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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Ⅴ, ‘긍휼’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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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660회 작성일 11-05-0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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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Ⅴ, ‘긍휼’②

마5:1~12

2011. 5/8  08:00, 11:00

긍휼을 잃어버린 시대

피에르 반 파센(Pierre Van Paassen)은 「우리 시대의 날들」이란 책에서 프랑스의 작은 마을 ‘부르그’(Bourg)에 사는 ‘유고린’(Ugolin)이라는 착한 꼽추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여서, ‘솔랑지’(Solange)라는 누이가 그를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누이가 도둑의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고, 얼마 후 석방되었으나 직장을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동생이 병석에 눕게 되자 누이는 동생의 약값을 벌기 위해 몸을 팔았다. 어느 날 유고린이 마을에 나갔다가 사람들에게 넘어뜨림을 당하고 발길질을 당하며 ‘창녀의 동생’이라는 조롱을 당하게 된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수도사(Roudaire)가 이 광경을 보고 피투성이가 된 그를 구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모멸감과 치욕을 이기지 못해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고, 누이 역시 동생을 따라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것을 본 그 수도사는 ‘이 어린 것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자비가 없는 사회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탄식했다. 이들 남매의 장례식 때, 수도사는 이렇게 설교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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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생사의 주관자이신 주께서 심판 날 나에게 ‘네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주님께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 두 번째로 ‘네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셔도 나는 주님께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네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부끄럼을 무릅쓰고 ‘그들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리떼 였습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힘을 숭배했던 로마인들은 긍휼을 ‘영혼의 질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힘없는 사람을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대했다. 이 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인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경쟁’이란 말의 배후에는 ‘힘의 숭배’가 자리하고 있다. 물론 현대에는 힘이라는 개념이 다양화되었지만 내가 살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힘으로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겁박(劫迫)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긍휼을 베풀고 양보한다는 것은 곧 불이익과 패배를 의미한 것이다. 신자들마저 이런 세상에 편승하여 긍휼을 종교적 수식어 정도로 치부하고 현실에서는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도 유고린과 솔랑지 같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내쫓김을 당한 것이다. 긍휼이 영혼의 질병이 아니라 긍휼을 잃어버린 것이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이다.

 

누가 이 아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자녀를 갖지 못한 부부가 있었다. 이 부부는 자녀를 얻기 위하여 밤낮없이 쉬지 않고 기도했다. 마침내 8년 만에 기적처럼 아들을 선물로 얻었는데, 기쁨도 잠시 아기를 본 부부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는 중중 뇌성마비였다. 그들의 기쁨은 원망으로 변하여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너무 하십니다. 왜 하필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몇날 며칠을 그들은 아이를 안고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원망하다 지쳐 쓰러진 아내에게 주님이 찾아 오셨다. ‘사랑하는 딸아, 미안하구나. 내가 그 아이를 품고 팔도강산을 8년이나 헤매고 다녔단다. 누가 그 아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찾다가 결국 너를 선택하였다. 정말 미안하구나. 그러나 너라면 충분히 그 아이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너에게 맡긴 거란다.’ 이를 통하여 이 부부는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 그 아이를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유와 목적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그렇게 무겁게 암담하게 느껴지던 것이 순간적으로 가볍게 느껴지는 것을 체험했다. 그 때부터 아이를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로 여기고 기쁨으로 기르게 되었다.

 

이 부부처럼 무엇이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불편하고 고통스러워도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인내하며 감당할 수 있다. 긍휼을 베푸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영혼의 질병’으로 치부되고 있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경쟁사회에서 내 몸 돌보는 것도 버거운데 남까지 돌봐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 시간에는 긍휼을 베풀며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 같이.......”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마18:23~35). 한 주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다. 하지만 그 종은 그것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주인은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이렇게 엄청난 은혜를 입은 종이 길에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그는 빚진 친구 목을 잡고 빚을 독촉했다.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사정했으나 그는 친구를 가혹하게도 감옥에 가두었다. 자신이 주인에게 진 빚에 비하면 친구의 것은 아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은 1/600,000(달란트≒34㎏, 데나리온≒6g. 1데나리온≒1/6,000달란트)이다. 이 종의 이런 모습을 보고 동료들이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말했다. 그러자 주인이 크게 진노하며 말하였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2,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 같이.......” 바로 이 말씀이 우리가 서로 긍휼을 베풀어야 할 첫 번째 이유다. 이는 ‘은혜의식’이다. 일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종처럼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갚을 길 없는 큰 은혜를 받았다. 사실 여기 ‘일 만 달란트’라는 수는 계산할 수가 없는 큰 수이다. 무한대를 의미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크기와 높이, 깊이와 넓이를 말한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우리는 헤아릴 수가 없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찬송가 304장 3절).

 

그렇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내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다. 신자는 이 은혜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베풀며 살아야 한다. 이 종의 문제점은 이런 ‘은혜의식’이 없었다. 은혜의식의 결여는 긍휼을 베풀지 못함으로 이어졌다. 팔복 첫 시간에 팔복은 복의 ‘선언’이면서 동시에 신자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명령’이라고 했는데. 긍휼 역시 마찬가지다. 긍휼은 은혜를 받았으니 받은 만큼 그 은혜를 베풀며 살라는 주님의 ‘요구’이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기대이자 뜻이다. 우리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신 그분을 따르고 닮아가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분과 같이 긍휼의 성품을 가져야한다. 신자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고, 그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비유에서 자기 친구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은 종을 주인이 엄히 꾸짖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긍휼히 여김을 받았으니 긍휼을 베풀며 사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그렇지 못함에 대한 진노이다. 그래서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34). 은혜의식과 인격, 은혜의식과 신앙성숙은 비례한다. 높은 인격과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은혜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그래서 삶이 온통 감사로 물들어 있다.

 

“......너도 네 동료를......”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서로 ‘동료’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체의식’이다. 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은혜의식’과 함께 ‘지체의식’이다. 주님의 비유에서 주인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꾸짖었다. 주인은 이 배은망덕한 종에게 빚진 사람을 ‘네 동료’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 하나는 은혜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지체의식이다. 곁에 있는 사람이 경쟁자이기에 앞서 나의 ‘형제’(자매)이고, 내게 빚을 진 사람이기에 앞서 나의 ‘동료’(친구)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세상이 이처럼 살벌해진 것은 이런 가치가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형제를 경쟁자로, 동료를 채무자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인처럼 자기 동생 아벨을 무참히 죽이는 죄를 범한 것이다. 친구의 딱한 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옥에 가두게 된 것이다(눅15: 탕자의 형도 마찬가지). 이와 같은 일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형제의식, 지체의식이 없는 곳엔 긍휼이 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이 긍휼을 잃어버리면 사람은 서로 물고 찢고 상하고 죽이는 늑대가 된다.

 

주님의 표현대로 주님은 ‘목자’시고, 믿지 않는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은 주님의 ‘양’이다(요10:2,11). 그리고 아직 믿지 않은 사람은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일 뿐이다(요10:16). 이는 모든 사람이 형제요, 자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지체인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풀며 살아야한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전도란 우리 밖, 곧 아버지의 집 밖에서 방황하고 있는 형제와 자매를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그래서 전도도 철저한 형제의식, 지체의식에서 비롯된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서로 지체이다. 서로 긍휼을 베풀어야 할 존재이다.

 

행복은 긍휼과 함께

밝고 예쁘게 생긴 처녀가 있었다. 많은 총각들이 그녀를 좋아했지만, 그 사랑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녀에게는 눈썹이 없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총각들은 그녀를 떠나갔다. 그래서 그녀는 오랫동안 혼자였다. 결국 혼기를 놓친 그녀 어느 연탄장수에게 시집을 갔다. 그녀는 매일 남편보다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눈썹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아픈 직원을 대신하여 남편의 일을 돕게 되었다. 연탄장수 아내였지만 연탄을 나르는 일은 처음이었다. 땀을 흘리며 연탄을 나르고 있는데, 남편이 잠시 쉬자고 하면서 자신의 목에 감았던 수건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주었다. 순간 그녀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남편이 알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남편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눈썹만을 피해 조심조심 땀을 닦아주었다. 그러면서 남편이 말했다. ‘여보, 내 사랑은 당신이지 눈썹이 아니요!’ 그 순간 그녀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약점을 눈감아 주고, 상대의 상처를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긍휼이다. 긍휼은 눈썹이 아니라 사람을 보게 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 다른 사람의 약점만 보고, 그 약점 때문에 실망을 하거나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많다. 이는 약점을 가진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 약점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긍휼 없이 바라본 그 사람이 문제다. 윌리엄 바클레이(W. Barclay)는 그의 주석에서 긍휼을 ‘그 사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의 생각으로 생각하고, 그의 느낌으로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다른 사람의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긍휼의 마음을 가지면 그 사람의 상처나 약점이 아니라 그 사람 그 영혼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약점이 많고 상처가 클수록 그를 더욱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고, 그를 품게 되는 것이다. 삶의 행복이란 바로 여기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엄청난 긍휼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의 긍휼을 필요로 한 사람들은 내 친구(동료)들이다. 우리 모두 주님께 받은 이 긍휼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사람들을 주변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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