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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Ⅶ, ‘화평하게 함’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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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735회 작성일 11-07-10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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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Ⅶ, ‘화평하게 함’③

마5:1~12

2011, 7/10  08:00, 11:00

다가 올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유대 현인들은 다가 올 세상에도 남아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이웃과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랍비가 많은 사람이 다니는 거리에 서 있을 때, 엘리야가 그의 앞으로 왔다. 랍비가 엘리야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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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에 앞으로 올 세상에서 기업을 받을 사람이 있습니까?’

 

‘없소.’

 

조금 후에 두 사람이 다가 왔다. 그 때 엘리야가 ‘이 사람들이 다가 올 세상에서 기업을 받을 사람들이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랍비가 그들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즐겁게 떠드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괴로움이 있는 것을 볼 때, 그를 즐겁게 해 줍니다.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을 볼 때에는 화해시켜 줍니다.’

 

유대 현인들이 현대의 코미디언이나 개그맨 같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몰라도 ‘즐겁게 떠드는 사람’이란 유머가 풍부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그래서 화평을 도모하는 사람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팍팍한 삶에 웃음과 화평의 조미료를 쳐주는 사람, 하나님도 퍽 기뻐하시리라 여겨진다. 다가 올 세상의 주인공은 더불어 화평하고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다. 성경은 ‘화평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고 했다. 하나님은 “평강”(롬15:33, 히13:20)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의 나라이다. 때문에 이런 사람이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이에서 화평을 이루는 방법(6/26)과 더불어 화평을 깨는 것들(7/3)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이 시간에는 화평하게 하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화평의 복

화평하게 하는 자가 받을 복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동시에 받을 복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1. 하나님께 아들로서 합당한 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팔복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선포된 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요1:12) 사람들에게 주어진 복이다. 그리고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구원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선한 행위(화평하게 하는)에 근거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합당한 사람,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다. 소위 ‘~다운 삶’, 혹은 ‘~다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다.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5:44,45)라고 하셨고, “너희가 열매를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고 하셨다. 여기서도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열매를 맺어야 ‘주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말씀하고 있다. 이 역시 ‘자녀다운’ 삶, ‘제자다운’ 삶을 말씀하신 것이고, 이를 통해 ‘자녀다움’, ‘제자다움’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화평하게 하는 것은 신자의 ‘직분’(고후5:18)이고, 주님의 간절한 ‘당부’(:19)이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인정받는 것이다.

 

사실 자녀의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은 부모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 아버지를 권좌에서 쫓아내고 금산사에 유폐시킨 후백제 견훤왕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아들들이 이런 패륜을 저질러 자신과 아버지와 나라를 망하게 만든 것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자 아버지를 향해 분노의 칼을 겨누게 된 것이다. 신자의 행복, 신자의 기쁨도 주님께 인정받는데 있다. 그것은 화평하게 하는 사람, 화평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2.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다.

제자들과 이 세상에서 마지막 식사를 마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다락방에서 긴 고별설교를 하셨다(요14:~16: 다락방 강화). 주님이 말씀을 시작하셨는데, 갑자기 빌립이 끼어들어 주님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요14:8)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주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고 반문하셨다.

 

이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빌립의 요청은 우리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외침이다. 세상은 우리를 향하여 ‘주님을 보여 달라’고 외치고 있다. 사실 세상이 우리 신자와 교회를 향하여 분노한 것은 우리를 통하여 주님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보여주지 않고 헛된 일만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분노로 바뀐 것이다. 이런 세상을 향하여 우리도 주님처럼 ‘나를 본 자는 주님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주님을 보이라 하느냐’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나의 말과 행동, 삶에서 주님이 드러나야 한다. 주님이 드러나야 주님의 자녀로, 주님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있다. 물론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증거의 사명이 있고, 가장 확실하고 좋은 증거는 삶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건강한 신앙은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아들을 헬라어로 ‘휘오스’(υιος)라고 한다. 이는 ‘아버지의 성품을 공유한 사람’이란 뜻이다. 자녀는 부모의 성품을 공유한 사람이다. 때문에 삶으로 부모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 신자는 주님의 성품을 공유하고 있는 주님의 자녀다. 그러므로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야 한다. 그 방법이 곧 ‘화평하게 하는 삶’이다. 화평하게 하는 우리의 삶을 보고 세상은 주님을 보게 되고, 우리가 주님의 자녀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화평을 구하고(벧전3:11), 화평함을 좇는 삶(히12:14)을 살아야 할 이유이다. 존 브로더스(John A. Broadus)는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일보다 더 주님을 닮은 일은 없다.’고 했다. 그것은 화평이 주님의 중요한 성품이기 때문이다(롬15:33, 히13:20).

 

3.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러러 칭찬과 기림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에서 ‘일컬음을 받다’는 말은 ‘우러러 칭찬하거나 기리어 말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아들로서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우러러 칭찬과 기림’도 받게 된다.

 

화평의 길이 쉽지 않다. 끊임없이 자신의 야망과 허영을 포기해야 하는 희생이 요구되는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면서 화평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우러러 칭찬과 기림’을 받게 된다. ‘노벨 평화상’이 좋은 예다. 이는 화평을 위해 일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그의 수고를 위로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주는 상이다. 그런데 노벨상의 여러 부문 중에서 평화상이 가장 영예롭다. 화평을 소중히 여기고, 이 화평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본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이삭은 ‘화평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잠시 블레셋 지역에서 생활할 때다(창26:). 자신과 가축들을 위하여 우물을 팠는데, 그 지역 목자들이 시비를 걸면서 그 우물을 빼앗았다. 이삭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매번 그들에게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팠다(:20,21). 사실 그 당시 우물을 파는 것은 대공사였다. 사막지역이라 물의 근원을 찾기가 힘들었고, 깊이 파야 물을 얻을 수가 있었다. 우물을 파는 도구 또한 변변치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힘들여서 얻은 우물을 번번이 양보를 했다. 그렇다고 저들과 싸울만한 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화평을 위해서 큰 희생을 감수하며 양보한 것이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더 이상 다툴 필요가 없는 ‘넓은 곳’(르호봇)으로 그를 인도하셨다(:22). 또한 그 지역 왕이 군대 장관과 함께 이삭을 찾아와 평화동맹을 제안했다. 떠돌이에게 본토박이가 먼저 찾아와 화평을 제안한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은 그들이 이삭이 어떤 사람인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삭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28).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지 못한 못난 신자는 세상을 따라 살기에 바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신자는 세상도 모범으로 삼고 싶고, 사귀고 싶어 한다. 바로 이것이 화평하게 하는 사람의 특징이고, 복이다. 그러므로 이삭처럼 화평의 사람은 삶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과 기림을 받게 된다.

 

화평을 구하는 기도

십자군전쟁이 일어날 무렵(13세기 초), 유럽의 각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슬람에 대한 미움과 증오의 설교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 마음속에 ‘이슬람을 죽이자.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이슬람을 몰살해야 한다.’는 미움과 증오로 꽉 차기 시작했다. 결국 그 증오가 십자군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십자군 행렬을 바라보면서 어느 젊은 수도사가 탄식하며 외쳤다.

 

‘이 전쟁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미움과 적개심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전쟁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패배할 것이다.’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죽이러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도 나름대로 십자군을 조직했다. ‘평화의 십자군’이다. 칼과 창 대신 성경을 들고 적군을 품에 안으며 그들에게 사죄했다. 이 젊은 수도사는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훗날 유명하게 된 기도를 드렸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이 사람은 그 유명한 아씨시(Assisi)의 ‘성 프랜시스’(St. Francis)다. 힘의 논리로 평화(화평)를 논하는 사람들에게 프랜시스의 모습은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구의 모습이 화평을 위한 삶이었는지는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역사는 십자군전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전쟁영웅들에 대해선 침묵하면서도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하물며 세상도 화평의 사람을 기억해주는데 화평의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받는, 그리고 받을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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