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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Ⅶ, ‘화평하게 함’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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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373회 작성일 11-06-2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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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Ⅶ, ‘화평하게 함’①

마5:1~12

2011. 6/26  08:00, 11:00

쫓겨 다니는 사람(driven person)

고든 맥도날드(G. Macdonald)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부름 받은 사람’(called person),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reacted person), 그리고 ‘쫓겨 다니는 사람’(driven person)이다. 겉으로는 사명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고, 열정적인 사람 같지만 마음의 평정을 잃고 자기 성공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 있다. 바로 ‘쫓겨 다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대표적인 예가 사울 왕이다. 사울은 다윗이 자신의 권좌를 위협한다고 생각하고 평생 그를 쫓아다녔지만 실은 스스로 쫓기는 사람이었다. 쫓아다니는 사람은 결국 쫓기는 사람이 된다. 쫓기는 사람의 특징은 외적인 성취와 욕심에 집착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된 모습에는 관심이 없고, 언제나 비정상적으로 바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사로잡혀 있고, 내면에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격렬한 분노를 안고 살아간다. 한마디로 삶이 늘 불안하고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이다. 내면의 질서가 뒤죽박죽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분주하게 쫓아다니지만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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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성공은 ‘3P’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인내’(Patience), ‘실천’(Practice), 그리고 ‘평화’(Peace)가 그것이다. 성공을 위해선 우선 인내가 필요하다. 시기나 질투, 비난을 비롯하여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얼마나 잘 참고, 견디느냐에 승부가 걸려있다. 다음은 실천이다.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구체적인 행동과 우직한 추진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평화다. 탁월한 인물일수록 어떤 노도광풍에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다(마8:24).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의 평화가 우선이다. 불안과 걱정은 만사를 어긋나게 만든다. 편안하면 일이 쉽다. 특히 이 평화는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에게도 절실하다. 그래서 주님은 평화를 개인을 넘어 공동체 안에서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곱 번째 지복으로 선언하셨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필수 영양소, 화평

염분은 우리 몸의 신진대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양소다. 염분이 부족하면 혈액이나 임파액, 소화액 등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근육의 수축력도 약해지고, 호르몬 분비에도 이상이 생기고, 병의 자가(自家) 치유능력도 떨어진다. 한 마디로 염분이 없으면 건강은커녕 생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염분을 제공해주는 소금을 아주 귀하게 여겼다. 왕들은 충성하는 신하에게 소금을 급료로 주기도 했다. ‘봉급’이란 뜻의 영어단어 ‘샐러리(salary)’가 라틴어로 소금을 뜻하는 ‘살라리움’(salarium)을 어원으로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소중한 소금에 빗대어 화평을 교훈하셨다. “.......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9:50). 몸의 건강을 위해 소금이 필요하듯, 관계에 있어서 화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이다.

 

화평은 모든 관계의 필수 영양소와 같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 나아가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화평’이 절대로 필요하다. 이는 인류역사의 거대한 과제이다. 이를 위해 뜻있는 사람은 누구나 노력하고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와 불화한 일이 생각나면 예물을 제단에 둔 채로 가서 먼저 형제와 화목한 뒤에 예물을 드리라고 가르치셨다(마5:23,24). 화평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시급한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는 주님이 주신 평안을 누리면서 ‘가능한 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는 것’(peace keeper)이고(롬12:18), 나아가서 ‘화평하게 하는 것’(peace maker)이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고후5:19)하신 소중한 ‘직분’(:18)이다.

 

화평의 직분

화평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다. 하나는 개인적인 영역으로 ‘마음의 평안(화)’이다. 다른 하나는 관계적인 영역으로, ①하나님과의 화평, ②다른 사람들과의 화평, 그리고 ③자연과의 화평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이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있어야 사람들과의 화평, 자연과의 화평,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가 있다. 화평은 인간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면 세상은 벌써 평화로운 곳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여기에 얼마나 많은 재화를 쏟고 있는가? 그런데 세상은 이를 비웃기라도 한 듯 미움, 갈등, 분열, 불화의 골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물론 이런 인간의 시도나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가 나온 것을 말한 것이다. 왜 그런가? 화평에 대한 이해, 접근방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화평은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다(약4:17).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관계를 우선하고, 하나님과의 화평이 모두와 화평을 이루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사실 화평은 철저히 우리 신자들의 몫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5:18)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화평이 ①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과, ②먼저 하나님과의 화평을 경험한 사람만이 화평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평을 신자에게 주어진 직분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교회와 신자의 삶이 화평을 깨는 쪽에 더 가까웠다. 미움, 갈등, 분열, 불화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고, 신자들이 앞장섰던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갈등과 분열의 종교, 신자를 화평의 훼방꾼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억울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에 대한 교회와 신자들의 진지한 회개와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은 화평의 직분자로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해야겠다. 무엇보다도 팔복은 세상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고, 일곱 번째 지복도 예외는 아니다.

 

화평하게 하는 삶

일곱 번째 지복은 화평에 대한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 ‘이웃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만드는 삶에 대한 것이다. 이는 이미 하나님과의 화평을 통하여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적인 면에서 화평을 ‘3R’로 정의할 수 있다. 즉 ①화해(reconciliation), ②회복(restoration), ③재결합(reunion)이다. 모든 관계는 항상 ‘화해-회복-재결합’할만한 가치가 있다. 삶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불화나 상처, 혹은 갈등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여 그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만일 너희의 삶을 조금이라도 변화시켰다면, 그리고 성령님과 교통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너희에게 의미가 있다면,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영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 친구가 되라.’(빌2:1~2)고 권하였다. 화평하게 한다는 것은 갈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피하고, 문제가 없는 것처럼 숨기고, 또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비겁한 태도다. 오히려 문제에 직면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화해-회복-재결합’(화해)으로 나아가야한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할 것’을 명령하신 주님께서 주신 이 ‘화평의 직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깨어진 관계 회복하기〉를 중심으로).

 

1.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께 이야기하라.

무엇이든 하나님이 1번이 되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묻고, 구하고, 찾아야 한다. 화평도 마찬가지다. 화평은 하나님의 선물로 끊어지고 파괴된 모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항상 먼저 다가가라.

피해자든 가해자든 상관없다. 주님은 우리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대하신다. 주님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와 불화한 일이 생각나면 예물을 제단에 둔 채로 가서 ‘먼저’ 형제와 화목한 뒤에 예물을 드리라고 가르치셨다(마5:23,24). 화평을 예배보다 우선순위에 두라고 말씀이다. 그만큼 화평이 중요하고, 시급하다는 뜻이다. 땅에서 풀려야 하늘에서도 풀리기 때문이다(마18:18). 그리고 그 중요하고 시급한 화평을 위해 내가 ‘먼저’ 찾아가고,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화해를 구하라는 것이다(마7:12).

 

3.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라

인내는 지혜에서 나오고 지혜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데서 나온다. 화평을 위해선 상대방의 감정을 배려해주어야 한다. 상대방의 감정을 공감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정서적 공감은 관계회복의 관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공감하는 것 쉽지 않다. 이 또한 희생이고,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화평은 없다. 그리고 그 어떤 희생도 주님의 희생을 따라갈 수 없다. 아무튼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는 것이 화평을 만드는 비결이다(마5:40,41).

 

4. 나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고백하라.

관계에서 일방성이란 없다. 관계의 화평은 진지하게 자신의 실수나 죄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교만은 화평을 무너뜨리는 원수지만 겸손한 자기 고백은 화평을 만드는 친구다. 물론 쉽지 않는 일이다. 악한 세상, 악한 사람들은 약점을 보이거나 고백하면 그것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개인적으로는 이용을 당하여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화평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겸손한 자기 고백은 화평이 싹트는 자리다.

 

5.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를 공격하라.

흔히 ‘죄는 미워하되 죄인(사람)은 미워하지 마라’는 말을 한다. 참으로 좋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의 실천은 쉽지 않다. 대개의 경우 문제가 있으면 누구의 잘못인가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서로 책임을 히피하거나 전가하고, 정죄하기에만 바쁘다. 그러면 결국 그 사소한 문제로 화평이 깨지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공격해야 한다.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함께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관계가 회복되고 화평이 싹트게 된다.

 

6. 할 수 있는 한 협력하라.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고 했다. 화평의 삶에 최고의 가치를 두라는 말씀이다. 사실 화평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협력은 화평을 만드는 중요한 방법이다. 불편한 사람일수록 자주 만나고, 협력할 필요가 있다. 물론 처음엔 ‘당신의 도움 따위는 필요없다.’고 역정을 낼 것이다. 그렇지만 한결같은 태도를 보면서 마음의 변화, 태도의 변화를 보이게 된다.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있다. 여기에 화평의 지혜가 있다. 아무리 귀한 자식이라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매를 들고, 미운 자식이라도 풍족하게 먹여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이 부모다. 이와 같은 부모의 마음을 갖는다면 어떤 불편한 관계도 극복되고 화평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록 불편한 관계일지라도 ‘미운 자식 떠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협력하면 반드시 화평의 문이 열릴 것이다.

 

7. 해결이 아닌 화해를 강조하라.

해결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화해는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문제가 해결되면 관계도 회복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제 문제가 해결됐으니 다시는 너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해결에만 몰두한 나머지 관계를 놓친 것이다. 의외로 이런 사례가 많다. 반면에 화평(해)이 이루어지면 문제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화해이고 화평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해결자보다 화해자가 되어야 한다. 항상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화해를 강조해야 한다.

 

평화의 아이(peace child)

신혼 초부터 싸우기 시작하더니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도 꾸준히 부부싸움 타이틀 매치를 이어가는 부부가 있었다. 이런 와중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까지 잃게 되자, 부부는 결국 이혼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각자 짐을 챙기다가 또 싸웠다. 이번에는 아이의 유품 때문이었다. 다 버린다고 버렸는데, 아이의 일기장이 한권 남아 있어서 그것을 서로 갖겠다고 싸운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이의 일기를 읽게 되었다.

 

‘엄마 아빠가 싸운 게 너무 싫다. 우리 엄마 아빠도 친구의 엄마 아빠처럼 사이좋게 살았으면 좋겠다.......싸우면 이혼한다는데, 엄마 아빠가 이혼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 내용을 읽은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붙잡고, ‘우리 이제 싸우지 말자. 이혼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행복하게 살자. 그래서 먼저 간 우리 아이 소원을 이루어주자. 우리 아이에게 떳떳한 부모가 되자.’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다짐을 했다. 죽은 아이가 이 부부를 회복시키고, 화해시킨 것이다. 이 아이는 이 부부에게 ‘평화의 아이’(peace child)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와 하나님, 우리와 우리 사이의 화해(평)를 위한 ‘평화의 아이’시다. 주님은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평화의 아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 maker)이 되기를 기대하신다. 이것이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신자와 교회에게 주신 직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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