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眞福八端)Ⅱ, ‘애통함’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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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559회 작성일 11-03-06 16:23본문
진복팔단(眞福八端)Ⅱ, ‘애통함’②
마5:1~12
2011. 3/6 08:00, 11:00
눈물을 마시는 새
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독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식성이 각기 다른 새가 있었는데 이들 중 가장 오래 사는 새는 피를 마시는 새이고, 빨리 죽은 새는 눈물을 마시는 새라고 한다. 왜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빨리 죽을까? 눈물의 역할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눈물은 감정적인 긴장에 의해서 생긴 화학물질을 몸 밖으로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W. H. FreyⅡ). 강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안에 미움, 증오, 슬픔, 분노, 염려와 같은 화학물질이 생기고, 이들이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 이와 같은 화학물질을 만들어내는 스트레스를 씻어내는 것이 눈물이고, 이런 눈물을 마신 새가 오래 살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실 이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해로운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그런데 눈물이 그 해로운 스트레스의 해독제라는 말이다. 특히 죄를 슬퍼하는 회개의 눈물은 우리 영혼 속에 깊이 박혀있는 죄의 쓴 뿌리를 뽑아낸다. 애통은 영혼의 고통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이다. 그래서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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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치유하는 약
한 청년이 눈병으로 괴로워하다가 병원을 찾았다. 진찰을 한 의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눈에 살인적인 병균이 들어가 머지않아 실명되고, 그로 인하여 생명도 위험하다고 했다. 그리고 눈은 실명되더라도 생명을 건지려면 당장 수술해야한다고 했다. 청년은 절망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날 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찾은 그는, 교회바닥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 자신에게 이런 병이 걸린 것이 원망스러워서 울고, 어둠속에서 살아야 할 답답하고 절망적인 앞으로의 삶 때문에 울고, 지금까지 보낸 세월이 후회스러워서 울었다. 이렇게 울고 또 우는 동안 회개의 문이 열려 모든 것을 철저히 회개하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눈이 퉁퉁 부었다. 그렇지만 마음은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그는 다음날 가벼운 마음으로 의사를 다시 찾았고, 수술에 앞서 그의 눈을 검사하던 의사가 깜짝 놀랐다. 그토록 심하게 번졌던 독균이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그의 뜨거운 회개의 눈물로 죄라는 영혼의 독균이 사라지자 육체의 균도 사라진 것이다.
애통하며 눈물을 흘릴 때 상처받은 영혼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눈물은 영혼을 치유하는 약이다. 그리고 영혼이 치유되면 육체도 회복이 된다(3요:2). 자신의 죄와 허물, 연약함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용서와 회복, 거룩한 삶을 선물로 주신다. 자식의 눈물을 외면하는 부모는 없다. 자녀 울음에는 부모의 마음을 끓게 하는 힘이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의 눈물에 약한 분이시다. 지난 시간에는 자신의 거룩한 삶을 위한 애통함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었다. 오늘은 다른 사람을 위한 애통함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영혼을 위한 애통함
김용환 형제님이 교회는 ‘종합병원’이라는 말을 자주하는데, 적절한 표현이다. 사실 교회의 본래 모습은 병원 ‘응급실’에 가깝고, 신자는 ‘구조대원’이다. 생명을 다루는 가장 치열한 현장이 교회이고, 그 중심에 신자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생명을 향한 외침, 안타까움, 눈물이 철철 넘치는 곳이고, 신자는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고자 발을 구르며 눈물을 쏟는 사람이다. 사실 예전엔 교회와 신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우는’ 사람들로 기억이 되었다. 자신의 죄를 위하여,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새벽마다 울었다. 그래서 그 눈물이 교회의 담을 넘어 끝없이 주변으로 흘러넘쳤다. 그야말로 교회는 눈물의 향기, 기도의 향기가 그윽한 곳이었고, 신자들은 눈물의 사람들이었다. 이 시대에 우리 신자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영성이 있다면 그것은 ‘눈물의 영성’이다.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에 우리의 귀를 기울려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교회와 신자가 이런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곧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교회들을 보라! 생명을 향한 외침이 있는 응급실보다는 안락한 ‘쉼터’를 지향하고, 신자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구조대원보다는 고상하고 교양 있어 보이는 ‘상담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제 교회 안에서는 눈물의 향기, 기도의 향기보다는 그윽한 방향제와 커피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얼마 전에 손봉호 교수가 ‘한국교회,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회’라고 한 비판은 이 현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주님은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기관으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고, 이를 위한 사명을 신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러니 신자와 교회는 무엇보다도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하고, 영혼을 위한 애통함이 있어야 한다. 영혼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요4:34~36), 주님의 명령이다(마28:18~20).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눅15:7).
동물사랑실천협회가 찍은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보았다. 정말 끔찍했다. 돼지들의 울부짖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마지막 날에 있을 지옥의 참상을 보는 듯 했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한 일을 앞두고 있는 영혼들 앞에서 침묵만 하고 있는 제 자신이 주님 앞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주변에 지옥을 향하여 미끄러져가고 있는 영혼들이 많다. 아직도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 중에는 내 자녀도 있고, 부모도 있고, 남편(아내)도 있고, 친구도 있고, 형제도 있다. 그들 영혼의 부르짖음 들을 수 있는 귀, 그 영혼이 당하는 고통을 볼 수 있는 눈,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갖자.
기도의 성자로 불리는 조지 뮬러(G. Muller)는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사건만 무려 50,000가지라고 한다. 그런 그가 가장 긴 시간(52년 동안) 드렸던 기도는 5명의 친구를 위한 기도이다. 그가 친구들을 위해 기도를 시작한지 1년 6개월 만에 첫 번째 친구가 예수님을 믿었고, 5년이 지난 후 두 번째 친구가 믿었다. 12년 만에 세 번째 친구도 믿게 되었으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친구는 여전히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 설교를 하던 날, 그의 설교를 들은 네 번째 친구가 주님을 영접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한 친구가 주님께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뮬러가 ‘52년 동안 기도를 했지만 완전한 기도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에 마지막 친구가 왔다가, 그가 자신을 위해 52년 동안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울면서 주님을 영접하였다. 그리고 그는 가는 곳마다 ‘뮬러의 기도는 모두 응답되었습니다. 제가 그 최후의 응답입니다.’고 간증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한 기도보다 더 크고 위대한 사랑은 없다. 이를 위해서 흘린 눈물보다 고귀한 것은 없다. 그리고 영혼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라야 응답을 받을 수가 있는데 잃어버린 영혼을 위하는 것만큼 확실한 주님의 뜻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흘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눈물, 그것은 그의 영혼을 위한 눈물이다. 영혼의 구원을 위한 애통이다. 주님은 우리의 애통함을 들으시고 그를 향하여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이다. 주변에 나의 눈물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자!
2. 자녀를 위한 애통함
서울대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암 전문의 원종수 박사가 한때 병들고 가난하고 소망이 없어서 서울대 옥상에 올라가 자살하려고 했다. 막 뛰어 내리려고 하는데 뒤에서 ‘종수야’하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자살을 포기했다고 간증하였다. 「찔레꽃 그 여자」의 저자 박순애 전도사도 마찬가지다. 자살하려고 할 때, 어머니의 음성이 가로막아 끔찍한 일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했다. 믿는 사람도 삶이 너무 힘들고 지치면 (결코 해서는 안되지만)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품게 되는 위기에 놓일 수가 있다. 하지만 이때 자식을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부모는 그 자식을 살린다. 비록 부모가 그 자리에 없을지라도 말이다. 부모가 뿌려놓은 눈물의 기도가 자식의 생명을 살리고, 장래를 결정한다.
기독교 사상가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다. 그는 젊은 날 크게 방탕하여 어머니의 큰 근심거리였다. 하지만 회개하여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 배후에는 어머니 모니카(Monica)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가 있었다. 그녀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아들를 위해 무릎이 닳고 눈물이 강을 이루도록 기도했다. 그랬더니 방황하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아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그녀는 주님을 믿게 된 아들을 붙잡고, ‘전에는 내가 오래 살아야할 이유가 있었지만, 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이제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자식의 구원에 모든 것을 걸었음을 잘 보여 준다. 어거스틴은 이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도하는 부모가 있는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되었다.
부모된 우리에게 흘려야 할 눈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을 위한’ 눈물이다. 물론 자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면류관이고(잠17:6), 하나님의 기업이고(시127:3), 부모의 가장 큰 관심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잘되고, 공부 잘해서 출세하고, 건강하고 성실하여 남부럽지 않게 잘사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보람이자 소망이다. 그러니 부모에게 자녀는 눈물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무엇보다 자식의 영혼에 관심을 갖고, 이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자녀들이 주님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삶도록 눈물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모든 것을 다 갖추었고, 다 가졌어도 믿음이 없으면 그것은 한갓 사상누각(沙上樓閣)일 뿐이다. 자녀를 위하여 애통하는 부모, 특히 자녀의 영혼을 위하여 애통하는 부모가 되자. 눈물로 키운 자식, 젖은 가슴으로 기른 자녀는 반드시 주님이 돌보신다(창21:14~21, 막7:24~30, 눅7:11~18).
꽃
-안도현
바깥으로 뱉어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몸속에 있기 때문에 꽃은 핀다.
솔직히 꽃나무는
꽃을 피워야한다는 게 괴로운 것이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
이것은 터뜨리지 않으면 곪아 썩는 못난 상처를
바로 너에게 보내는 일이다.
꽃이 허공으로 꽃대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다. 꽃대는
꽃을 피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을 세차게 흔든다.
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은 것이냐.
몸속의 아픔이 다 말라버리고 나면
내 그리움도 향기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살아남으려고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안에 가득 고인 피
뱉을 수도 없고 뱉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꽃은 핀다.
꽃을 피우기 위한 꽃나무의 사명과 고충, 괴로움을 표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유(사명)가 있고, 그것을 이룸에는 피를 토하는 아픔과 고통, 눈물이 따르기 마련이다. 꽃나무는 꽃을 피워야 할 사명이 있고,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렇게 고통스럽게 꽃을 피우는 꽃나무를 보며 사랑의 아픔을 상실해 가고 있는 자신을 탄식한다. ‘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은 것이냐. 몸속의 아픔이 다 말라버리고 나면 내 그리움도 향기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세상의 모든 값진 일은 아픔과 고통, 눈물을 동반한다. 그러니 아픔, 고통, 눈물이 없는 곳에는 값진 일도 없는 것이다. 어쩐지 시인의 탄식이 저와 우리 교회의 모습 같아 크게 공감이 된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신자와 교회의 소중한 사명이다. 이를 위해선 피를 쏟는 아픔과 고통, 눈물이 필요하다.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은 부모의 소중한 사명이고 책임이다. 이 또한 피를 쏟는 아픔과 고통, 눈물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참으로 책임 있는 신자, 그리고 부모라면 젖은 눈, 젖은 가슴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부끄러움 없는 신자로 부모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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