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眞福八端)Ⅲ, ‘온유함’③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진복팔단(眞福八端)Ⅲ, ‘온유함’③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132회 작성일 11-04-03 17:42

본문

진복팔단(眞福八端)Ⅲ, ‘온유함’③

마5:1~12

2011. 4/3  08:00, 11:00

다들 그렇게 한단다.

한 아버지가 여섯 살짜리 아이를 옆자리에 태우고 운전을 하다가 신호위반으로 교통경찰에게 걸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차를 세우고 면허증과 함께 만 원짜리 한 장을 살짝 감추어 건네줬다. 아이가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괜찮다, 얘야. 다들 그렇게 한단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이의 삼촌이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는지에 대해 아버지와 함께 의논하고 돌아갔다. 옆에서 의아해하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괜찮아, 세금 제대로 냈다간 남는 게 없어. 다들 그렇게 해!’

 

아이가 어른이 되어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런데 큰 횡령사건을 저지르고 감옥에 수감되고 말았다. 면회를 온 아버지가 말했다.

 

‘이놈아, 넌 도대체 누굴 닮은거냐! 왜 가르치지도 않은 짓을 했단 말이냐!’

 

그러자 아들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버지. 다들 그렇게 해요. 전 재수가 없어서 걸린 것뿐이에요.’

 

어쩐지 남 이야기 같지가 않다. 이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녀와 가족, 주변에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들, 특히 신앙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부모는 자녀의 인생에 이정표와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서로 그런 존재이다.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에게 길(기준)이 될 것이라.’(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는 어느 선사의 말이 정말 실감이 난다. 나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고, 위로와 격려, 용기가 될 수도 있다. 모쪼록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의 통로, 곧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

이 시간에는 온유한 자에게 약속된 복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다같이 5절 말씀을 외워보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는 온유한 자가 누리게 될 복으로 시37:11에 대한 인용이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악인이 득세(得勢)한 것 같으나 결국은 온유한 자들이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서 평화를 풍성하게 누리며 살리라는 말씀이다. 본문에서 주님은 이 말씀을 예언의 언어로 새로운 복을 선언하신 것이다.

 

여기서 ‘땅’은 믿는 사람들이 장차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현세적이고 지상적 의미의 땅이 아니라 종말론적이고 영적 의미의 땅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온유한 자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사66:22, 계21:1)에 들어가서, 그 땅을 기업으로 얻어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천국은 온유한 사람의 ‘몫’이고, 온유한 사람이 천국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자녀만이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고유한 축복이다. 여기에는 온유한 삶의 중요성과 온유한 사람으로 길들여지는 과정에서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팔복은 현재 부정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온유한 삶의 현실적인 복

물론 온유한 사람의 복이 종말론적(미래적)이고 영적인 것이지만 현실 적용도 가능하다. 성경에서 땅이나 밭은 사람의 마음을 상징한다(마13:4,19). 따라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는 자명한 사실이다. 폭력적이고 살의가 가득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만나면 마음을 닫고 두려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고, 얻게 된다. 여기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의미를 두 가지 생각해 볼 수가 있다.

 

1. 관계에서 승리한다.

우화적(寓話的) 표현으로 20c는 ‘개미’시대이고, 21c는 ‘거미’시대라고 한다. 개미(蟻)가 근면과 성실의 상징이라면 거미(蜘)는 관계의 상징이다. 거미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줄을 통해 먹고 사는 곤충이다. 인터넷의 ‘www’는 world wide web의 머리글자를 딴 것인데, 세계에 널리 깔린 거미줄이란 뜻이다. 거미처럼 세계도 지금 거대한 거미줄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는 관계의 중요성을 어느 때보다 강조하고 있다. 즉 관계지수(Network Quotient)를 중요시하는 네트워크 시대이다. 주변 사람과의 관계유지를 통해 그들과 잘 소통하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얻은 자원으로, 보다 더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이 관계지수가 높을수록 성공할 확률도 높다. 현대사회에서 관계성을 고려하지 않는 성공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카네기공대에서 실패한 1만 명의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전문지식이나 기술이 부족해서 실패했다는 사람은 불과 15%였고, 85%가 관계의 장애를 실패의 원인으로 답했다(※드보라와 삼손).

 

지난 주일에 온유한 사람의 특징을 ‘자의성이 없고’(毋意), ‘독선과 아집이 없고’(毋必), ‘고집이 없고’(毋固),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毋我) 사람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의(意), 필(必), 고(固), 아(我)는 관계를 망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없다는 것은 관계의 모든 장애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고, 온유한 사람이 관계에서 승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관계의 복은 온유한 사람에게 보장된 주님의 복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렇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온유한 사람에게 사람이 모이고, 온유해야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관계에 성공할 수가 있다.

 

2. 선한 영향력을 갖는다.

인도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맥스웰(G. Maxwell)은 주님을 닮기 위해 힘썼던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영향력을 주변에 미치는 삶을 살다가 주님 나라로 갔다. 인도는 지방 언어가 많은 나라이다(공식 언어만 15개, 1,600여 개의 방언). 맥스웰이 한번은 한 힌두교도에게 어떤 지방 말을 배우고 싶어서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그가 정중하게 거절을 하는 것이다. 몇 번을 얘기해도 자꾸 거절을 했다. 그래서 사례비를 준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주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선교사님과 함께 있으면 제가 기독교인이 되고 말 것이란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그래서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맥스웰은 전도 안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말만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으나 그가 이렇게 말했다. ‘안됩니다. 선교사님과 함께 있으면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영향력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함께 있으면 물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자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와 신자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주변에 선한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이 싫은 게 아니라 교회가 싫고 신자가 싫어서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봐야할 내용이다. 신자는 자신이 믿는 바를 삶으로 보여줌으로, 그 영향력을 주변에까지 미치는 사람이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고, 간수장이 복을 받고, 애굽의 바로 왕과 그의 나라가 복을 받고, 천하가 복을 받은 것처럼 신자인 나로 인하여 주변이 복을 받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랬다. 성경을 보면, 더둘로라는 사람이 바울을 고소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고 했다(행24:5). 무슨 말인가? 바울에게는 주변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이 있다는 뜻이다. 즉 그의 영향력이 탁월해 주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제 동천에 나가서 돌을 하나 주어왔다. 이 돌이 처음부터 이렇게 매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울퉁불퉁 각이 지고 거칠었을 것인데, 오랜 세월 흐르는 물에 의해 이렇게 매끄럽게 다듬어진 것이다. 새삼 물의 힘과 영향력을 느낀다. 온유한 사람이 곧 물과 같다. 그에게는 사람을 마음에 품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온유한 사람에게 이런 복을 주셔서 영향력 있는 삶을 보장해 주신다. 그래서 삶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복된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야베스의 기도

구약성경에 야베스란 사람이 있다. 그의 어머니가 극심한 해산의 고통을 통해 얻었기에 ‘슬픔’, ‘고통’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삶이다. 고통과 슬픔을 짊어진 삶, 이것이 야베스의 운명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자신의 운명을 멋지게 역전시켜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 즉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 비결은 오직 그의 기도에 있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

 

여기서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라는 그의 기도는 땅의 경계를 넓혀 달라, 부요하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복의 간구가 아니다. 가나안 땅은 지파와 가문과 가족에 따라 하나님께서 분배를 해주셨기 때문에 ‘임의로’ 그 경계를 옮길 수가 없다. 그러니 이것을 땅의 경계를 넓혀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관계와 영향력’으로 해석해야 한다. ‘관계의 폭을 넓혀주시고, 두루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는 그의 형제보다 존귀한 자가 되었다.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본문 역시 온유한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어 관계의 폭이 넓어지고, 주변에 두루 영향력 있는 삶을 살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무튼 사람마다 좋은 만남, 좋은 관계를 소원하고, 영향력 있는 삶을 갈망한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다. 항상 기도하는 내용이고, 날마다 소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소리를 지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싸워서 쟁취하는 것도, 힘쓰고 애써서 얻는 것도,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특히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사람에게 주어진 복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론 야베스처럼 주님께 기도하여 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사람이 되어 이 소중한 복을 받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34 / 29 page

설교말씀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