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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Ⅳ, ‘주리고 목마름’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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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402회 작성일 11-04-17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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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Ⅳ, ‘주리고 목마름’②

마5:1~12

2011. 4/17 08:00, 11:00

Afluenza(부자병)

현대인 대부분은 풍요가 오히려 병이 되어버린, 모든 것이 차고 넘쳐나는 ‘자원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 비만이 사회문제가 되고, 과소비가 미덕이 되고, 노후와 여가를 어떻게 즐길 것인지가 새로운 고민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하고 저마다 불행을 호소할까? 의식주만 해결되면 모두 행복할 것 같았는데 왜 그렇지 못할까? 임상소아심리학자 올리버 제임스(O. James)는 이런 현상을 ‘부자병’(Afluenza)'으로 명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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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루엔자(Afluenza)는 1970년대 초반 휘트만(F. C. Whitman)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풍요’란 뜻의 ‘어플루엔스’(Affluence)와 ‘유행성 감기’란 뜻의 ‘인플루엔자’(Influenza)를 결합하여 만든 용어다. 부자병은 풍요로워질수록 더 많은 것을 바라는 탐욕이 만들어낸 질병이다. 더 넓은 집, 더 좋은 차, 더 높은 연봉, 더 날씬한 몸매, 더 좋은 조건의 배우자....... 하지만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고, 그 끝이 없는 욕망을 채우려다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무력감을 느끼고, 욕구불만, 과도한 스트레스,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남과 비교하다 심지어는 자살에 이르게 된다. 결국은 삶의 의욕과 능력을 쇠퇴시키는 병이 곧 부자병이다.

 

세속적 성공의 한계

이 부자병의 출발지는 세계금융의 허브 뉴욕 ‘월가’(Wall St.)이다. 월가의 주식중개인을 조사한 결과, 전체의 가 우울증이나 부정적인 생각에 시달린다고 했다. 높은 연봉과 지위, 안정적이고 부유하게 살고 있지만 이들의 속내는 심각한 정서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가장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끼고, 과도한 스트레스, 우울증과 같은 정서적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은 굉장한 역설이다. 그 이유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소유도 그 욕심을 다 채울 수 없다는 뜻이다. 소유보다 소유욕이 항상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질수록 결핍의 폭이 커진다. 물론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결핍을 뒤집으면 꿈이 되고 목표가 되기 때문에 강한 결핍을 가진 사람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성공의 이면에는 불만이라는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어서 만족을 누릴 수가 없다. 결핍과 불만은 정신적 쌍둥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부자병에 걸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세속적인 성공의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유가 삶의 편리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소유와 행복은 별개의 문제이다.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라는 것이 좋은 예이다.

 

비우기

그래서 사람들은 이와 같은 욕심을 치유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가장 일반적인 것이 ‘비움’이다. 소유와 욕심은 비례하기 때문에 소유를 버릴수록 욕심 또한 버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욕심이 줄어들수록 만족감은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소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때문에 한 때 금욕의 철학이 유행했고, 지금도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 보다 뜻 있는 삶을 위해서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많다.

 

옛날에 형제가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숲속에 버려진 항아리 두 개를 발견했다. 그 항아리에는 쌀이 반 정도 들어 있었다. 형제는 각자 하나씩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항아리에서 쌀을 꺼내서 밥을 해먹어도 쌀이 줄어들지 않는 것이었다. 동생은 그 쌀을 퍼서 이웃들과 나눠 먹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반면 형은 반밖에 차지 않은 그 항아리가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 항아리를 채우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쌀을 부어넣어도 항아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결국 화가 난 형은 항아리를 깨버리고 말았다. 똑같은 항아리를 가지고도 동생은 행복했지만 형은 행복하지 못했다. 이것이 비움과 채움의 차이다.

 

비우는 훈련은 욕심도 줄이고, 덤으로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까지 준다. 우리도 사소한 것에서부터 비움의 훈련을 실천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행복이 무엇인가? 결코 특별하지 않다. 자기욕심을 줄이고, 적은 것이지만 주변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항아리를 하나씩 다 주셨다. 그것을 이웃과 나누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 항아리를 다시 채워주시지만,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주셨던 것마저 가져가신다. 나눔이란 비움의 적극적인 행위이다. 많은 경우 욕심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이런 이유로 종교마다 ‘비우기’를 강조하는 것이고, 우리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채움으로 비운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단순한 비움이 아닌 ‘채움을 전제한 비움’이다. 예수님의 비유 중, 빈 집에 대한 말씀이 있다(마12:43~45). 귀신이 살다가 나간 집을 잘 수리하여 비워두었더니 더 많은 귀신들이 들어와서 그 집의 형편이 전보다 더 나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비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비워놓고 채우지 않은 빈 집의 위험성을 경고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의 관심, 우리 주님의 관심은 ‘어떻게 비울 것인가?’에 있지 않고,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있다. 채워지면 비워지기 때문이다. 방 안 가득한 어둠을 몰아내는 방법은 불을 밝히는 것이다. 의로 채워지면 불의가 사라지고, 주님의 은혜로 채워지면 세속적인 욕심도 정욕도 염려도 사라진다. 성령의 소욕을 따르면 육체의 소욕을 벗어날 수가 있다. 하늘의 기쁨으로 채워지면 땅의 근심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비울까?’ 염려하지 말고, ‘무엇을 채울까?’ 기도해야 한다. 네 번째 복은 이와 같은 주님의 뜻이 잘 나타난 말씀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세상은 ‘수분지족’(守分知足)을 말한다. 분수를 지키고 족함을 알라는 것이다. 분수에 지나는 것은 바라지도 넘보지도 말고 그저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며 살라는 뜻이다. 이렇게 족함을 아는 사람은 항상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知足常足). 그러나 주님은 항상 가난한 마음(3), 거룩한 삶을 위한 애통하는 태도(4), 강한 주림과 목마름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항상 현재의 상태에 대한 거룩한 불만, 거룩한 결핍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의’에 대한 강한 주림, 강한 목마름을 가지라고 말씀한다. 그러면 배부를 것이라, 채워질 것이라고 하셨다. 삶에 대한 진정한 만족, 참된 의미를 경험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님을 채움으로 세상 것들이 비워지고, 주님으로 인하여 배부르게 된다.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그렇다면 주리고 목마른 태도와 자족하는 마음은 서로 다른 것인가? 얼핏 보면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자족(自足)을 강조한 바울의 교훈(딤전6:6~8)이 주님의 팔복에 배치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깊이 묵상해보면 이 둘이 역설적으로 만난 것을 알 수가 있다. 주리고 목마름은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한 갈증이고 갈망이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불만이나 결핍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 대한 거룩한 불만이고 결핍이다. 그리고 이런 영적인 갈증이 채워지면 다른 것들도 다 해소가 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다윗 왕에 이어 스무 살의 어린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잘난 형들을 제치고 권좌를 이어받기는 했지만 이를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브온에 있는 산당으로 올라 하나님께 일천번제의 제사를 드렸다(왕상3:4~15). 그의 소원 오직 하나였다. ‘어떻게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어떻게 백성들의 송사를 잘 들어 지혜롭게 판결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제사를 드리던 날 저녁,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셨다. 그러자 솔로몬은 지체하지 않고 자신이 품고 있던 소원을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6~9). 이와 같은 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구한 지혜는 물론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12,13). 백성을 잘 섬기고 나라를 잘 다스리고 하는 열정에 목마른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 않은 것들까지 ‘더하여’ 주셨다. 주님은 주님께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다른 것들까지 채워서 배부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진정한 자족의 삶이다.

 

예수 밖에는 없네.

산스크리트어에 ‘공’(空), 즉 비어 있음을 뜻하는 ‘수냐타’(Sūnyatā)라는 단어가 있다. ‘수냐타’의 원래 뜻은 ‘없음’이 아니라 ‘충만’, ‘가득 참’이라고 한다. 너무나 충만하기 때문에 더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세상 그 무엇이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을 만큼 충만함을 줄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일까? 앞에서 ‘부자병’을 통해서도 확인한 사실이지만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이런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평생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이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내가 해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 그렇다. 세상 모두는 헛된 것들이다. 이런 헛된 것들을 추구하다보니 만족보다는 오히려 더 큰 갈증과 불만만 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비움’인 것이다. 헛된 것들을 가지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들을 내려놓자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역설적으로 ‘의’를 갈망하라, 사모하라, 추구하라고 하셨다. 즉 주님을 갈망하고, 사모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방법이시기 때문이다(요14:6). 주리고 목마름의 대상인 ‘의’가 예수님 자신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다. 그렇다. 예수님만이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을 만큼 충만함을 주시는 분이다(시103:5). 우리의 잔을 넘치게 하시는 분이시다(시23:5). 밤 새 수고했지만 얻은 것이 없는 텅 빈 인생을 두 배를 가득 채워 잠기게 하는 충만한 인생(눅5:1~11)이 되게 하신 분이시다. 그 사랑, 그 은혜, 그 능력, 그 거룩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전부이시다. 전부이신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마음에 모실 때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을 만큼 충만함을 경험할 수가 있다. 파스칼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백이 있다.’고 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참된 만족, 참된 의미, 인생의 충만함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채우시고 만족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94장)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밖에는 없습니까? 예수님이 최고의 즐거움이고, 자랑이고, 가장 소중합니까?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고백, 평생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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