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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Ⅲ, ‘온유함’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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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210회 작성일 11-03-2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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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Ⅲ, ‘온유함’①

마5:1~12

2011. 3/20  08:00, 11:00

모루와 모루채

‘모루채가 모루를 두들기나 모루 한 개에 모루채는 여러 개 망가진다.’는 옛말이 있다. 모루는 대장간에서 쇠를 불릴 때 받침으로 사용하는 쇳덩이고, 모루채는 달군 쇠를 모루 위에 놓고 메어칠 때 사용하는 쇠메이다. 모루는 맞기만 하고 모루채는 때리기만 하지만 망가지는 것은 모루가 아니라 모루채이다. 참나무는 결이 강하여 바람에 휘어지지 않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면 꺾어지거나 뿌리 채 뽑힌다. 그러나 갈대는 약한 바람에도 휘어질 만큼 연약하지만 심한 바람에도 꺾이거나 뽑히는 일이 없다. 그렇다면 부드러운 가죽과 면도칼 어떤 것이 강할까? 물론 면도칼이 강하다. 하지만 면도날을 세우려면 보들보들한 가죽에 문질러야 한다. 부드러운 가죽이 강한 면도날을 마모시킨다.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사람, 사리에 밝고 똑똑한 사람이 잘되고 잘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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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중심인물이었던 히틀러, 무솔리니, 처칠을 풍자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이들 세 명이 연못에 있는 물고기 잡기 내기를 했다. 먼저 히틀러는 권총을 뽑아 발사했다, 하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맞추지 못했다. 무솔리니는 연못에 들어가 맨손으로 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고기가 너무 빨라서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렇지만 처칠은 연못의 물을 퍼내고, 고기를 잡았다. 처칠이 승리를 했다. 부드러움의 승리를 강조하는 이야기이다. 세상은 힘의 논리를 강조한다. 힘 있는 자만 살아남고, 힘 있는 자가 지배하고, 힘 있는 자가 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힘이 있어야 한다고 외치고, 힘을 가지려고 안달이다. 하지만 성경은 다르게 말씀하고 있다. 다같이 5절 말씀을 외워보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을 받을 것임이요.”

 

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고, 그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나 애통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처럼 이 역시 역설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결국은 세상이 성경의 말씀대로 된다는 점이다. 성경이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나 더 현실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현상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는 힘 있는 사람들이 잘되는 것처럼, 더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궁극적인 승리는 온유한 사람에게 있다. 이는 역사와 사물에 대한 약간의 통찰력만 가져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은 세 번째 지복, 온유한 사람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길들여 짐

여기서 온유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러한 뜻과는 다르다. 주변에서 자신의 욕망, 이기심, 명예심, 혈기,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고 살면서 그것을 정의, 용기, 적극성, 솔직함 등으로 미화시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또는 소심함, 두려움, 나약함 등을 양순이나 온유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본문이 말씀하는 온유는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온유를 헬라어로 ‘프라우스’(πραυς)라고 하는데, 이 단어가 사용된 예를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온유의 올바른 뜻을 가늠해 볼 수가 있다.

 

첫째, 어떤 사람이 병을 앓아 고열로 고생하는데, 치료 덕분에 그 열이 잡혔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제 괜찮다’는 말 대신에 ‘프라우스’라고 했다.

둘째, 돌풍을 만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와중에 갑자기 바람이 잠잠해졌다. 그러면 말하기를 ‘이제 바람이 잠잠하다’는 말 대신 ‘프라우스’라고 했다.

셋째, 야생마를 길들이기 위하여 훈련을 시킨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서 야생마가 길 들여졌을 때, ‘이제 온순해졌다’는 말 대신에 ‘프라우스’라고 했다.

 

이 세 가지 경우의 공통점은 힘이 조절되었다는 것이다. 무언가에 의해서,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 길이 잘 들여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씀하는 온유는 하나님께 길들여진 것,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길들여진 사람을 뜻한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물리적 정신적인 힘이 하나님에 의해 잘 조절되어 그의 인격 속에 구현되는 것이 온유이다. 여기서 길들임이란 강압이나 억압, 공포에 의한 굴종이 아니다(이것이 온유에 대한 오해이고, 온유를 평가절하고 있는 이유).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이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왕자에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난 너에게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될거야!’라고 한 것처럼 길들여진다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길들여진다는 것은 주님께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 두고 보기도 아까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길들여져야 쓰임을 받는다.

통제되지 않은 힘은 위험하나 통제된 힘은 유용하다. 금번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과 해일, 원전의 사고에서 이를 절감하고 있다. 잘 다스려진 핵(核)에너지는 인간생활에 공헌이 크다. 그래서 핵이 석탄과 석유에 이어 제3의 에너지로 각광을 받는 것이다. 문제는 안전성의 확보인데, 다스려지지 않은 핵은 인류에게 심각한 재앙이 된다. 지금 세계의 이목이 일본에 집중된 것은 지진이나 해일보다도 통제되지 않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 때문이다. 잘 다스려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고, 배를 띄우고, 전기를 만들고, 논밭을 기름지게 만든다.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가 물과 관련이 있음은 익히 아는 사실이고, 강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이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다스려지지 않는 물은 금번 일본에서처럼 주변을 폐허로 만든다. 불도 마찬가지다.

 

고(故) 정채봉 님의 생각하는 동화에 〈코뚜레가 일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농부의 어미 소가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다. 송아지가 자라 코뚜레를 할 때가 되자, 맏이 송아지가 농부에게 자기에게는 코뚜레를 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였다.

 

‘주인님. 코뚜레를 해야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은 낡은 생각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코뚜레를 하지 않으니 일을 곱절로 잘한다는 말을 제가 듣고 말테니까요.’

 

농부는 맏이 송아지의 말을 듣고 아래 송아지한테만 코뚜레를 하였다. 맏이 송아지는 코뚜레 없이도 멍에를 지고 쟁기를 끌었다. 코뚜레를 한 아래 송아지가 지쳐 쉴 때도 더욱 힘을 내어 달구지를 끌었다. 송아지도 어느덧 어미 소가 되었다. 코뚜레를 하지 않은 맏이한테 차츰 꾀가 늘었다.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했고, 잡으러 오는 농부를 뒷발로 차주기도 했다. 어느 날 코뚜레를 한 아래 소가 들에서 돌아와 보니 맏이가 없었다. 어디 갔냐고 묻자 주인이 말했다.

 

‘도살장으로 보냈지.’

 

짐승이나 도구도 길이 들여져야 사용할 수가 있다. 사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자기 습관이나 태도, 자신의 뜻과 감정, 가치관, 비전, 열정 등 이런 모든 것들이 주님께 길이 잘 들여져야 한다. 그래야 주님께 요긴한 존재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다. 물론 여기서 ‘무엇에, 그리고 누구에게 길들여져야 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여기서 이 문제는 생략).

 

광야는 길들여짐의 장소, 시련은 길들임의 방법

성경에는 온유하지 못하여 자기에게 허락된 생의 몫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야곱의 형 ‘에서’이다. 그는 이삭 가문에서 장자로 태어났으나 스스로의 조급함, 경솔함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주님께 길들여져 주님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육체적인 욕망, 원한, 충동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고, 그 결국은 비참함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길들임의 과정’이 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이나 유업을 이를 자녀가 없었고, 이삭은 주변 사람들의 시기를 받아 몇 번이나 쫓겨서 이사를 다녀야했다. 야곱은 20여 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고, 요셉은 애굽에서 10여 년을 노예생활을 했다. 모세는 40년 동안 살인범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어 광야에서 목동생활을 했다. 다윗도 10여 년을 사울 왕을 피해 도피생활을 했고, 바울 역시 예수님을 믿은 후 자기 고향과 아라비아 사막에서 거의 10년의 세월을 허송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들이 하나님께서 이들을 사용하시기 위하여 길을 들이는 훈련과정이었다. 철저하게 자기 생각, 자기 뜻을 하나님 앞에서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인간적인 모든 방법과 습관, 태도,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께 길이 잘 들여진 온유한 사람은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주님이 원하시는 때에 행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온유는 내 마음대로 성질대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사람에 의해서 길들여지고 다스려진 상태이다.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훈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고, 그 과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병이라는 광야, 시련과 시험이라는 광야, 사건과 사고라는 광야, 환난과 핍박이라는 광야, 실패라는 광야, 실직이라는 광야 등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쓰심에 합당한 사람으로 길들이기 위해서다. 쇠뭉치 그대로는 아무 것도 만들 수가 없다. 그것을 풀무에 담금질을 하여 녹여야 한다. 완전히 녹여야 수저도 만들고, 젓가락도 만들고, 그릇도 만들고, 잔도 만들고 무엇이든 만들 수가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광야를 통하여 길이 들여져야 한다. 모든 사극(史劇)에 두루 통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맹자(孟子)의 다음과 같은 글귀다.

 

天將降大任於是人也(천장강대임어시인야)신대

必先苦其心志(필선고기심지)하며

勞其筋骨(노기근골)하며

餓其體(아기체부)하며

空乏其身(공핍기신)하야

行拂亂其所爲(행불란기소위)하나니

所以動心忍性(소이동심인성)하야

曾益其所不能(증익기소불능)이니라.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그 뼈와 근육을 수고롭게 하고, 그 육체를 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궁핍하게 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힘들고 어지럽게 한다. 이로써 마음을 분발하게 하고 성질을 참을성 있게 하여 일찍이 할 수 없었던 일을 능히 감당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만들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고난은 하늘의 섭리라는 것이다. 그렇다. 믿음 안에선 모든 것에 뜻이 있다. 아무리 사소한 것도 주님의 세밀한 계획하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주님이 하신 일은 우리에게 항상 복이 된다(롬8:28). 최소한 시련의 광야는 우리를 길들여 가시는 주님의 손길이다.

 

Melt me!......

주보 앞면에 영어로 된 표어 Melt me!(녹이소서!) Mold me!(조성하소서!) Fill me!(채우소서!) Use me!(사용하소서!)는 우리를 온유한 주님의 사람으로 길들여 가는 과정이다. 주님은 먼저 우리를 무너뜨린 다음 원하는 모양으로 다시 조성하시고, 거기에 주님께서 필요로 하신 것들을 채우셔서, 원하시는 일에 사용하신다. 이 모든 과정을 위해 고난은 필수과목이고, 광야는 최고의 학교인 것이다. 이 과정을 성실히 이행한 사람에게 온유라는 성품의 졸업장을 얻을 수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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