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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Ⅳ, ‘주리고 목마름’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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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710회 작성일 11-04-1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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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Ⅳ, ‘주리고 목마름’①

마5:1~12

2011. 4/10 08:00, 11:00

애간장만 타는 세상

주변에서 돈을 손에 넣기 위해 안달하는 사람, 쾌락을 찾아 밤낮없이 헤매는 사람, 명예와 권력을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을 본다. 모두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1요2:16)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들 중에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혹시 가졌다 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만족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또한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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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탄타루스 왕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신과 같이 되고 싶은 욕망에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제우스의 음식을 훔쳐 먹었다. 그래서 그는 그 죄로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갈증과 만족을 모르는 배고픔의 고통을 받게 되었다. 제우스는 고통을 한층 더 높이기 위해 그를 목까지 잠기는 물속에 세워두었다. 그 물은 목이 말라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면 줄어들었고, 머리 위에는 즙이 많은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으나, 배가 고파 따 먹으려고 손을 내밀면 위로 쑥 올라갔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도 마실 수도 먹을 수도 없는 고통을 평생토록 겪어야 했다. 이것이 곧 온갖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 신화에서 ‘텐터라이징’(Tantalizing)이라는 영어 단어가 생기게 되었는데, ‘감질나게 하는’, ‘애간장을 태우는’이란 의미다.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고통을 한 번 상상해보라.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르는데 얼마나 안달이 나겠는가? 얼마나 감질나겠는가? 사람들이 쉬지 않고 추구하는 이 세상 것들이 다 이런 것이다. 연기처럼 아무리 붙잡아도 남는 것이 없고, 아무리 먹고 마셔도 만족이 없다. 본문(네번째 복)은 이와 같이 만족이 없고 애간장만 태우는 세속적인 것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에서 돌아서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에 대하여 주림과 목마름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다같이 6절 말씀을 외워보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주리고 목마름

주림과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것은 ①(생물학적으로)살아있다는 증거이고,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죽은 사람에게는 주리고 목마름이 없다. 그토록 식욕이 왕성했던 사람도 죽으면 한 방울의 물도 한 톨의 밥알도 원치를 않는다.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제일 먼저 식욕이 떨어진다. 속이 더부룩하고 입맛이 없다. 하지만 건강한 사람은 식욕이 왕성하다. 강한 주림과 목마름이 있기에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그저 없어서 못 먹고, 안줘서 못 먹는 것이지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②(정신적으로)자신의 결핍, 곧 부족을 안다는 뜻이다.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지혜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건강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교제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요즈음 아랍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결핍과 부족을 안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간절함, 사모함, 갈망이 바로 여기서 생기고, 일에 대한 강한 의욕과 동기도 여기서 생긴다. 그러므로 주림과 목마름은 삶의 중요한 태도이다.

 

결핍을 뒤집으면 꿈이 된다.

야곱은 타고난 차남의 운명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굳어진 판 뒤집기를 감행한 혁명가였다. 당시 장자권은 기득권 중의 기득권이었다. 그는 장자권에 대한 강한 결핍이 있었다. 장자의 축복에 대한 강한 주림과 목마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결핍을 뒤집으면 꿈이 되고 목표가 된다. 그는 형, 에서의 장자권을 공격했다. 허기진 틈을 노려 팥죽 한 그릇에 형에게서 장자권 매입을 시도하였고(창25:27~34), 눈 먼 아버지를 속여 장자축복을 가로챘다(창27:). 더욱 중요한 것은 얍복 나루터에서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축복을 받아냈다(창32:24~32). 모두가 장자권, 즉 장자축복에 강한 목마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배고픈 사자가 사냥하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 그러므로 결핍을 강하게 느끼고, 그 결핍을 위대한 목표로 승화시키자!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때때로 주님께서 우리를 시련의 광야에 던지신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주님께서 쓰시기에 편리하도록 우리를 ‘길들이시기’ 위함이고, 또한 우리 안에 주림의 폭, 갈증의 폭을 키워서 ‘강한 결핍’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잔잔히 흐르는 물에 돌을 던지면 사방으로 물이 튀어 오르고, 파장이 일어나면서 물의 흐름이 격해지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시련의 돌, 환난의 돌, 실패의 돌, 질병의 돌을 던지신 것이다.  

 

흔히 누구는 ‘~에 미쳤다.’라는 말을 한다. 이는 그것에 목마르다, 혹은 그것에 푹 빠졌다는 뜻이다. 이렇게 주림과 목마름이 크고 강할수록 성취의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했다. 미쳐야(狂) 미칠 수 있다(及)는 뜻이다. 그림에 미쳐야 좋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공부에 미쳐야 위대한 학자가 되고, 음악에 미쳐야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있다. 강한 주림과 목마름을 가진 사람만이 인생의 성취를 경험할 수 있다.

 

조선중기 이징(李澄)이라는 화가가 있다. 그의 아버지(李慶胤)도 화가였는데, 아들이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화가가 되는 것은 반대했다. 그림을 잘 그려도 대접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는 어린 아들을 잃어버렸다. 사방을 찾았지만 찾지를 못하다가 사흘 만에 다락방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아이에게 매를 때렸고, 아이는 매를 맞고 울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찍어 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런 아이의 모습에 감동한 아버지가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하여 훌륭한 화가가 되었다. 조선시대 유명한 서예가 최흥효(崔興孝)라는 이가 있다. 과거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는데, 시제(詩題)의 답을 쓰는 중 한 글자가 중국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글씨와 똑같게 써졌다. 평소에 수백 번 연습을 해도 잘 써지지 않던 어려운 글자가 오히려 왕희지보다 더 잘 썼다. 그는 자기가 쓴 글자에 도취되어 과거시험을 치루는 것도 잊고 그것을 종일 품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 역시 글씨에 미쳤기에 훌륭한 서예가가 된 것이다.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는가?

아무튼 주림이나 목마름은 ‘가난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인가 부족하고 없으니까 가난하니까 결핍을 느끼니까 주림이 있고 목마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3)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깊은 관련이 있다. 전자는 가난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가난함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이것이 그 사람됨을 결정하고, 나아가서 신자됨을 결정한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그토록 주리고 목말라야 하는가? 그것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일반적으로 ‘의’란 ‘사람이 지켜야할 옳은 도리,’ ‘옳은 행위’를 뜻한다. 즉 옳고 바른 것을 통틀어 ‘의’라고 한다. 그렇다면 옳고 바른 것이 무엇인가? 그 기준이 무엇인가? 이것은 시대와 상황, 나라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면 의 역시 시대와 상황, 나라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 특히 본문이 말씀하는 ‘의’는 무엇인가?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는데, 복음이 곧 예수님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해야 한다. 주님의 보혈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주님의 말씀, 주님의 능력, 주님의 은총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주님의 거룩함에 목마르고, 주님의 영광에 목마르고, 주님의 축복에 목말라야 한다.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 주님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 주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일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주리고 목말라야 할 ‘의’이다.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해야 할 ‘의’이다. 이런 사람에게 배부름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

퇴보의 시작은 교만이고 진보의 시작은 주림이라는 말이 있다. 주림과 목마름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주 중요한 태도이다. 이것이 없으면 영적 건강함과 풍성함을 누릴 수가 없다. 주림과 목마름은 영적 건강과 성숙의 척도이다. 그래서 주님은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우리가 크게 주리고 목마르기를 원하신다. 여기에 나온 ‘주리다’는 단어, ‘목마르다’는 단어를 살펴보면 이를 이해할 수가 있다.

 

‘주리다’는 말을 헬라어로 ‘페이나오’(πειναω)라 한다. 단순히 시장기를 느낄 정도의 배고픔이 아니다. 먹을 것을 찾아 생명을 걸고 국경을 넘고 있는 북한 사람들처럼 사생결단의 배고픔이다. 그리고 ‘목마르다’는 ‘딥사오’(διψαω)이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을 때(1995.7), 285시간 만에 세 젊은이가 극적으로 구조되었는데 그들이 외친 첫 마디가 ‘물 좀 주세요.’였다. 생사의 기로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그들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이 물이었다. 물외에는 아무 것도 바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이다. 주님은 이와 같은 주림과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동사는 진행의 의미를 가진 ‘현재분사’로 되어 있다. ‘계속성’을 가리킨다. 계속적으로 갈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림과 목마름이 강할수록 클수록 깊을수록 영적으로 건강하고 성숙한 사람이다. 더 큰 은혜, 더 큰 사랑, 더 큰 복을 받는 비결이다. 주림과 목마름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 복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주림과 목마름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의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이런 강한 주림과 갈증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다(다윗의 생애에서 확인할 수 있음).

 

시마(詩魔) 증후군

‘시마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중기의 문인 최연(崔演)이 「축시마」(逐詩魔)란 글을 남겼는데, 그는 시마가 자신에게 온 뒤 나타난 증세를 이렇게 쓰고 있다.

 

‘네가 오고부터 술에 취한 것 같고, 바보가 된 듯 멍하게 신음하며, 구슬퍼하여 한 병부(病夫)가 되고 말았다. 네게서 벗어나고자 일 년 내내 애를 썼다. 네게서 떠나고자 산에 올라가면 너는 어느새 나를 따라 노닐고, 바다로 들어가면 너는 나를 찾아내는구나. 사물을 만나면 눈길을 쏘아보아 취함이 많아도 그만두지 않았고, 내 이목의 총명함을 빼앗아가서 나의 보고 들음을 어지럽게 하였고, 머리가 쑥대가 되어도 빗질하지 않으며, 마음이 오만하여 허물을 불러들이고, 기림도 뭇사람의 뒤에 있고, 꾸짖음은 다른 사람의 앞에 있게 하니, 나를 굶주리게 하고 나를 빈한하게 하는 것이 또한 네가 불러들인 것이다.’

 

길을 가면서도 시 생각, 심지어 꿈속에서까지도 시 생각뿐인 것. 시 밖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지는 증세, 예의도 염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하는 증세, 눈에 띄는 사물마다 허투루 보지 않고 거기에 담긴 비밀을 찾아내고야 말게 하는 증세가 이른바 시마 증후군이다. 소위 ‘시 귀신’에 붙잡힌 것인데, 시에 대하여 이렇게 미칠 만큼 목마른 사람이라야 시인이 된다는 것이다. 시뿐 아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림에 미쳐야 좋은 그림을 그리고, 음악에 미쳐야 훌륭한 음악가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는 예수님께 미쳐야 한다. 주님의 말씀, 주님의 사랑, 주님의 능력, 주님의 은총에 미쳐야 한다. 주님의 거룩함에, 주님의 영광에, 주님의 축복에 미쳐야 한다. 그래야 좋은 신자가 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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