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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Ⅱ, ‘애통함’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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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177회 작성일 11-03-1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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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Ⅱ, ‘애통함’③

마5:1~12

2011. 3/13 08:00, 11:00

낙타의 눈물

이어령 님의 「지성에서 영성」이란 책에 사막을 연상케 하는 동물 낙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낙타는 유목민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동물이다. 사람과 무거운 짐을 싣고 나르는 운송수단은 물론 젖과 고기 그리고 기름 등 식량으로써 큰 도움을 준다. 그러니 낙타는 유목민들에게 소중한 재산이다. 그래서 낙타가 새끼를 낳는 것은 유목민들에게 경사였다. 그런데 간혹 출산의 고통으로 새끼를 낳아놓고 돌보지 않는, 모성애가 없는 낙타가 있다고 한다. 새끼가 죽게 생겼는데도 젖은 물론 가까이 오면 발로 차 얼씬도 못하게 한다. 결국 버림받은 새끼는 죽고 만다. 그런데 몽고사람들에게는 옛날부터 이런 매정한 어미의 모성애를 찾아주는 비법이 있다고 한다. 몽고민속악기 중에 마두금(馬頭琴)이라는 현악기가 있는데, 이것을 연주하면서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낙타를 쓰다듬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낙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결국에는 모성애를 되찾아 제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정을 들여 잘 키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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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비유는 공관복음서에 모두 다 나온다. 그런데 유독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이 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눅8:6). ‘습기가 없다’는 표현이다. 바위에 떨어진 씨가 죽었다. ‘습기가 없기 때문’이다. 습기는 생명유지에 절대적인 요소이다. 습기가 있어야 부드러워 진다. 부드러워야 품을 수 있다. 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자꾸 마음에 습기를 제공해야 한다. 감동을 받아야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한다. 깨진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옥토가 된다. 세상에는 출산의 고통 때문에 모성애를 잃어버린 낙타처럼 살면서 상처 때문에 눈물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간혹 있다. 사막처럼 메마른 가슴으로 세상을 원망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눈물이 마르면 마음도, 인생도 마르게 된다. 눈물이 회복되면 마음이 회복되고, 인생도 회복된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눈물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눈물을 회복시켜주는 사람,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인생에 강이 흐르고, 풀과 나무가 자라고, 꽃과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삶, 풍성한 삶이 되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눈물을 잃어버린 시대

무책임, 무관심, 무감각(무감동), 이 ‘삼무’(三無)가 이 시대의 특징이라고 한다. 이런 시대를 대변하는 적절한 비유가 성경에 나온다. 예수님은 당시 세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7:32).

 

즐거워하면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것이 건강한 사람, 건강한 사회, 건강한 관계의 모습이다. 그런데 피리를 불고 곡을 해도 아무런 반응도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말씀이다. 우리 시대의 특징도 이 한 절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시대, 그래서 무감각(무감동)하고 무책임한 시대가 되었다. 때문에 공감(共感)능력을 잃어버린 정서 장애자들이 속출한 것이다.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사이코패스’(Psychopath)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한 마디로 ‘감정이 없는 사람’이란 뜻이다. 자신의 일에 대한 죄책감이나 상대방의 고통과 슬픔을 느끼지 못하기에 끔찍한 일을 일상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정서적 공감능력을 상실하면 결국 이런 잔인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다. 모든 면에서 옛날보다 더 좋아졌고, 발전했고, 풍성해졌는데 사람의 마음과 관계는 더욱 황폐해졌다. 눈물을 상실한 까닭이다. 물론 현대인도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것은 가식적인 ‘악어의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필요와 이익을 위해서 울뿐, 자신의 부족과 죄 때문에 이웃의 영혼과 유익을 위한 눈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돌짝밭 같은 심령, 사막 같은 가정, 황무지 같은 교회와 사회, 돌처럼 굳어진 모든 관계들을 어떻게, 무엇으로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을까?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공감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눈물이다. 애통함이다. 눈물에는 정서적 공감을 갖게 하는 힘이 있다. 울면 가까워지고 울면 하나가 된다. 울면 찡하게 통하게 된다. 지금까지(두 번의 설교)는 주로 눈물의 내용(무엇을 위하여 울 것인가?)과 유익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렸는데, 이 시간에는 ‘눈물의 회복’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눈물의 회복을 위하여

사람은 배고파 죽는 것이 아니라 외로워서 죽는다. 병들고 힘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해서 죽는다. 힘들어도 더불어 힘들면 괜찮고, 고통스러워도 더불어 고통을 당하면 괜찮다. 태산 같은 문제도 더불어 함께하면 가벼워지고, 한 겨울 칼바람도 누군가 함께 있으면 훈풍처럼 따뜻하게 느껴 진다. 사람은 사소한 것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사소한 것으로 힘을 얻기도 하고, 힘을 잃기도 한다. 주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리라 하다가도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고 무너진다. 평생을 남을 위해 헌신하리라 다짐하다가도 사소한 오해로 정신을 잃는다. 이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서로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눈물에는 이런 힘이 있다. 눈물은 그 자체가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저 말없이 울기만 했는데,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눈물이다. 그래서 주님은 애통을 지복(至福)으로 선언함과 동시에 그곳으로 나아가는 방향지시표(성품)로 제시하신 것이다. 그렇다. 애통은 신자가 지녀야 할 소중한 ‘성품’이다.

 

십자가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최루액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으로 눈물을 회복할 수 있을까? 신자는 이미 눈물의 비법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눈물샘을 터뜨리는 최루액와 같다. 십자가는 생각만 해도 신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눈가에 눈물을 맺히게 한다. 바라볼수록 가슴을 젖게 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죄의 심각성을 보게 하고,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인 죄인인가를 알게 한다. 또한 죄에 대한 용서를 기억나게 하고, 죄 때문에 죽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신자의 눈에는 항상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눈물이 있고, 가슴에는 십자가 보혈의 시냇물이 흐른다. 찬송가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찬송가 143장 4절)

 

그래서 경건한 신자의 공통점은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를 생각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을 살았다.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했고, 또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라고 선언했다. 주님과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집중하는 삶을 살겠다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다. 때문에 바울은 평생 젖은 마음과 젖은 눈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심령은 주님의 은혜로 충만하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에 대한 고백이 철저해 짐이 이를 증명한다(고전15:8~9, 엡3:8, 딤전1:15).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이고, 은혜가 충만한 사람의 특징이다. 이는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 부족함, 죄를 바라보는 눈물의 삶을 살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십자가는 눈물의 렌즈이다.

또한 십자가는 세상을 눈물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눈물의 렌즈’와 같다. 왜 주님의 은혜가 깊은 경건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을 위하여 통곡의 사람이 되는지 아는가? 그의 눈에 눈물의 렌즈가 있기 때문이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보니 울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바로 눈물의 렌즈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 온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자신의 죄와 더불어 이웃의 죄, 세상의 죄가 보인다. 그 죄를 위하여 피흘리신 주님이 보인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울 수밖에 없다. 바울이 자신의 일생을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데 몽땅 드릴 수가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십자가에 집중하는 삶, 십자가라는 눈물의 렌즈를 가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웃을 위하여 울지 않을 수가 없고, 죽어가는 그들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영혼을 구하는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영적 사역은 눈물의 사역, 통곡의 사역이다(삼상6:12). 울어야 하고, 울면 된다. 그러기 위해선 눈물의 렌즈를 가져야 한다.

 

십자가가 앞에 엎드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이웃에 대하여 잃어버린 눈물을 회복하는 길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바라보는 것이다. 그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그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다. 그러면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 감동의 눈물, 영혼을 위한 사랑의 눈물을 회복할 수가 있다. 지난 수요일(9)부터 교회절기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었다. 사순절이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절기, 그 고난에 동참하여 실천하는 절기이다. 우리 모두 이 절기에 더욱 주님의 십자가에 집중하여 애통함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네눈박이 물고기 아나브랩스(Four eyed fish Anableps)

아마존 델타지역에 아나브랩스라는 네눈박이 물고기가 있다고 한다. 이 물고기의 눈은 개구리처럼 크고 튀어나와 있고 정수리에 위치해 있다. 실제로 이 물고기의 눈이 네 개가 아니라 한 개의 눈에 다른 두 개의 상을 망막에 맺게 해서 네 개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네눈박이’라고 부른 것이다. 양쪽 눈이 각각 물 밖 부분과 물속 부분으로 기능이 나뉘어 있어 양쪽을 다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물밖에 있는 눈으로는 수면 위의 곤충을 잡아먹고, 물속에 있는 눈으로는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노리는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물고기는 눈에 수분을 공급하는 눈물샘이 없기 때문에 물밖에 내놓은 눈을 수시로 물속에 담근다. 오랜 시간 물밖에 있으면 눈이 메말라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아나브랩스는 주기적으로 물속에 눈을 담가 메마른 눈을 충분히 적시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래야 시력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촉촉해져야 보인다. 촉촉해져야 일을 한다. 촉촉해져야 열매가 있다. 메마른 눈으로 바라보니 세상이 안보이고, 미래가 안보이고, 이웃이 안보이는 것이다. 귀가 메마르고 마음이 메마른 까닭에 이웃의 아픔과 고통,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항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애통의 샘, 통곡의 샘에 잠겨야 한다. 잠겨야 회복이 된다. 잠겨야 보이고, 잠겨야 들리고, 잠겨야 느낄 수가 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통곡과 눈물(히5:7)이었다. 그래서 정확히 보고, 듣고, 공감하는 삶을 사셨다. 눈물샘이 터진 사람이 능력의 사람이요,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삭막한 사회를 살고 있다. 사회가 메마르니 사람들이 살 희망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눈물샘이 터지면 사막이 옥토가 된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펑펑 울어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눈물을 회복시키는 사람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한 것은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관심과 사랑, 눈물이다. 세상을 진동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물의 사람이다. 나를 위하여 진심으로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붙들고 울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고, 마음껏 울 수 있는 곳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런 사람, 교회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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