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眞福八端)Ⅵ, ‘청결한 마음’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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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754회 작성일 11-06-12 15:10본문
진복팔단(眞福八端)Ⅵ, ‘청결한 마음’②
마5:1~12
2011. 6/12 08:00, 11:00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바퀴벌레 이야기
바퀴벌레 두 마리가 각기 다른 식당으로 ‘맛’ 여행을 떠났다. ‘A’바퀴벌레가 간 식당은 입맛을 돋게 하는 것들이 아주 많은 지저분한 곳이었다. 그런데 ‘B’바퀴벌레가 간 식당은 밥알 하나 발견할 수 없는 너무도 깨끗한 곳이었다. ‘B’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A’에게 가서 자기가 본 식당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얘, 내가 갔던 식당이 어떤 곳인 줄 아니? 정말 기가 막히게 깨끗한 곳이야. 파리가 낙상할 정도였다!’
그러자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던 ‘A’가 불쾌한 듯 말했다.
‘야, 너는 내가 먹고 있을 때 꼭 그런 얘기를 해야겠니? 밥맛 떨어지게......’
우리의 영적 상태, 혹은 마음의 상태를 생각해 보게 하는 이야기다. 사단은 쉬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을 보고는 ‘여긴 지저분하고 더러워서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겠다!’고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너무 깨끗해서 불편하니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다!’고 말할 것이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본 사단의 소감은 어느 쪽일까? 바퀴벌레처럼 사단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곳을 좋아한다. 그래서 깨끗한 곳은 입맛을 잃을 만큼 싫어한다. 우리 모두 사단이 입맛을 잃을 정도로 청결하고 깨끗한 마음을 사모하고, 그런 마음을 갖자! 그러면 어떻게 이 ‘청결한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지난 시간에는 청결함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는데, 이 시간에는 어떻게 청결함을 얻을 것인가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애통함과 진지한 회개를 통해서 얻어진다.
어느 가전제품 광고처럼 문제는 ‘속’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저분한 겉모습은 문제를 삼으면서도 마음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 이것은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의 삶이 아니라 겉만 보는 사람 중심(man-centered)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심각한 것은 마음의 더러움이고, 마음의 더러움은 ‘죄의 문제’다. 죄 문제의 해결이 깨끗함의 방법이다. 그런데 죄는 우리의 노력이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 죄는 오직 피로써 씻을 수가 있다(히9:22). 즉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에게 깨끗하게 씻을 수가 있다(찬송가 252장 참조). 어떤 심각한 죄라도, 남은 고사하고 자신마저 용서할 수 없는 죄라도 주님의 보혈로 씻지 못할 죄는 없다. 아니 주님의 보혈이 아니고는 아무리 사소한 죄도 씻을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선지자 스가랴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릴 것이라고 했는데(13:1), 이 샘은 로마병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옆구리를 찌르던 순간에 터졌다. 보혈의 샘이 열린 것이다. 이 보혈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거짓과 불의로 가득찬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할 때 주님의 보혈이 우리 마음에 스며들어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근원적인 죄(원죄)는 이렇게 해결이 되었어도 우리가 연약하여 살면서 마귀의 유혹과 올무에 걸려서 다시 더럽혀지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이후에 범하는 죄를 해결하는 길이 ‘회개’다(1요1:9). 죄에 대한 애통함과 진지한 회개를 통하여 다시 회복된다. 죄가 보혈의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라면 회개는 막힌 것을 터서 보혈의 강이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결한 마음은 죄에 대한 애통함과 진지한 회개를 통해서 얻어진다. 회개하는 심령 가운데 보혈의 강이 넘쳐서 모든 죄를 깨끗하게 정결하게 씻어주신다. 비로소 순수한 동기, 한결같은 태도의 청결한 마음이 회복된다. 그래서 경건한 신자는 죄에 민감하여 항상 젖어 눈, 젖은 가슴으로 살아간다. 그
2. 말씀과 기도를 통해 얻어진다.
어느 교회 권사 이야기다. 이 분이 믿음이 좋고 봉사를 잘해서 권사가 된 것이 아니라 돈을 잘 버는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이 넉넉하게 준 돈으로 헌금도 하고, 밥도 사고, 선물도 주었더니 권사가 된 것이다. 소위 ‘돈’(錢, 狂) 권사가 된 것이다(주변에 이렇게 ‘돈’ 권사, ‘돈’ 집사, ‘돈’ 장로가 있다. 그러다보니 교회 역시 ‘돈’ 교회가 된 것). 권사가 되었어도 주일 낮 예배 외에 새벽예배는 물론 수요예배도, 금요기도회도 안 나오는 엉터리였다. 그녀에게 신앙생활은 단지 취미생활 정도였다. 그런 그녀에게 정신을 번쩍 차릴 일이 생겼다(사실은 주께서 맡기신 영광스러운 직분이 훼방 받지 않도록 역사하신 것임). 아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그렇게 착하던 아이가 교회도 안가고 독서실에서 공부한다더니 친구들과 어울려 가출을 하고, 남의 물건을 훔쳐 경찰서를 드나들고, 가끔 집에 들어오는 것은 돈이 필요할 때뿐이었다. 그것도 돈을 달라고 해서 가져간 것이 아니라 훔쳐갔다. 그래서 아들 때문에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기도하다가 문득 ‘주님도 나 때문에 마음이 무척 상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로 인하여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또 목사님이 ‘믿음을 보려거든 자기 자녀에게서 찾아봐라. 자녀는 부모의 얼굴이다.’고 설교했다. 그 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침에도 기도하고, 낮에도 기도하고, 저녁에도 기도했다. 틈나는 대로 말씀을 읽고, 설교테이프를 들었다. 그리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것은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아들이 빗나가게 된 것을 회개하는 기도였다. 하루는 아들이 돈이 필요해서 집에 왔다가 설교테이프를 틀어놓고 울며 기도하는 엄마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이 모습을 본 그는 즉시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와 학교도 잘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착한 아들이 되었다. 눈물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이 엉터리 권사에게 ‘기도하는 권사’, ‘전도하는 권사’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지체들 중에 자녀문제만 있다고 하면 찾아가 ‘낙심하지 마세요. 기도하세요. 말씀을 들으세요.’하고 권면했다.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소개한 것이다.
이 권사님은 ‘말씀과 기도’로 자신이 깨끗해질 뿐만 아니라 아들까지도 변화된 거룩한 체험을 한 것이다.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목사의 아들로 암스테르담 대학교 신학부를 마치고, 한 때 전도자로 활동했던 화가다. 그는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 어느 탄광에서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어느 날, 한 광부가 입고 있는 옷에 눈이 갔다. 이 광부는 포장지로 옷을 지어 입었는데, 그의 잔등에 포장지에 쓰였던 글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깨지기 쉬운 물건이니 취급에 주의할 것.’ 이 때 고흐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의 심정을 일기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정말 인간이란 깨지기 쉬운 것. 나는 전도자라고 하지만 얼마나 자주 깨어지는가! 날마다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나를 지켜야한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깨지기 쉬운 물건과 같다.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더럽혀지기 쉬운 존재다. 사실 이런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아는 것이 은혜이고,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이런 우리를 영적으로 강하게 하고, 깨끗하게 해주는 것이 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딤전4:5)라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있는 온갖 더러움을 깨뜨리는 ‘방망이’(렘23:29), 깨끗하게 태우는 ‘불’(렘23:29), 말갛게 씻어내는 ‘물’(엡5:26), 완전히 도려내는 ‘칼’(히4:12)에 비유하고 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119:9)고 고백하였다. 우리의 마음과 인격에 주님의 말씀을 채울 때, 그리고 기도의 통로가 주님과 우리 사이에 계속 열려 있을 때 청결하게 되는 변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특히 말씀과 함께 하는 기도생활은 우리를 하늘에 속한 사람,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 주님 닮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준다. 신앙생활에서 예배를 소중히 여긴 이유가 여기 있다. 예배의 핵심이 말씀과 기도이고, 예배를 통해 힘을 얻어야 말씀과 기도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과 기도에 집중해야 순수한 동기로 주님을 따르고, 한결같은 태도로 주님을 섬길 수가 있다.
3. 시련을 통해서 얻어진다.
청결한 마음은 물질적인 풍요와 생활의 안정에서보다는 고난의 풀무에서 이루어진다. 바다는 태풍이 불어야 깨끗해지고, 하늘은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야 깨끗해진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깨끗하고 순결해진다. 순금이 처음부터 순금이 아니다. 1톤의 돌 속에서 2g의 금을 뽑아낼 수만 있어도 품질 좋은 금광석으로 분류한다. 이런 금광석을 부수어 금을 뽑아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뽑아낸 금을 여러 번 뜨거운 풀무에 넣고 연단해서 모든 불순물을 제거해야 비로소 순금이 된다. 마찬가지로 부패한 우리 인간의 마음도 온갖 불순물이 섞여 있다. 마치 온갖 찌꺼기가 침전된 구정물통과 같다. 물론 고난 자체가 불순물을 제거하지 못한다(기독교는 금욕주의나 고행주의를 지양한다). 고난은 침전된 찌꺼기들을 드러나게 할 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고,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보게 하고 알게 하고 깨닫게 하고, 회개를 통하여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한다. 그래서 연단을 통하여 모든 잡된 동기들, 부정한 생각들, 헛된 욕망들이 깨끗이 사라지고 순수하고 가난한 마음, 오직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께만 충성하는 청결한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의 목표는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성숙한’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다. 어느 ‘누구’ 사람을 닮는 것이 아니라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엡4:13,15).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여러 시련을 허락하신 것이고(잠17:3), 우린 이를 달게 받아야 된다(약1:2). 나무를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게 하려면 그 쪽의 가지를 잘라주면 된다. 잘려나간 그 아픔을 딛고 그 곳에 여러 개의 새로운 움이 돋게 된다. 시련이 곧 새 생명의 터전이란 뜻이다. 주님은 이런 가지치기(시련)를 나무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목적은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데 있다고 하셨다(요15:2,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시련을 통하여 깨끗해지고, 깨끗해야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성숙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가 있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은 혹독한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이 욥기의 주인공 ‘욥’이다. 욥은 자신의 시련을 이렇게 고백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그는 여기서 ①자신이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하고 그 끝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 ②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혹독한 시련은 자신을 단련(training)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 그리고 ③이 시련이 끝나면 자신이 깨끗하고 순결한 순금과 같은 존재, 지금보다 훨씬 성숙한 존재로 변하리라는 확신이다. 우리도 이런 확신으로 당한 어려움을 직면하기 바란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은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여 깨끗하고 순결한 순금과 같은 존재, 지금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려는 주님의 손길이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
요즈음 젊은 사람들의 화두는 구직(求職)이다. 하지만 사람을 구하는 입장에선 구인난이라고 한다. 사람은 많아도 필요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도 사람을 찾고 계신다. 주님이 찾는 사람은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깨끗한’ 사람이다. ‘거룩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냥 교회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중심이 주님께 속한 영적 소속감이 분명한 사람, 그 속에서 주님의 향기가 나오는 사람, 마음의 은밀한 목적과 동기가 순수하고, 교만과 욕심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사심이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 오직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섬기고, 주님께만 집중하고, 삶의 1등이 항상 주님인 사람, 심지가 굳어 한결같은 사람을 찾고 계신다.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주님이 찾는 사람이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복은 사소한 죄도 아파하며 진지하게 회개하고, 말씀과 기도에 더욱 정진하고, 삶의 여러 가지 시련을 주님이 주시는 연단으로 받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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