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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Ⅰ, ‘가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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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725회 작성일 11-02-1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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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Ⅰ, ‘가난함’

마5:1~12

2011. 2/13 08:00, 11:00

가난도 ‘스펙’이다!

두 사람이 랍비에게 상담하고자 찾아갔다. 한 사람은 그 고장에서 가장 부자이고, 또 한 사람은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온 부자가 먼저 랍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서 방에서 나왔다. 다음에 가난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면담은 5분 만에 끝났다. 가난한 사람은 언짢은 생각이 들어 랍비에게 항의했다.

 

‘부자와의 면담은 한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 5분 만에 끝났습니다. 이것이 공평한 건가요?’

 

‘진정하세요. 당신은 자신의 가난함을 알고 있었지만 부자는 자신의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기까지 한 시간이나 걸렸답니다.

 

요즈음 ‘스펙’이란 말이 유행이다. 이는 영어 ‘specification’의 줄인 말로 2004년도에 국립국어원에 신조어(新造語)로 등록된 말이다. 특히 구직자나 입시생에게 있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외적 요소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스펙을 쌓는 것도 돈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니 이런 세상에서 가난은 심각한 장애일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가난도 하나의 스펙이 될 수 있고, 또한 스펙이 되도록 해야 한다. 위 이야기는 이와 같은 가난의 유익을 강조한 것이다. 가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 상태를 잘 알게 되었다면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스펙인가! 사실 가난을 유익한 결과로 선용한 예가 많다. 일본기업 내쇼날(National)의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스께(宋下幸之助)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이다. 그는 자신의 성공의 비결을 ‘가난, 허약한 몸, 못 배운 것’이라고 했다. 가난했기 때문(경제적 가난)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고, 몸이 약했기 때문(육체적 가난)에 건강의 소중함을 깨달아 몸을 아꼈고, 못 배웠기 때문(정신적 가난)에 항상 모든 이들을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 데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가난 자체는 미화될 수 없지만 유익도 있다. 특히 신앙 안에서 가난은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하나님의 위로를 맛보게 한다. 본문에서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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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3).

 

심령이 가난한 자란?

왜 팔복인가? 숫자를 통하여 팔복의 성격을 가늠해 볼 수도 있겠다. 성경에서 8이란 숫자는 완전수 ‘7’에 존재의 근원, 통일성, 온전성을 상징하는 ‘1’을 더한 것으로 영적 세계의 완전수이다. 이는 ‘부활’, ‘새 생명’, ‘새로운 질서’, ‘새 출발’, ‘더 높은 차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팔복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질서를 향하여 새로운 출발을 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복이요, 새로운 생명을 소유한 천국의 백성들이 갖게 되는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더 높은 차원의 복이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 복은 나머지 복의 기초가 된다. 심령의 가난이 있어야 애통함이 있고, 심령의 가난이 있어야 온유함이 있고, 심령의 가난함이 있어야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고,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 화평,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가 있다.

 

팔복과 같은 내용이 눅6:20절 이하에 나온다. 흔히 누가복음의 내용을 평지설교(마태는 산상설교)라고 하고, 여기에는 4개의 복만 나온다. 그리고 첫 번째 복에 “심령이”라는 말이 없이 그냥 “가난한 자”로만 되어 있다. 이는 사회적인 약자에게 관심이 많은 누가의 의도가 잘 반영된 것이다. 누가복음은 가난을 물질적인 가난 그 자체, 곧 경제적 결핍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마태복음은 무언가 결핍된 상태라기보다는 천국 백성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두 곳 다 가난이란 단어를 ‘프토코스’(πτώχος)라는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극빈’을 말한다. 아예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그래서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 되는 가난’을 뜻한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전적으로 주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가난이란 히브리어 단어 ‘에비온’(ebyon) 역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가난’이란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단지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뿐만 아니라, 포로된 사람, 묶인 사람, 슬퍼하는 사람, 절망한 사람 등을 다 포괄하는 개념이다(사61:1~). 일반적으로 ‘소외된’ 모든 사람에 대한 총칭이다. 그렇다면 천국백성의 태도로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1. 겸손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유대인 한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양쪽 주머니에 돌을 하나씩 넣고 다녀야 한다. 하나에는 ‘나는 티끌과 재에 불과하다.’라고 새기고, 다른 하나에는 ‘세상이 나를 위해 창조되었다.’라고 새겨 놓아라.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한 개씩 꺼내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삶의 건강함이란 건강한 자의식에서 비롯된다. 건강한 자의식은 자신이 티끌과 재에 불과하다는 ‘겸손’과 세상이 나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높은 ‘자존감’에 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겸손이다. 이렇게 자신의 부족과 결핍,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잘 아는 겸손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이다.

 

본문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겸손한 자를 뜻한다. 특히 시편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란 표현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들이 목적격(‘가난한 자를’, 혹은 ‘궁핍한 자를’)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에서는 경제적인 결핍을 넘어서 ‘겸손한 자’를 의미한다(시72:2,12,13 등). 그래서 어느 독일어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를 ‘arm vor Gott’(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태도를 가진 겸손한 사람을 의미한다.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파산 선고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자신이 티끌과 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기 의와 자만심, 자기 자랑, 생래적인 자질이나 배경을 부정하는 것이다. 주님을 담기 위하여 온전히 나를 비운 것, 주님을 세우기 위해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자기 속에는 죄밖에 없고, 자신의 행위나 노력, 성취를 내세우지 않는 것, 이것이 겸손이다. 신자의 행복은 이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고 주님으로 채워가는 데 있다.

 

‘똑똑한 쥐는 하늘을 나는 새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 대신 깊이깊이 굴을 뚫는다.’는 격언이 있다. 쥐는 아무리 뛰어나도 하늘을 날 수는 없다. 그래서 자기를 아는 쥐는 자기의 안전을 위해 깊이 굴을 판다. 자신의 한계를 알아 허탄한 곳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는 것이 또한 겸손이다. 이 겸손은 천국 백성의 소중한 자질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한다. 천국은 이런 사람의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자기 의를 포기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겸손한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천국의 백성이 될 수가 없다.

 

2. 절대의존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심령의 가난함은 주님께 대한 의존의 태도를 갖게 한다. 가난한 자란 ‘비천하고 무력하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전적으로 주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정의에서 이미 이를 확인하였다. 심령의 가난함은 주님 앞에 자신을 파산 선고하는 것과 같고, 이 토대 위에서 주님을 필요로 한다는 인간의 총체적인 고백이다. 또한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전적인 무능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겸손한 고백이다. 때문에 그는 항상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게 되고, 전폭적인 의존의 태도를 갖게 된다.

 

성경에 두 사람의 기도자가 나온다(눅18:9~14). 한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세리이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바리새인은 함께 기도하러 간 세리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음을 감사드리며(11), 자신의 종교적 열심을 하나님 앞에 자랑처럼 늘어놓았다(12). 놀랍게도 그의 기도에는 자랑만 있지 은혜를 구하는 표현이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자기 의(부요함)에 도취된 사람의 전형이다. 반면에 세리는 성전 한 구석에 서서 감히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가슴만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고 서럽게 외쳤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세리였다(14). 이 사람 세리가 곧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자기 의를 부정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망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간절히 주님의 긍휼을 구하게 되었다.

 

가난의 유익 중 하나가 우리를 겸손하게 하여 주님을 의지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건강할 때는 신앙과 담을 쌓고 살았는데, 병이라고 하는 혹은 사고라고 하는 뜻하지 않는 가난으로 인하여 그 담들이 허물어지고 주님을 찾게 되는 예가 종종 있다. 가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부족과 결핍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가난은 결핍과 부족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만든다. 신자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항상 주님을 찾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목마르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신자의 행복이 있다. 천국의 백성은 주님께 목마르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목이 말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의지하는 사람이고, 천국은 이런 사람의 것이다.

 

3.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가난에 해당되는 한자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 가난할 ‘빈’(貧)자가 있다. 이 글자는 나눌 ‘분’(分)자와 재물을 뜻하는 조개 ‘패’(貝)자로 되어 있다. 가난이란 독차지 하지 않고 누군가와 나누며 사는 것, 그래서 ‘빈’(貧)이 된 것이다. ‘빈 손’(empty hands)이 되는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우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소중하게 여겨온 ‘청빈’(淸貧)의 덕, 혹은 어느 단체가 표현한 것처럼 ‘자발적 가난’이다. 물론 팔복을 ‘선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청빈이니 자발적 가난이니 하는 말은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제자도의 측면에서 보면 가능한 일이다. 자발적 가난은 제자의 삶에서 실천되었던 내용이다(마4:20,22, 눅19:1~10, 행2:44,45). 신자는 반드시 가난하게 살아야한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나눔을 실천하다가 가난해 진 것은 신자로서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러한 삶에 복을 보장하셨다(눅18:27~30). 돈도, 권력도, 지식도,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가난해질 정도로 나누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이미 천국을 경험한 사람이다. 천국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는 실천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위클리프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s)에서 뉴기니(New Guinea)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을 할 때 사랑, 즉 ‘아가페’라는 말을 옮길 마땅한 말이 없어 몹시 고민하였다. 그래서 번역 사역자들이 기도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한 단어를 얻게 되었다. ‘나누망군누’라는 말이다. 이것은 원주민 말로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너에게 주마.’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 마음을 비우고 손을 펼쳐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을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가장 큰 사랑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실천은 심령의 가난에서 나온다. 마음이 겸손하게 낮아지니까 이웃의 아픔과 고통이 보이게 되고, 주님만 의지하니까 자기에게 소중한 것도 기꺼이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의 가난함은 주변을 행복하게 하고, 천국을 확장시키는 소중한 비결이다. 이는 주님께서 몸소 실천해 보이셨고, 그 뒤를 따르는 제자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현실의 적용

윌리엄 바클레이(W. Barclay)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비천하고 무력한 사람으로 주님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이다.’고 했다. 때때로 주님께서 우리를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가난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우리의 교만을 무너뜨리고 우리가 붙잡고 있는 세상 줄을 끊기 위함이다.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주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1요2:16)에 매인 마귀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의(마6:33)를 구하는 주님의 종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팔복은 현실의 부정적인 상황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형태의 ‘가난’은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여 주님만 의지하는 천국의 백성답게 만들어 가는 소중한 자질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고 하였고, 바울도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심령의 가난함은 우리 신자들의 소중한 스펙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복이요, 보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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