정신이다. 이런 정신을 모르니까 십일조가 짐이 되고, 올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겠는가?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잘되도록,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우리를 잘되게 하고 복이 되게 하는 것이 십일조이다.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보라(10).
또 하나, 십일조는 물질적인 복의 통로이다. 물론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복의 길은 자연스럽게 열린다(神通하면 人通하고, 人通하면 物通한다). 그런데 본문은 올바른 십일조 생활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복을 강조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
도둑질이란 단어만큼 자극적인 단어가 여기에 나온다. “시험”(test)이란 말이다.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이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6:16)는 것인데, 예외적으로 이곳에서만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부분과 불일치한다는 이유로 본문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오류에 근거한 십일조에 대한 주장은 왜곡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주로 십일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 중에서). 하지만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이다. 이는 반드시 그리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여기서 ‘시험’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바한’(בחן)이다. 영어로 ①test ②prove의 뜻이다. 많은 학자들은 본문에서 ‘바한’이란 단어를 ‘test’(시험하다)가 아닌 ‘prove’(입증하다. 확증하다)로 번역해야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test’로 번역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본문의 시험은 히브리어로 ‘나사’(נסה)이다. 이 시험은 부정적인 의미의 시험으로 ‘tempt’(유혹하다)이다. 그렇지만 우리말은 차이가 없으므로 문맥을 통해 구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유혹으로서 시험이 아니니 ‘test’로 번역을 해도 무리가 없고, 오히려 본문의 의미를 잘 살린 표현이다. 물론 십일조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을 왜곡이라고 주장하지만 두 번역 사이에 어감(語感)의 차이는 있지만 내용이나 의미는 같다.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과연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릴 수 있는지 시험하라(test), 혹은 확인하고 확증하라(prove)는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온전한 십일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약속된 복
그렇다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복을 주시는가? 이는 주로 ‘생업에 대한 축복’이다. 먼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쏟아 부어 주신다(10). 이것은 비에 대한 약속이다. 물이 부족한 땅에서 농사와 목축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비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풍족한 양의 비를 내리게 하여 결실을 맺게 해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음은, 열매에 대한 복이다(11). 병충해를 비롯한 온갖 재해를 막아 풍성한 수확을 보장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수고의 대가를 거두게 하시고 그것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땅에 대한 복이다(12). 땅을 기름지게 하여 온갖 채소와 과실이 풍성한 아름다운 곳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십일조를 드린 사람에게 하나님은 흡족한 은혜를 부어주시고, 풍성한 결실과 그것을 충분히 누리게 하시고, 삶과 가정과 일터를 더욱 행복하고 아름답게 축복하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와 같이 축복하시지 아니하나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혹은 축복하신 것을 확인하고 확증해 보라는 것이다).
몇 년 전, 후배 목사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시내 모(某)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고 있는 목사가 자기 담임 목사 이야기를 했다. 자기 담임 목사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십일조를 받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바탕 웃었다. 그렇지만 그 때 저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 목사님의 행동이 자연스럽지는 못하나 참으로 부럽다. 나는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한 번도 못했는데, 집으로 찾아가서 받아오다니.......그 돈을 받아서 당신이 쓸 것도 아니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그 만큼 십일조에 약속된 주님의 복을 확신한 까닭 아니겠나. 교우들에게 십일조의 복을 받게 하고픈 열정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십일조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하여 이런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매일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축복의 순간이 될 것이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부른다. 모든 말씀에는 하나님의 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은 십일조에 축복의 약속을 덧붙여 십일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십일조가 물질적인 축복의 통로, 생업을 잘되게 하는 비결임을 강조한 것이다.
축복의 마중물(calling water)
상수도 시설이 좋지 않던 시절, 펌프를 통해 지하수를 끌어올려 사용하였다(일명 작두샘이라고 함). 그런데 이것은 먼저 물을 한 바가지쯤 붓고 펌프질을 해야 물을 끌어올릴 수가 있다. 그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calling water)이라 한다. 물을 불러오는 물이란 뜻이다. 십일조가 바로 이와 같다. 하나님의 축복을 불러오는 축복의 마중물이다.
누군가 십일조에 대하여 말하기를, 첫째 십일조를 드림으로 자기 신앙이 더욱 확고해 짐을 보고 놀라고, 둘째 자신의 물질생활이 넉넉해짐을 보고 놀라고, 셋째 믿음의 담력이 더하여짐에 놀라고, 넷째 나머지 9/10도 지혜롭고 규모있게 사용할 수 있게 됨에 놀라고, 다섯째 이 축복을 알지 못해 욕심을 부리고 살았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어 놀란다고 했다. 십일조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방법이고, 주님의 것에 대한 사용 인증서와 같다. 특히 주님께서 허락하신 생업을 잘되게 하고, 그것을 누리게 하는 비결이다. 십일조는 신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면서도 순종하는 사람을 잘되게 하고, 복되게 하는 것이다. 십일조 생활을 통하여 이와 같은 주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확증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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