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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Ⅱ, ‘애통함’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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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531회 작성일 11-02-21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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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Ⅱ, ‘애통함’①

마5:1~12

2011. 2/20 08:00, 11:00

다이애나 효과(Diana Effect)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라고 한다. 현대인들은 수많은 크고 작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몸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이것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특효약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눈물’이다. 그래서 요즈음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 이 ‘눈물치료’(Tear Therapy)가 유행이라고 한다. 미국의 생화학자 윌리엄 프레이(W. H. Frey II)는 치매를 유발하는 스트레스를 연구하다 눈물이 해독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눈물이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1997년), 영국의 우울증 환자가 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녀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동안 영국인들은 한없이 울었다. 그 뒤 우울증으로 정신과를 찾는 사람이 반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다이애나 효과’(Diana Syndrome)라 부른다. 그녀의 죽음으로 시작된 눈물이 개개인의 마음에 쌓였던 스트레스, 분노, 아픔을 씻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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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엄마의 품과 같은 교회

국내에도 암 전문의 이병욱 박사가 쓴「울어야 삽니다.」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많은 암환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치유과정을 통해서 그가 최종 터득한 것이 바로 ‘눈물 치료법’이라고 했다. 그는 ‘가장 정직하게 눈물을 흘리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며, ‘모든 것을 토해내듯 울어라.’라고 말한다. 가슴 속에 맺힌 슬픔과 한을 눈물에 담아 펑펑 쏟아내야 몸 안의 독소가 뿜어져 나와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분노, 화, 미움, 슬픔과 같은 덜어내야 할 일들을 참고 외면할 때 가슴 속에 쌓인 감정은 독소가 되고 몸의 생기마저 빼앗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웃음을 파도에 비유한다면 눈물은 해일이다.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는 상처들을 완전히 끌어올려 쓸어내지 않으면 마음에 병이 생기고, 이것은 곧 몸의 병이 된다.’

 

눈물을 흘리면 면역항체가 두 배 이상 증가하면서 암세포를 억제하거나 감소하게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울음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사용하는 의사소통의 방법이다. 따라서 잘 울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세상에 다시 나갈 힘이 생긴다. 남자가 여자보다 수명이 짧은 이유 중 하나가 덜 울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고된 시집살이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마음 놓고 울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친정엄마의 품이었다. 엄마 붙잡고 실컷 울고 나면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다 사라졌다. 그 힘으로 시집살이를 이겨냈다. 현대인의 불행은 마음 놓고 울 곳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겉은 화려하나 속은 다 문드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교회에 대한 멋진 정의를 하나 만들었다. ‘교회는 친정엄마의 품과 같아야 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오늘은 팔복의 두 번째 내용이다. 이는 눈물과 관계된 복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예수님의 눈물

세상살이에는 울 일이 참 많다. 배가 고파서 울고, 배가 아파서도 울고, 사랑 때문에 울고, 이별 때문에 울고, 부모(자식) 때문에 울고, 남편(아내) 때문에 울고, 외롭고 서러워서 울고, 아프고 힘들어서 울고, 살림이 쪼들려서 울고.......그런데 이 눈물이 바로 이 한 많은 인생을 건강하게 버티게 한 힘이다. 화가 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 화가 삭고, 슬픈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 위로를 받고, 고통받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 그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다. 이웃의 불행을 보고 함께 우는 사람의 그 눈물은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용기를 준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고, 남을 위해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그 영혼을 옥토로 바꾸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눈물의 사람이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눈물에 대한 이야기가 세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오라비를 잃은 나사로의 두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피 우는 모습을 보시며 흘리신 눈물이다. 이것은 위로의 눈물, 동정의 눈물이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남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여기며 흘린 사랑의 눈물이다. 두 번째는, 멸망당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흘리신 눈물이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로 인한 자기 백성들의 비참함을 내다보시며 우셨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의 눈물, 애민의 눈물이다.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흘리신 눈물이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면서 통곡하셨다. 이는 인류 구원을 위하여 쏟으신 사명의 눈물이다.

 

무엇을 위한 눈물인가?

그가 흘린 눈물로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그 눈물 속에 그 사람의 열정과 소원과 추구하는 가치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눈물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충분히 공감하시는 분, 누구보다도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시는 분, 사명에 목숨을 거셨던 분이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메시야로 오실 주님에 대하여 ‘많은 고통을 겪어서 우리의 슬픔과 비통함을 아시는 분’(사53:3)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친히 그러한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애통”이란 헬라어 단어 ‘펜데오’(πενθεω)는 ‘처절한 극단적인 슬픔’을 뜻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몸부림치며 우는 것을 의미한다(창37:34).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큰 슬픔’이다. 우리 말 중에도 ‘단장’(斷腸)이란 말이 있다. 이는 창자가 끊어졌다는 뜻이다. 이 말이 나온 유래가 있는데, 옛날 중국의 진나라가 촉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왔다. 그러자 어미가 슬피 울면서 100여 리를 뒤따라왔다. 이를 보다 못한 병사가 새끼를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어미가 새끼를 안더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고 말았다. 이를 이상히 여긴 병사들이 그 어미의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새끼를 잃은 슬픔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다. 이것이 애통이다. 이렇게 늘 우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자는 살아가면서 이렇게 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현재분사).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울어야 하는가? 이는 내 자신을 위한 것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시간은 내 자신을 위한 것만 생각해 보려고 한다.

 

거룩한 삶을 위한 통회의 눈물

1984년 세상을 떠난 기독교 철학자 프랜시스 쉐퍼(F. Schaeffer) 박사가 있는데, 그 분이 말년에 암이 걸렸다. 암과 혹독하게 싸우면서도 자기가 사랑했던 젊은이들에게 설교하기 위해서 캠퍼스로 나갔다. 그는 최후의 메시지를 토하듯 외쳤다.

 

‘여러분 행복을 삶의 목표로 갖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신자도 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행복을 삶의 목표로 갖습니다. 그것은 신자가 구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행복은 구하지만 거룩함은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신자의 목표는 행복한 삶이 아니라 ‘거룩한 삶’이다. 종은 종소리를 내야하고, 피아노는 피아노 소리를 내야하듯이 신자는 말로, 행동으로, 삶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이스라엘에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고 명령하셨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목적이고,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불러 자녀가 되게 하신 목적이다. 사실 산상수훈의 목적도 제자들의 거룩한 삶에 있다. 사도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를 부르신 이가 거룩하니 우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벧전1:15). 그런데 이 거룩한 삶의 출발은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에서 출발한다. 통회의 눈물에서 시작이 된다.

 

신앙이란 자신이 절망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줄까?’(롬7:24)란 외침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자기에 대하여 절망감을 가지고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없다.’(롬7:18)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자기 몸 안에 치명적인 종양을 발견하고도 놀라거나 울지 않는 것은 인지능력이 없는 바보거나 삶을 포기한 사람,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사실 종양보다 더 무섭고 치명적인 것이 죄이다. 종양은 우리의 육신만 무너뜨리나 죄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는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고, 그 절망감은 애통함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윗은 죄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절망적인가를 가장 깊이 경험한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통회의 눈물을 많이 쏟았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시38:4~6)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시38:18).

 

다윗이 이토록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이를 슬퍼하면서 몸부림쳤기에 용서의 기쁨을 경험할 수가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간음에 살인까지 저지른 그를, 후대 사람들이 감히 ‘성군’(聖君)이라 부른 것도 그의 회개의 눈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거룩한 삶은 죄를 짓지 않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깊이 아파하며 회개하는 것이 거룩한 삶의 출발이고, 회개의 생활을 통하여 완성이 된다. 죄의식이 얼마나 철저하고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다루느냐에 따라 신앙의 질과 수준이 달라진다. 그래서 본문은 작은 죄라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처럼 애통함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로써 주님을 닮는 거룩한 삶으로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햇빛만 쏟아지는 곳은 사막이 된다.’는 격언이 있다. 당연하다. 비 없는 곳은 필연적으로 사막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눈물이 없는 인생은 사막이다. 신앙도 눈물을 통과하지 않은 신앙은 하나의 값싼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애통이 우리 신앙을 본질로 향하게 만든다. 눈물이 우리 믿음을 본질로 인도한다. 눈물고인 눈에 십자가의 주님이 보인다. 부활의 주님이 보이고, 부활의 영광이 나타난다. 애통하는 마음만이 찾아오시는 주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성경도 젖은 마음, 젖은 눈으로 대할 때 수많은 보배를 내놓는다(A.W.토저).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란다. 우리 인격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성숙해 지는 것이다. 애통함은 은혜의 주머니이다. 죄에 대한 애통함이 클수록 주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담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지기를 열망하며 죄에 대한 깊은 애통함을 갖자. 아직도 여전히 형편없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 애통함을 갖자. 지금 형편이 어떠하든지 우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다. 우리가 흘린 눈물은 결코 헛되게 끝나지 않는다. 성경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고 하였다. 눈물에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따른다는 말씀이다. 본문 역시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찾아오도록 명령을 받은 천사가 있었다. 그 천사는 하나님께 드릴 귀중한 것을 찾느라 세상을 두루 다녔지만 안타깝게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살그머니 그가 꿇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 사람은 자신을 죄로부터 구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주님께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천사는 손뼉을 치면서 외쳤다.

 

‘옳지, 이제야 찾았다!’

 

천사는 황금으로 만든 상자에 그 사람의 눈물을 담아서 하나님께로 가지고 갔다. 천사가 이 땅에서 찾은 가장 귀한 보석은 사람들이 흘린 회개의 눈물이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 것은 우리의 눈물이다. 죄를 슬퍼하며 거룩한 삶을 위하여 흘린 통회의 눈물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 하시리이다.”(시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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