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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063회 작성일 11-01-3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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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게 하는 사람

롬16:3~5

2011. 1/30 08:00, 11:00

치킨게임(chicken game)

국제정치학에서 사용하는 게임이론 중에 ‘치킨게임’(chicken game)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자동차 게임으로, 도로의 양쪽에서 두 명의 경쟁자가 자신의 차를 몰고 정면으로 돌진하다가 충돌직전 핸들을 먼저 꺾는 사람이 지는 경기였다. 먼저 핸들을 꺾은 사람을 치킨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치킨은 ‘겁쟁이’라는 속어로, 명예롭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렇지만 겁쟁이라는 낙인을 피하기 위해서 어느 한 쪽도 핸들을 꺾지 않을 경우 게임에서는 승자가 되지만 결국 충돌하여 둘 다 죽거나 큰 부상을 입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자존심 때문에 서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위험한 게임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만용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깊은 산골 작은 연못에 두 마리의 붕어가 살고 있었다, 사이좋게 살던 이 붕어들이 어느 날 의견이 달라 서로 죽도록 싸웠다. 그 결과 봉어 한마리가 죽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죽은 붕어가 썩어갔고 덩달아 물도 썩어갔다. 남은 한 마리는 별 수 없이 썩은 물을 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 한마리가 없어지면 혼자 편히 잘 살줄 알았던 남은 붕어도 결국 썩은 물을 먹고 마침내는 죽고 말았다. 그 후 그 연못에는 아무것도 살지 못하게 되었다. 자기 살아보겠다고 다른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은 결국 자기 무덤을 파는 것과 다름이 없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들이 주변에서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현재 우리의 남북관계를 포함해서, 지난해(2010년) 말에 있었던 한 제과점 주인이 경쟁업체를 상대로 벌인 이물질 투입사건(소위 ‘쥐식빵’사건)이 좋은 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비록 자기가 손해를 보는 일이 있더라도 상대방을 ‘잘되게’ 하는데 있다. 그리고 삶의 원리는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하면 나도 잘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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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P. Drucker)는 ‘당신은 나중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관을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은 ‘사람들이 목표를 달성하도록 도와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성공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는 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이다. 이익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이 멀어 먹는 음식에까지 나쁜 물질을 첨가하고 동료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에 정말 청량제와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역시 ‘나중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어떤 신자로 기억될 것인가를 생각해야겠다.

 

성경 인물들 중에 이런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다. 애굽과 주변 국가들을 흉년으로부터 구원한 요셉을 비롯하여, 여호수아를 도와 가나안 정복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갈렙,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도왔던 요나단, 신약에서는 자기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안드레, 모두가 꺼려하는 바울을 믿어주고 자신의 사역에까지 참여시켜 결국은 위대한 선교사가 되게 했던 바나바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바울이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문안하라고 기록하고 있는 로마서 16장에 나온 사람들 역시 여러 모양으로 바울의 선교사역에 힘이 되었던 사람들이다. 이 모두는 자기를 기꺼이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되게 했던 사람들이다. 사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모범이 되셨던 삶으로 모든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삶이기도 하다. 이 시간에는 로마서 16장에 나온 사람들 중에서 바울이 아주 인상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브리스가(혹은 브리스길라, 이후 브리스길라로 통일)와 아굴라 부부를 통하여 ‘되게 하는 사람’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Priscilla & Aquila)

아굴라(Aquila)는 아시아의 본도(Pontus)출신 유대인이고,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Priscilla)는 로마의 명문 브리스가 출신이다. 바울이 이들을 처음 만난 것은 2차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 머물고 있을 때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굴라는 이 가문의 노예였는데, 주인의 사랑을 입어 자유인이 되었고 그 가문의 브리스길라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로마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41~54년)가 제위 9년 49년에 유대인의 폭동을 저지하려는 명목으로 ‘나사렛 칙령’을 내려 모든 유대인을 로마로부터 추방령을 내렸다. 이에 아굴라 부부도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바울을 만나게 된 것이 이때(50년경)였고, 이들은 장막을 만드는 사람(tent-maker)으로 생업이 같았기 때문에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행18:1~3). 성경에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고린도에서의 최초 신자들 중에 하나로, 고린도교회의 출발이 이들 가정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행18: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이후 이들 부부는 바울의 선교사역에 좋은 동역자와 후원자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이들 부부는 에베소(52~56년)와 로마(57~64년)에서 자신의 집을 교회모임장소로 제공하였다(고전16:19, 롬16:3~5). 초기 이방인 지역의 여러 교회(최소한 세 곳 이상)가 이들의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부부는 바울 사역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들이다. 힘들고 어려운 복음사역의 여정에서 시원한 냉수와 같은 사람들, 메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와 같은 사람들, 요즈음처럼 추운 날씨에 추위를 녹여주는 난로와 같은 사람들, 넘어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도록 곁에서 굳게 붙잡아 주는 버팀목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이들을 부부에 대하여 두 가지 수식어를 사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이들 부부가 바울의 생애에 어떤 존재였지 짐작해 볼 수 있다.

 

1. 나의 동역자들(3)

사준사구(四駿四狗)라는 말이 있다. 네 마리의 충성스런 준마와 충견이란 뜻으로, 칭기즈 칸을 도와 몽골제국을 건국한 8인의 건국공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준(四駿)은 내정과 전략에서 활동한 인물이고, 사구(四狗)는 전투에서 공훈을 발휘한 인물들이다. 칭기즈 칸이 ‘세상을 얻는데 이 8명이면 족하다.’고 할 정도로 신뢰하고 아꼈던 사람들이다. 실제로 그는 이들의 도움으로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는 동역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이기도 하다. 바둑에 동수상응(動須相應)의 원칙이 있다. 움직일 때는 반드시 서로 호응하라는 것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듯이 이 역시 동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무엇이든 함께 하는 것이 혼자 하는 것보다 낫고 더 효과적이다. 팀(team)이 무엇인지 아는가? TEAM=Together everything accomplishes more 무엇이든 함께 하면 더 많은 것을 성취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로마서는 ‘땅 끝’(서바나) 선교를 위해서 로마교회의 후원을 얻어내기 위한 선교사 바울의 ‘자기 소개서’이다. 그리고 롬16장의 의미는 ‘선교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묵시적으로 외치고 있다. 지금까지 선교사역도 이와 같이 많은 동역자(16장에 언급된 사람들처럼)가 있어서 가능했고, 앞으로의 사역도 많은 동역이 필요하니 당신들(로마교회)이 동역자가 되어 달라는 무언의 호소이다. 그렇다. 바울이 그토록 선교사역을 탁월하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혼자서 한 것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탁월하게 그를 도왔던 인물이 아굴라 부부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이들 부부를 나의 동역자들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성경에 나온 참으로 아름다운 부부로 그들의 동역이 바울과 그의 사역을 잘되게 하였다. 누군가를 되게 하는 첫 번째 비결은 그와 함께 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역이다. 동역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가 버거워하는 것을 같이 나누고 담당해 주는 것이다. 그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해 주고, 기뻐할 때 함께 즐거워해 주고, 힘들어할 때 손을 잡아주고 조용히 어깨를 또닥여 주는 것이다. 외로울 때 찾아가서 기도하면서 격려해 주는 것이다. 사소하지만 이런 일을 통하여 잘 세워지고 잘되게 되는 것이다.

 

2.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 내놓았던 사람들(4)

우리 몸의 기관 중에 암이 생기지 않는 곳이 있다. 심장이다. 심장에 암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①항상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고, ②쉬지 않고 일을 하기 때문이다. 심장은 우리가 잠을 잘 때도, 심지어는 마취를 했을 때도 뛴다. 심장은 보통 1분에 60~100번 정도 뛰게 되는데, 60번만 잡더라도 1시간이면 3,600번, 하루는 86,400번, 1년은 31,536,000번, 70살까지만 계산해도 2,207,520,000번을 뛴다. 이렇게 쉬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에 암세포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건강한 신앙생활, 건강한 교회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신자 상호간에 뜨겁게 사랑하여 사랑의 온도가 높고, 그 사랑에 힘입어 희생과 헌신을 감수하며 열심히 섬기면 암세포와 같은 우리의 신앙을 파괴시키는 치명적인 악한 것들이 생길수가 없다. 사랑과 헌신은 개인이나 교회의 영적 건강의 척도이다. 이단은 영적 암세포와 같다. 이단이 주변에 생기는 것은 신자와 교회의 책임이 크다. 신자와 교회들에게서 사랑이 식어지고, 영적 게으름에 빠진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단에 대한 정죄에 앞서 우리의 사랑 없음을 회개하고, 희생과 헌신을 기피하는 영적 게으름을 회개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아굴라 부부를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 내놓았던”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들 부부가 바울에게 어떤 존재였고, 어떻게 그를 섬겼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는 목숨을 걸고 바울을 구해 주었다는 뜻이다. 사실 바울은 전도 여행 중에 많은 위기를 만나고, 위협을 당했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목숨을 걸고 이런 바울을 그 위기와 위협에서 구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울에게 얼마나 든든한 배경을 되었을까? 얼마나 힘이 되고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었을까? 저는 이 부분을 바울의 심정을 생각하며 읽어보았다. 그 자체가 큰 감동이었다. 지금 바울은 더디오에게 이 편지를 받아쓰게 하고 있다. 이 부분을 말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주체할 수 없는 감동에 그의 음성은 떨리기 시작했고, 그의 눈에는 감동의 눈물이 이슬처럼 맺혔다. 떨리는 목소리로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 말하곤 더 이상을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있다가 겨우 “......내놓았나니”라고 했다. 아굴라 부부는 이렇게 바울에게 큰 감동이 되었던 사람들이다. 우리도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자.

 

또한 이들은 고린도에서도 자기 집에서 바울과 함께 살며 그를 도왔고(행18:3), 에베소에서도 자기 집을 교회로 제공했다(고전16:19). 바울을 위하여, 그의 사역을 위하여 가정을 희생하고 물질을 희생하고 자신들의 삶을 희생한 것이다. 이런 희생을 통하여 바울의 사역이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모든 가치 있는 일은 큰 희생의 결과이다.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가서 보라!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도 그냥 자라지 않는다. 다른 생명의 희생을 딛고 그 자리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굴라 부부의 헌신과 희생이 바울을 잘되게 했던 것처럼 누군가를 되게 하는 일은 반드시 많은 희생과 헌신이 따르는 법이다. 그렇지만 나의 헌신과 희생을 통하여 누군가를 되게 한다면 이 또한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그래서 본문은 아굴라 부부의 이런 헌신과 희생에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감사하게 되었다(4)고 한다.

 

암소 아홉 마리의 가치

사랑의 위대함은 조건없이 받아줄 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는 사람 안에서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꽃을 피우도록 만든다. 아프리카에는 암소를 끌고 가서 청혼을 하는 결혼풍속을 가진 부족이 있다고 한다. 대개는 암소 한 마리면 되었다. 정말 훌륭한 신부감이라 생각되면 암소 세 마리를 주었다. 이제껏 이 부족이 생겨난 후로 암소 세 마리를 받은 처녀는 단 두 사람뿐이었다. 어느 날, 유학까지 다녀온 이 부족의 추장 아들이 암소를 몰고 청혼하러 나섰는데,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자그마치 암소 아홉 마리나 몰고 나섰기 때문이다. 얼마나 대단한 처녀일까 궁금해서 온 부족이 그 뒤를 좇았다. 그런데 막상 그 처녀를 보고 사람들은 놀라고 말았다. 그 처녀는 말라깽이에다가 병약한 외모, 마음까지 심약해서 늘 고개를 숙이고 걷는 여자였다. 부족민들은 미쳤다고 수군댔지만 추장 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암소 아홉 마리를 주고 그 처녀와 결혼하였다.

 

이 이야기는 이 부족과 함께 생활하였던 한 백인 의사가 경험한 것이다. 그 의사는 사정상 본국으로 갔다가 수년 후 다시 이 부족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제 추장이 되어 있는 그 사람 집을 방문한 의사는 그의 아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흑인 여인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아한 자태와 주인의 친절함, 그리고 유창한 영어까지 구사했다. 이 여자가 바로 그때 그 심약했던 처녀였다. 추장은 의아해 하는 의사에게 당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던 자신의 청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 때 저는 제 아내에게 한 마리 암소로도 충분히 혼인승낙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몇 마리의 암소로 청혼을 받았느냐가 평생 자기가치를 결정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자신의 가치를 한두 마리의 암소 값에 한정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처음엔 아내도 놀래는 눈치였지만 그 후로 아내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아홉 마리에 걸맞게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상대방을 ‘되게’ 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라 생각한다. 추장의 사랑이 그의 아내를 있게 하고, 되게 했던 것처럼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있게 하고 되게 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입은 주님의 자녀들로서 서로를 있게 하고 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나 자신이 잘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주님의 존재가 나를 위하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처럼 나의 잘됨도 나를 위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함에 있음을 기억하자.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우리 모두 누군가를 ‘되게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당신 때문에 교회가 잘되고, 일터가 잘되고, 가정이 잘되고, 자녀들이 잘되고, 아내가 잘되고, 남편이 잘되었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칭찬을 듣는 신자, 일꾼, 부모, 자녀, 아내와 남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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