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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Ⅴ, ‘긍휼’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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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419회 작성일 11-05-1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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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Ⅴ, ‘긍휼’③

마5:1~12

2011. 5/15  08:00, 11:00

누구에게나 긍휼이 필요하다.

잔혹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 ‘예이엘 디무르’라는 사람이 있다. 1961년에 나치 잔당들을 재판하는 전범재판이 열렸을 때, 악명 높은 아이히만(K. A. Eichmann)이라는 히틀러의 참모를 재판하게 되었다. 디무르에게 재판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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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을 똑바로 보십시오. 저 사람이 아이히만 맞습니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쳐다보십시오. 아이히만이 맞습니까?’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디무르는 그만 기절했다. 한 참 후에 깨어난 그에게 재판장은 ‘과거에 대한 악몽 때문에 기절한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저으며 그는 매우 충격적인 말을 했다.

 

‘제가 가만히 저 사람을 쳐다보니 저 사람이 저렇게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수많은 우리 동료들을 가스실로 들어가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 앞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역시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입니다.’

 

흉악범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죄가 있는 한 우리 안에도 광기가 있고, 미움이 있고, 절망이 있고, 불안이 있다. 인간은 주님의 긍휼이 없이는 새로워질 수 없는 존재, 주님의 긍휼이 아니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주님의 긍휼이 없다면 천국을 바라볼 수 없는 어둠 속의 인생이다. 이런 우리가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구원을 얻고, 주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광기로부터, 미움으로부터, 저주로부터, 절망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이다. 이 모두가 주님의 긍휼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긍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모든 사람이 긍휼의 대상이다.

 

긍휼히 여겨야 할 사람들

지금까지 긍휼의 성격과 방법(5/1), 그리고 긍휼을 베풀어야 할 이유(5/8)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다. 이 시간은 긍휼의 대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긍휼은 모두에게 필요하고,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전범 아이히만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그도 긍휼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피해자 디무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세 부류의 사람들을 기억하며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1. 믿지 않는 사람들.

신자의 사명, 교회의 사명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는 것이다. 즉 전도가 신자의 사명이고, 교회의 사명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1,2)고 하였다. 전도는 하나님과 심판자이신 예수님의 명령이고, 모든 기회를 초월하여 항상 힘써야 할 일이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 긍휼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주님의 마음이다. 주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아주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23)

 

신자가 주님 앞에서 가질 수 가장 아름다운 자세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 보다 아름다운 모습, 행복한 태도는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도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만나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다. 주님은 소유나 신분을 초월하여 그저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다. 마치 목자를 잃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며 고생하는 양처럼 보셨다. 사실 주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목자가 없는 양과 같고 집을 잃어버린 사람과 같다.

 

전도는 이런 사람들에게 인생의 참 목자이신 주님을 소개하는 것이고,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도는 주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이 된다. 이것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험산준령을 넘는 목자의 심정이고, 집을 나간 자식을 위해 밤마다 문열어놓고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이다(눅15:). 목마른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대인의 여행금지구역인 사마리아까지 찾아가신 주님의 마음이다(요4:).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영혼이 떠난 육신의 죽음에 앞에서 통곡을 한다면, 하나님을 떠난 영혼을 놓고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자와 교회가 베풀어야 할 긍휼의 첫 번째 대상자는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영혼을 구하고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2. 연약한 자들

긍휼을 히브리어로 ‘헤쎄드’(דסח)라고 한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번역을 하나 대상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나보다 높은 사람에 대해서는 존경, 공경, 경외, 충성이라 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에 대해서는 우정, 애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보다 아랫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에 대해서는 긍휼, 인자, 자비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긍휼의 대상이 더욱 분명해 진다. 긍휼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에게, 자유로운 사람이 갇힌 사람에게 가져야할 태도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는 말씀을 통해 작은 자에게 긍휼 베풀기를 강조하셨다. ‘지극히 작은 자’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연약한 자를 의미한다. 옥에 갇힌 사람,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와 같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비참한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고,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연약해지는 것이 긍휼이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서 긍휼의 삶을 사셨다. 무지한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눈먼 사람들, 문둥병자들, 과부들, 세리와 창기들, 그리고 나름의 고통을 안고 주님께 나아온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시고 고치셨다. 냉소주의자는 주님께 고침을 받지 못한 자가 대다수였고, 고침 받은 이들 때문에 고침을 받지 못한 이들이 더 비참해졌다고 지적한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한 가지 잊은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주님이 병자를 고치신 것보다 그런 치유가 일어나도록 주님의 마음을 움직인 깊은 긍휼이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만 쓰이는 배타적인 표현이 열두 번 나온다. 그것은 ‘긍휼로 마음이 움직여서’라는 표현이다.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ιζομαι)라는 단어인데, ‘내장이 뒤틀리다.’는 뜻으로 격한 감정으로 요동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복음서가 주님의 긍휼에 대하여 내장이 움직였다고 말하는 것은 주님의 감정을 보다 깊고 강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주님의 이러한 감정과 마음은 연약한 사람들을 보실 때 더욱 격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주변의 비난을 무릅쓰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주셨고(눅15:2), 율법에서 접촉을 금한 사람을 직접 만져서 치유해 주셨고(막1:41), 안식일을 범한 자란 비난을 불사하며 긍휼을 베풀었다(요5:). 심지어는 고발하기 위해 파놓은 함정인줄 알면서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다(막3:). 그러므로 진정한 위대함은 치유가 아니라 치유의 근원이 되는 그 무한한 긍휼이다. 신자는 이와 같은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그 마음으로 특히 어려움에 처한 연약한 이웃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들을 섬기고 돌보는 사랑의 손, 그들을 찾아가는 사랑의 발, 그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3. 핍박하는 자들

조우라는 충성된 노예가 있었다. 그 주인은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고 그에게 맡겼다. 어느 날 주인은 조우와 함께 노예시장에 갔다. 많은 노예들이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데 유달리 늙고 힘없는 한 노예가 끼어 있었다. 주인이 힘이 좋고 젊은 노예를 사려하자 조우가 병든 노예를 사자고 해서 그 노예를 샀다. 병든 노예는 집에 와서 별로 일을 못했으나 조우는 열심히 그를 간호하고 잘 보살펴 주었다. 주인은 조우에게 일도 못하는 그를 극진히 돌본 이유를 물었다. 조우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 사람은 제 원수입니다. 어렸을 때 저를 유괴해서 노예상인에게 팔아 지금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저 사람도 노예가 되어 병들어 있습니다. 제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하나님이 제게 말씀하시기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저 분이 세상 떠날 때까지 돌볼 것입니다.’

 

불신자나 연약한 자에게 베푸는 긍휼보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고통을 주는 사람, 원수 같은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가 더욱 힘든 일이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라.”(삼상24:6, 26:11)고 하면서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기도했고, 주님도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하셨다.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원수 같은 사람에게까지 긍휼을 베푼 것이다. 주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하셨다. 그리고 친히 그러한 삶의 본을 보이셨다. 신자의 긍휼은 신자로서의 사명, 연약한 이웃들에 대한 동정을 넘어 내게 직접적인 불이익과 해악을 끼친 사람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단호하고 엄격하게 대하지 않고, 피해를 입고 불이익을 당했어도 상대편을 적극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긍휼이다.

 

배꼽동맥

세상은 사회적 정치적 육체적 경제적인 여러 연약함 때문에 여전히 차별과 소외의 벽이 많다(경차가 길을 막았다는 이유로 폭행한 사건). 그런데 긍휼이 이런 연약함을 끌어안음으로 세상에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또한 과도한 스트레스 인하여 미움과 증오,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마치 뇌관에 불이 붙은 폭발직전에 있는 폭탄과 같다(지난 10일 며느리가 시어머니 생일상을 차리다 말다툼으로 시어머니를 살해한 사건). 이러한 미움과 증오, 갈등을 해소하여 사랑과 용서, 화해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긍휼이다. 신자는 이와 같은 주님의 긍휼을 이웃과 주변에 공급하는 통로다. 그래서 세상에서 행복한 존재, 이웃과 주변을 행복하게 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영혼을 구하는 최선의 길이다(신자의 삶이 행복하고 행복의 통로가 되면 사람들이 왜 주님과 교회를 외면하겠는가?).

 

우리 몸에 흔적만 남아 있고 피가 흐르지 않는 혈관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배꼽에서부터 이어져 있는 ‘배꼽동맥’이 그것이다. 이것은 엄마와 태아를 연결해서 태아에게 필요한 영양과 모든 물질을 공급해 주는 태아의 유일한 생명선인 탯줄 속에 흐르는 혈관이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탯줄은 끊어지고 피가 흐르지 않자 이 혈관은 차츰 퇴화되어 마침내 그 흔적만 남게 되었다. 피를 흘러 보낼수록 혈관은 더 튼튼해지고 커져서 더 많은 생명의 피를 흐르게 한다. 하지만 흘러 보냄을 멈추면 배꼽동맥처럼 퇴화되어 더 이상 생명이 전해지지 않고 그 흔적만 남게 된다. 신자는 몸의 혈관과 같다. 우리는 배꼽동맥처럼 퇴화되어 더 이상 생명이 전해지지 않고 흔적만 남은 이름뿐인 신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긍휼을 풍성하게 이웃과 주변에 공급하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신다. 긍휼을 베풀수록 더욱 풍성해지고 풍성하게 베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행복한 존재, 이웃과 주변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된다. 우리 모두 이런 주님의 기대와 소원을 이루어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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