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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Ⅵ, ‘청결한 마음’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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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005회 작성일 11-06-1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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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Ⅵ, ‘청결한 마음’③

마5:1~12

2011. 6/19  08:00, 11:00

무엇을 보는가?

한 젊은 선원이 처음으로 배를 타고 항해를 떠났다. 그런데 북대서양에서 그만 사나운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돛대 끝에 올라가 항로를 조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그곳으로 올라가다가 순간적으로 밑을 내려다보고는 겁에 질리고 말았다. 폭풍으로 요동치는 바다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 무서운 광경에 그는 균형을 잃기 시작했다. 그때 선배 선원이 그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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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밑을 보지 말고 위를 봐. 위를 보라고.’

 

그는 선배의 충고대로 위를 보았다. 그러자 다시 균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어디를 보고,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밑을 보고, 파도에 요동치는 바다를 보고, 배에 부딪치는 파도를 보았을 때 젊은 선원은 겁에 질려서 균형을 잃고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밑에서 멀리 위로 향하자 곧 평정심을 찾았다. 부정적인 것을 보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긍정적인 것을 보면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만 보는 사람은 조급하게 쫓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고, 만족이 없고 항상 불행의식으로 사는 사람이 된다. 적군을 보면 두려움에 낙담하지만 하나님의 군대를 보면 위로가 되고 용기를 갖게 된다(왕하6:15,17). 사람은 보는 대로 된다. 또한 보는 것을 닮고, 닮고 싶은 것을 본다. 꽃을 보면 꽃을 닮게 되고,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게 되고, 산을 보면 산을 닮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어 꽃을 보고, 바다처럼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바다를 보고, 산 같은 기상을 갖고 싶어 산을 본다. 이렇게 보는 대로 되고, 닮고 싶은 것을 본다.

 

그러므로 똑같이 보지만 ‘무엇을 보고, 어디를 보고, 또한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한 개의 사과를 가지고 어떤 사람은 아직도 한 개나 남았다며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이제 한 개밖에 없다고 불평한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결과는 이렇게 다르다. 결국 보는 차이 때문이다. 보는 것이 가치관의 차이, 인생의 차이를 결정하고, 나아가서 인생을 좌우한다. 팔복의 여섯 번째 지복(至福)은 ‘보는 것’과 관련 된 복이다. 즉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보는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보는 복

이 여섯 번째 지복은 실로 충격적인 선언이다. 내용도 그렇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과 일치하지 않는 점이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이 영(靈)이시기 때문에 볼 수 없고, 하나님은 너무도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본 사람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출33:). 주님의 이 선언은 이런 말씀과 불일치를 이룬다. 물론 여섯 번째 지복의 그 시제가 ‘미래형’이기 때문에 이를 미래형으로만 해석하면 문제가 될 것도,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복도 아니다. 신자는 이미 천국을 가진 사람들이고, 언젠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을 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팔복 서론에서 팔복은 ‘현재 상태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를 현재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현재의 삶에 적용했을 때 실로 충격적인 내용이 된다. 지난 번 소녀시대 가수들이 공연을 위해 프랑스에 방문했을 때 이들을 보려는 사람들로 공항이 북새통이 되었다는데, 연예인을 보는 것도 흥분된 일이라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어떻겠는가? 말 그대로 가슴이 터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봤는데 세상 무엇이 두렵고, 삶에 대한 걱정과 근심, 낙심과 좌절, 절망이 어디 있으며, 불평과 원망이 어디에 발을 붙일 수가 있겠는가? 그냥 그 자리에서 죽는 들 더 이상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고도 기절한 사람이 있는데,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보면 그냥 그 자리에서 그대로 돌이 되지 않겠는가? 아무튼 주님은 이렇게 놀라운 복을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경험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는데, 그렇다면 현실의 삶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1.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는다.

‘보다’는 말을 우리 국어사전은 세 가지로 풀이를 하고 있다. ①눈으로 대상의 존재나 형태적 특징을 알다. ②눈으로 대상을 즐기거나 감상하다. ③책이나 신문 따위를 읽다. ‘보다’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see’ 역시 ‘알다’(to know), ‘이해하다’(to understand)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 사용된 ‘보다’는 뜻의 헬라어 ‘호라오’(ὁράω)라는 단어도 ‘경험적 체험적으로 보다.’ ‘깨닫다.’ ‘인식하다.’는 뜻이다. 이상에서 보는 행위가 단순한 시각적인 활동 이상의 의미임을 알 수가 있다. 특히 보는 행위 속에 ‘알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전적인 의미 외에서도 보는 것 속에 아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예를 찾을 수 있다.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선생님, 어디에 계십니까?’(요1:38)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와서 보라”(요1:39)고 하셨다. “와서 보라”는 이 말씀에는 ‘알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와서 보면 내가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알게 되리라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한자어 역시 ‘알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물론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지만 아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여섯 번째 지복이 말한 ‘하나님을 보는 복’에 대한 현재적 의미는 시각적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문자적인 해석보다는 하나님의 존재와 특성(성품)을 충분히 알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초점이 분명하고(single focus) 깨끗하면 사물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볼 수가 있다. 그러면 사물에 대한 이해도 분명해진다. 분명하게 봐야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청결한 마음이라야 하나님을 분명하고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충분히 알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뜻을 알고,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가 있다. 신앙은 신앙의 대상을 바르게 알고, 잘 아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알지 못하면 바르게 섬길 수가 없고, 바르게 예배할 수도 없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500~600여 년 동안 계속되었던 예배논쟁이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에 있었음을 주님은 지적하셨다(요4:22~24). 기도생활도 마찬가지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바른 기도생활이 가능하다. 사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보는 것이나 아는 것이 단순한 시각이나 두뇌활동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마음이 잘못되면 보는 것과 아는 것이 왜곡될 수 있다. 물이 흐리거나 물결이 심하면 사물을 제대로 비춰볼 수 없고, 오염된 그릇에 물건을 담으면 그 물건 역시 오염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봐도 알 수가 없을 뿐더러 심하게 왜곡시키거나 오염시킨다. 가룟유다가 3년 동안 주님을 따랐으나 결국은 배신자가 된 것도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까닭이다. 잘못된 동기와 목적으로 주님을 따랐기에 3년 동안이나 주님과 함께 생활을 하고 가르침을 듣고 보았으나 주님을 바로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알고, 분명하게 알고, 충분하게 아는 방법은 마음이 청결해야한다. 내적 동기와 목적이 순수하고, 전심으로 사랑하는 한결같은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된다. 이런 사람이 주님께 대한 충분한 지식,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을 뜻을 알아 주님을 바르게 섬길 수가 있다. 이것이 곧 지복이다.

 

2.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갖는다.

한자로 ‘견’(見=目+人)이라는 글자가 ‘보다’는 뜻이다. 이는 사람(人) 위에 커다란 눈(目)을 그려놓은 그림글자다. 고대 중국인에게 ‘見’(봄)은 ‘소통함’을 의미했다고 한다. 즉 ‘보는 것’(見)은 그저 사람의 눈으로 무엇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과 보는 사람이 서로 의사소통을 의미한다. 소통과 관계맺음의 의지를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 ‘見’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볼수록 친밀감이 생긴 것은 경험적으로 아는 일이다. 앞에서 소개한대로 우리말 사전도 ‘보다’의 두 번째 뜻을 ‘눈으로 대상을 즐기거나 감상하다.’로 정의하였다. 운동경기를 보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즐기거나 감상하는 것’을 뜻한다. 공연을 보고, 예술품을 보고, 어떤 경치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고 있는 그 대상을 즐기고 감상한다는 것은 그것과 소통이 되고 관계가 맺어졌다는 뜻한다. 이 소통과 관계맺음은 교제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교제자체이다.

 

특히 헬라어 ‘호라오’(ὁράω)는 경험적 체험적으로 보는 것이다. 찾아가서 보고, 만나서 보고, 참여해서 보고, 들어보고, 맡아보고, 만져보는 것, 이렇게 경험적 체험적으로 보는 것이다. 아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고,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뜻한다. 경험을 통해, 체험을 통해서 안다는 것은 교제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는 복’의 현재적 의미는 하나님과의 소통과 관계맺음, 곧 깊은 교제(친밀감)를 의미한다. 신자의 풍성함, 능력, 성숙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무급이지만 장관이상의 실력을 가진다. 최고 권력자와 친밀하기 때문이다.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에 있어서 중요한 조건이다.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하고 묻는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경배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시24:4~6).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의 자격에 대한 것인데, 한마디로 ‘깨끗함’이다. ‘손’(행위)이 깨끗하고, ‘마음’(생각)이 깨끗하고, ‘입’(언어생활)이 깨끗한 사람이다. 이렇게 ‘깨끗함’을 강조하는 것은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교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의 조건은 ‘깨끗함’이고, 이 깨끗함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의 복을 누릴 수가 있다. 또 하나 하나님과의 중요한 교제방법이 있다. 그것은 ‘기도’다. 기도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의 방법이다. 기도자의 자격 역시 ‘깨끗함’이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사1:15~17).

 

만남과 교제, 그 자체가 복이다. 그것도 나보다 유력하고, 크고 위대하고, 힘 있는 분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교제이다. 신자는 이 위대한 복을 소유한 사람들이고, 여섯 번째 지복은 이 복을 현재적 삶에서 누리는 비결에 대한 말씀이다. 그것은 ‘청결한 마음’이다. 내적 동기와 목적이 순수하고, 전심으로 사랑하는 한결같은 마음과 태도이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갖게 하고, 누리게 해준다. 주님은 흠도 티도 없으신 깨끗하신 분이시고, 깨끗한 모습을 사랑하신다. 청결한 마음은 결코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이고, 주님 자신을 우리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보는 하나님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알고, 어떤 하나님을 보고 있는가? 아브라함처럼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신실한 하나님인가? 야곱처럼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가든 항상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다윗처럼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인가?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른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이렇게 고백하였다.

 

‘오!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에는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치료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명상하는 것에는 모든 슬픔을 근절시켜 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슬픔을 잊고, 염려를 잊고 싶다면 신성의 깊고 깊은 바다, 하나님을 보는 깊고 깊은 바다에 잠겨 보십시오. 하나님의 광대함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편히 쉬다가 나오는 사람처럼 기운이 나고 생기가 돌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열심히 묵상하는 것보다 더 영혼에 위로를 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슬픔과 비탄의 굽이치는 파도를 그처럼 진정시키며 시련의 바람들을 평온하게 해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비참해지는 것은 우리 눈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날마다 힘을 잃고 주저앉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눈에 안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로 더렵혀져 있고, 마음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보이고 보여도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능력을 잃고 세상 염려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능력은 하나님을 밝히 보는데 있다.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 하나님과의 뜨거운 만남, 깊은 교제에 있다. 그리고 장래의 어느 날, 그 하나님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날을 기다리고 기대하면서 청결한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날마다 알아가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아름답게 가꿔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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