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眞福八端)Ⅲ, ‘온유함’②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진복팔단(眞福八端)Ⅲ, ‘온유함’②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779회 작성일 11-03-27 19:13

본문

진복팔단(眞福八端)Ⅲ, ‘온유함’②

마5:1~12

2011. 3/27 08:00, 11:00

온유는 물과 같다.

금번 일본에서 일어난 해일을 통하여 인간의 첨단과학과 기술을 한순간에 초토화시켜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물처럼 부드러운 것이 없지만 또한 물처럼 무섭고 강한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세월이 지나면 바위도 뚫는 것이 물이다. ‘물칼’이란 게 있다. 미세한 구멍으로 초고압의 물을 쏘아 쇠를 절단하는 첨단기술이다. 산소절단기나 레이저절단기보다 더 효과적이고 절단면도 섬세해 많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물은 소리없이 스며든다. 흐름을 막아버리면 물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돌다가 틈이 있으면 그곳으로 흘러간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옹벽(擁壁)을 치고 막아도 물은 보이지 않는 틈 사이로 스며든다. 세상에 스며드는 것을 이길 것은 아무도 없다. 스며드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젖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의 이와 같은 성질로 인하여 노자(老子)는 ‘최고선은 물과 같고,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上善若水, 水善利物)고 했다. 또한 물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 형태가 바뀐다. 하늘로 올라가면 구름이 되고, 땅에 떨어지면 비가 된다. 추우면 눈이 되고 얼면 얼음이 된다. 끓이면 수증기가 된다. 흐르다 막히면 돌아가고 부딪히면 튕겨준다. 그렇지만 물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하늘에 올라가고 땅속에 스며들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형체가 완전히 바뀌어도 본질적 속성을 잃지 않는다. 온유가 바로 이와 같다. 온유한 사람은 주변에 스며들어 소리없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어떤 상황에든지 기꺼이 자신을 거기에 맞추지만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주변을 항상 이롭게 한다. 이 시간에는 물과 같은 사람, 즉 온유한 사람의 특징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주님께 길들여 진 사람의 특징

그러면 주님께 길들여진 사람, 온유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논어(論語)에 공자(孔子)의 인품을 보여주는 말로 공자가 끊고 살았던 네 가지(子絶四)가 나온다.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가 바로 그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이와 같다.

 

첫째, 제멋대로 생각하지 않는다(毋意).

무의는 자의성(恣意性)이 없다는 뜻이다.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자기 뜻대로 기분대로 성질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이것을 자유로, 혹은 소신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고, 소신이 아니라 방탕이다. 성경은 사사시대의 실패를 ‘자의성’에다 두고 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18:1, 19:1, 21:25). 이는 자기가 중심이고, 율법이고, 왕이었다는 뜻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자의성이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을 세우기 위해 나를 무너뜨리고, 부인하고, 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이 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원인이 자의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6:2). 그 결과,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 있는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창6:11,12).  

 

백도기 목사의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이란 책에 나온 이야기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등산을 하게 되었다. 등산에 앞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돌을 하나씩 들고 올라가자고 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큼직한 돌을 주어 들었고, 가룟 유다는 작은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무거운 돌을 들고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는 베드로를 보며 유다가 ‘그렇게 큰 돌을 들고 갈 이유가 어디 있느냐’며, ‘머리가 미련하면 손발이 고생을 한다.’고 비웃었다. 정상에 도착하자 주님은 자기가 가져온 돌을 의자삼아 앉으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자기가 가져온 돌을 의자삼아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다는 작은 돌멩이라 그 위에 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참 말씀을 증거하신 주님은 자신의 돌을 들고 일어서라 하시곤 기도를 해주셨다. 그러자 돌이 빵이 되었고, 시장하니 그것을 먹으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배불리 먹고 남았지만 유다는 한입도 되지 않았다. 베드로와 유다의 영성의 차이, 성품의 차이, 그래서 베드로가 수사도가 되고 유다가 배신자가 된 이유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결국 이것은 삶의 기초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이다. 유다는 자의성에 두었고,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두었던 것이다. 주님께 길들여진 온유한 사람은 베드로처럼 주님의 말씀과 뜻에 삶의 기초를 두고 살아간다. 초기 경건한 신앙인들은 ‘볼렌테 데오’(Volente Deo)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이는 ‘주님의 뜻이라면’이란 뜻으로 그들의 삶의 원리였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자신도 기뻐하고, 주님이 싫어하는 일은 자신도 싫어한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생각, 자기 뜻, 자기 판단, 자기 성질을 내려놓은 사람, 대신 주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을 삶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다.

 

둘째, 기어이 자기주장을 관철하지 않는다(毋必).

‘사오정 시리즈’에 나온 이야기이다. 한사람이 ‘나 콜라!’ 했더니, 다른 사람이 ‘나도 쥬스!’ 했고, 또 다른 사람이 ‘그럼 여기 커피 셋이요.’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주문받는 사람이 ‘미안하지만 홍차는 안파는데요!’라고 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앉아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통하는 것이 없는 답답함을 풍자한 유머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걸까? 상대방의 말에 귀를 막고 자기생각 자기주장만 이야기한 까닭이다. 이것이 어쩌면 요즘 우리네 일상의 다반사를 시사해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왜 세상이 혼란하고 관계들이 엉망인지, 그 이유를 시사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필은 기필(期必)이 없다는 뜻이다. 자기주장만 관철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가끔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펼치는 사람을 본다.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교조적(敎條的)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자기주장이 강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자기주장은 건강한 인격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주장을 반드시 관찰시키려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싫건 좋건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살기 때문에 상호협력을 깨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덕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느 소설가는 나쁜 사람이란 ‘나뿐인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만이, 자신의 의견과 주장만이 절대라고 생각하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결국은 독선(獨善)과 아집(我執)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진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 영원한 반려자인 겸손과 함께 할 수 없다. 독선과 아집은 관계의 암이다. 이것은 신앙인들이 가장 빠지지 쉬운 죄이다. 수많은 종교전쟁이나 교파분열의 배후는 독선과 아집이 자라잡고 있다. 온유한 사람에게는 기필이 없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주장이 분명하나 독선과 아집이 없다. 물처럼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맞춰주면서 스며든다. 그래서 주변을 변화시킨다.

 

셋째,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毋固).

갓 시집온 고집이 센 며느리가 생선을 굽고 있었다. 한쪽만 계속 태우는걸 보다 못한 시아버지가 한 마디 했다.

 

‘얘야, 고기를 뒤집어 굽지 않고 한쪽만 그렇게 태우고 있냐?’

 

‘아버님, 그냥 두세요. 지가 뜨거우면 돌아눕겠죠!’

 

공자는 나이 육십을 ‘이순’(耳順)이라고 하였다. 귀가 순해진다는 뜻인데, 어떤 소리를 들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이다. 즉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라는 뜻이다. 넓은 도량과 삶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큰 산은 흙덩어리도 사양하지 않고(泰山不讓土壤), 큰 강은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는다(河海不擇細流). 그래서 큰 산이 되고, 큰 강이 되는 것이다. 집단이건 조직이건 생명체건 간에 사라진 것들의 공통점은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변화에 소극적일 때 급격하게 몰락하게 된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사람은 나이가 들면 대체로 고집이 더 세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고집은 나이를 먹고 내놓은 독한 배설물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보나 상황에 유연하게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화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다보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심사가 발동하여 과거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집만 늘게 되는 것이다. 고집은 정신적인 죽음이다.

 

여기서 무고는 고집(固執)을 부리지 않는 것을 뜻한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삶의 태도, 변화에 능동적인 자세를 뜻한다. 잘 길들여진 사람, 온유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 ‘유연성’이다. 고집이 없고 개방적이고 능동적이다. 길이 잘 들여진 소는 일곱 살짜리 꼬마도 다룰 수가 있다. 가라하면 가고, 서라하면 선다. 이쪽으로 가자하면 이쪽으로, 저쪽으로 가자하면 저쪽으로 간다. 그러나 길이 들지 않은 소는 장정도 다루기가 힘들다.

 

넷째, 사사로움을 가지지 않는다(毋我).

‘설탕사원’이란 신조어가 있다. 자기 밖에 모르고 사회 적응력이 부족한, 회사를 망치는 신세대 무개념 사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스포일드 어덜트’(spoiled adult)란 말도 있다. 이는 말 안 듣고 버릇없는 아이를 뜻하는 ‘스포일드 차이드’(spoiled child)에서 유래한 신조어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인성에 문제가 있는 어른을 뜻하는 말이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이다.

 

무아는 사기(私己)를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사롭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는 이번 일본의 지진과 관련하여 이는 자신들의 아욕(我欲)에서 비롯된 천형이라면서, ‘아욕을 쓰나미를 이용해 한번 씻어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욕이란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것이다. 무아는 이 아욕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이 아욕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낙원을 상실한 것도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고(창3:5), 바벨탑으로 세상이 나뉘어 인간들이 흩어지게 된 것도 하늘까지 닿을 수 있는 대를 쌓아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는 욕심 때문이었다(창11:4). 온유한 사람은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아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온유란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께 길들여지는 것, 그 주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욕의 바벨탑은 주님 앞에서만 무너지고, 주님만이 무너뜨릴 수가 있다. 주님께 길들여진다는 것은 아욕 덩어리인 나를 무너뜨리고 주님을 세우는 일이다.

 

舍己從主, 捨己爲主(사기종주, 사기위주)

‘사기종인’(舍己從人)이라는 말이 있다. ‘나를 버리고 남을 좇는다.’는 뜻이다. 제멋대로의 생각이나 의견(意), 자기주장(必), 고집(固), 이기적인 자기욕심(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본받아 자신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그래야 남을 위하여 나를 버릴 수가 있다(捨己爲人). 그렇다면 어떻게 ‘사기종인’할 수 있을까? 그것은 주님께 길들여지는 것이다. 주님께 길이 잘 들여진 온유한 사람만이 ‘사기종인’할 수 있다. 아니 나를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고(舍己從主), 주님을 위하여 나를 버릴 수가 있다(捨己爲主).

 

성경은 주님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온유의 모델로 말씀하고 있다(마11:29). 주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오셨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주님의 최대 관심이었다(毋意).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지만 그것을 사용하지도 주장하지도 않으셨고(毋必),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죄에 빠진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셨다(毋固). 결국은 아무런 죄도 없으시면서 죄인들에게 정죄를 받아 극악한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다. 주님은 주님 자신을 위해 단 한 방울의 물도, 피도 남기지 않고 우리를 위해 다 쏟으셨다(毋我). 온유란 이와 같은 주님의 삶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처럼 살고, 주님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사기종주’(舍己從主)하고, ‘사기위주’(捨己爲主)할 수가 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께 길들지는 과정이다. 우리 모두 주님께 길이 잘 들여진 온유한 사람이 되자. 그래서 ‘사기종주’(舍己從主)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 ‘사기위주’(捨己爲主) 주님을 위하여 나를 버리는 사람, 그리하여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사람이 됩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