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眞福八端)Ⅶ, ‘화평하게 함’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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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505회 작성일 11-07-03 16:27본문
진복팔단(眞福八端)Ⅶ, ‘화평하게 함’②
마5:1~12
2011. 7/3 08:00, 11:00
‘나’뿐인 사람
후삼국시대 견훤(甄萱)이나 궁예(弓裔) 모두 난세의 영웅들이었다. 하지만 둘 다 ‘평천하’(平天下)를 이루지 못했다. 궁예는 ‘수신’(修身)에 문제가 있었고, 견훤은 ‘제가’(齊家)에 문제가 있었다(이것은 저의 주관적인 평가임). 궁예가 스스로 ‘미륵’(彌勒)을 자처한 것은 심각한 심리적 결핍을 반증한 것이고, 결국은 미쳐서 포학을 일삼다 왕건에게 쫓겨나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견훤의 경우는 아버지와의 사이도 불화했고, 자식들과의 사이도 불편했다. 심지어는 아들들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그곳을 탈출해서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여 생을 마감했다. 결국 궁예는 마음의 평안을, 견훤은 가정의 화평을 이루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물론 다른 많은 요인들이 역학적으로 작용했겠지만)이것이 이들을 역사의 패배자로 만든 것이다. 만사 불여튼튼이라 했다. 몸과 마음이 튼튼하고 건강해야 한다.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 비결이 ‘화평’이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화평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성경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는 말씀으로 갈등과 불화를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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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갈등이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교회의 귀감이 되는 초대교회에도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행6:1), 우리 신앙의 모델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도 불화와 분열이 있었다(행15:36~41). 물론 이는 갈등이나 분열의 정당성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냥 우리의 현실과 한계를 말하고, 나아가서 화평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아무튼 그 누구라도 화평을 깨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심각한 죄다. 한마디로 ‘나뿐 사람’이다. 박노해 시인은 ‘나뿐 사람’을 ‘나’뿐인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하고, 화평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은 ‘나쁜 사람’, ‘나’뿐인 사람이다. 바로 교만한 사람이다. 주님은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화평을 만드는 사람을 찾으신다. 이런 사람을 기뻐하신다. 이는 ‘피스 메이커’였던 주님을 닮은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평의 훼방꾼, 사단(satan)
가정생활 세미나에서 어느 강사가 ‘부부싸움의 승자는 남편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사단이라.’고 했다.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나라의 분단으로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변 열강들이 득을 보는 것처럼 불화의 최대 수혜자는 우리가 아니라 사단이다. 불화는 사단을 제외한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그래서 사단은 수시로 우리 마음과 공동체에 불화의 씨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할 것은 마음의 평화, 관계의 화평을 깨뜨리는 것은 사단의 일이고, 사단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다툼이나 불화는 사단에게 우리 마음과 공동체를 그의 진지(陣地)로 내주는 것이고, 사단은 이를 통하여 우리 마음과 공동체를 무너뜨린다는 사실이다.
인류타락의 기원을 보여주는 창세기 3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뱀으로 위장한 사단이 ‘혼자’있는 하와에게 접근했다(1). 하와가 아담과 함께 있지 않고 이렇게 혼자였던 것은 이들 사이에 약간의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틈’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먼지가 들어오고 빗물이 들어온 것처럼 이런 ‘마음의 틈’으로 사단이 끼어든 것이다. 사단은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와의 마음을 무너뜨리고(4,5),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2:17)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 열매를 따서먹었다(6). 그리고 이제 사단의 하수인이 된 하와가 그 열매를 남편에게도 주어서 먹게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졌다(8). 그러자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고 고백했던 이들 부부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12), 그 동안 벗고 살아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부끄러워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8). 부부관계의 화평이 깨진 것이다. 또한 그 축복의 땅이 이들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어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야만 먹고 살 수가 있게 되었다(17). 자연과의 화평도 깨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안(10)과 영생(19)을 상실하고, 에덴에서 쫓겨나고(24) 말았다. 아담부부의 불화를 틈타 이들을 철저하게 파괴시킨 사단은 파괴자이고, 화평을 깨는 화평의 훼방꾼이다. 우리 마음을 파괴하고, 우리 건강과 삶을 파괴하고, 우리의 믿음과 영혼을 파괴하고, 모든 관계를 깨뜨리는 파괴자이다. 마음의 평안과 관계의 화평을 깨는 화평의 훼방꾼이다.
화평을 깨는 것들
반면 예수님은 ‘평화의 아이’(peace child)로 오신 우리의 ‘peace maker’시다. 예수님을 통하여 사단과 그의 권세가 무너졌고, 하나님의 평안과 화평은 다시 회복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평을 깨는 일들이 존재한 것은 사단이 우리 안에 심어놓은 그의 ‘잔당’(殘黨)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잔당을 처리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른다. 신앙생활은 곧 이 성화의 과정이다. 이 시간에는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화평의 삶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단의 잔당, 즉 ‘화평을 깨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일치와 연합, 화평을 깨는 것들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첫째, 다툼(selfish ambition)이다.
다툼을 헬라어로 ‘에리데이아’(έριθεία)라고 하는데, ‘이기적인 야망, 다툼’이란 뜻이다. 야망과 다툼이 같은 단어이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은 ‘다툼’(quarrel)으로 번역했고, 영어 성경은 ‘이기적인 야망’으로 번역하고 있다. 사실 다툼이란 ‘이기적인 야망 때문에 생기는 충돌’이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야망(경쟁)은 모든 다툼의 원인이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무척 아끼고 사랑했던 교회, 바울이 매우 칭찬했던 교회다. 이런 교회가 중요한 여성 리더들 사이의 불화로 교회의 연합과 일치, 화평에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이 문제의 중심에 여성 리더들의 ‘이기적인 야망’이 있었다. 이 때문에 서로 ‘다툼’이 있었던 것이다(빌4:2).
이기적인 야망은 필연적으로 다툼을 초래한다.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 앞에서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그 발단은 요한과 야고보 형제 때문이었다. 이들 형제의 어머니가 혈연관계(주님의 이모)를 내세워 주님께 부탁을 했다. 주님께서 왕이 되시면 두 아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혀달라는 치맛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소위 ‘이기적인 야망의 요청’이었다. 이를 알게 된 제자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들 역시 같은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선수를 치자 폭발한 것이다. 뜻이 같으면 화합하지만 이익이 같으면 싸운다고 했다(論語, 君子喩於義→和而不同, 小人喩於利→同而不和). 주님은 죽음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제자들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품고 추태를 보인 것이다. 누구든지 이기적인 야망에 사로잡히면 독한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갈등과 다툼에 빠지게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의 마음(심정), 슬픔,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기적인 야망을 위해서 싸울 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죽으시기 전날 저녁 식사 후에 세족식을 통해서 섬김을 통해 서로 귀히 여기며 일치와 연합에 힘쓸 것을 몸소 보여주셨고(요13:), 또한 제자들의 ‘하나 됨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셨다(요17:).
아무튼 이기적인 야망, 곧 다툼은 화평을 깨는 주범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툼’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전쟁’(πόλημος, μάχη)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다(4:1). 어쩌면 전쟁보다 더 심각한 것이 신앙공동체에서의 다툼이다. 전쟁은 육적인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지만 신앙공동체에서의 다툼은 영과 육을 파괴하고, 영적인 재산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야망을 꺾고 화평의 삶을 이루는 비결은 소극적으로는 ‘이기적인 야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갈5:24)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고전10:31)과 이웃의 유익(:33)을 위해 힘쓰는 것이다.
둘째, 허영(vain conceit)이다.
사교계의 두 부인이 자기 조상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한 부인이 자기 조상은 멀리 알렉산더 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자랑하면서 다른 부인에게 그녀의 조상은 어떤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우리 가문의 족보는 노아홍수 때 다 떠내려가 버렸거든요.’
조상자랑으로 자기위신을 세우려던 사람에 대한 이 부인의 응수가 실로 통쾌하다. 아마도 이 부인의 조상이 질문한 부인의 조상에게 뒤떨어질지는 몰라도 자신감으로 말한다면 이 부인이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대체로 자기 조상자랑 하는 사람일수록 변변치 못한 경우가 흔하다. 심리학에 ‘네임 드로퍼’(name dropper)란 말이 있다. ‘간접적인 자기제시’라고 하는데, 잘 알려진 사람의 이름을 들먹여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그 사람을 잘 아는 척, 그 사람과 무척 친한 척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이것이 곧 허영이다.
허영은 ‘자기 과시적 욕망’이다. 자기에게 없는 것, 있어도 자기 것이 아닌 것, 또는 자기에게 있지만 자기 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에게 잘 보이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욕망이 허영이다. 한 마디로 ‘허위의식’이고, ‘위선’(허영과 위선은 쌍둥이)이다. 좋은 평판과 명예와 영광을 얻기 위해 쓸데없는 겉치레와 자존심을 내세우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삶의 자세다. 물론 자기 딴엔 잘한다고 하는 것일지 모르나 결국은 자기 이익과 세력을 만드는 것으로 끝을 낸다. 이런 사람은 자기 뜻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가는 곳마다 ‘화평을 깨고’(peace break), ‘문제만 만드는 사람’(trouble maker)이 된다. 우선적인 관심이 자신이고, 자신을 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만 관철되어야 하고, 자기 목적만 성취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화평이 설자리가 없다. 사단이 사람을 무너뜨릴 때 사용하는 강력한 무기가 ‘허영심’이다. 괜한 일에 허영심을 갖게 하여 자신도 공동체도 위기에 빠뜨린다(행5:1~11). 그러므로 허영을 버리고 화평을 이루는 비결은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믿음의 자세에 있다(빌3:8). 주님으로 만족하고, 주님으로 자랑을 삼으면 다른 것에 기대어 자기를 들어내고자 하는 허위의식을 극복하고 화평의 삶을 누릴 수 있다.
place maker vs peace maker
미국에 번역 성경의 ‘오자’(誤字)를 찾아내서 바로잡는 회사가 있다. 그들이 찾아낸 오자들 중에, ‘go and sin no more’(요8:11,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가 ‘go and sin on more’(가서 계속 죄를 지어라.)로 된 것을 바로잡고, ‘Let the children first be filled'(막7:27,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가 ‘Let the children first be killed'(자녀를 먼저 죽일지니)로 된 것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본문 9절에서 ‘peace maker’(화평하게 하는 자)가 ‘place maker’(장소를 만드는 사람)로 된 것을 바로잡았다. 단순히 글자 한 자의 차인데, 그 한 자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잘 보여준다. 화평하게 하는 것과 화평을 깨는 것도 이와 같은 ‘사소함’에 있다. 작은 사랑, 작은 위로, 작은 격려, 작은 배려, 작은 나눔과 헌신이 화평을 가져오고, 사소한 욕심, 사소한 실수, 사소한 행동, 무심코 던진 사소한 말 한마디, 사소한 반응으로 화평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세상에는 ‘peace maker’와 ‘place maker’가 있다. 화평을 만드는 사람, 화평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있고, 장소를 만드는 사람,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사람이다. 세상은 이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고, 이들의 이기적인 야망과 허영 때문에 갈등과 불화가 심화되고, 사단의 점령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시대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시대는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오늘날은 물건을 팔수 있는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영역확장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모든 불화와 다툼의 배후에는 이것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place maker’가 아니라 ‘peace maker’가 되어야 한다. 장소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사람, 화평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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