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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Ⅷ, ‘의를 위한 박해’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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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896회 작성일 11-07-2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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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Ⅷ, ‘의를 위한 박해’②

마5:1~12

2011. 7/24  08:00, 11:00

오향철학(五香哲學)

중국 전통 육아법에 ‘오향’(五香)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아이가 자랄 때, 신맛(초)과 짠맛(소금)과 쓴맛(黃連가루)을 차례로 맛보게 한다. 그리고 가시로 혀끝을 따끔하게 찔러 아이로 하여금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런 다음 단맛(설탕)을 보인다. 이것이 ‘오향철학’이다. 아이가 단맛을 보기 위해서는 신맛과 짠맛, 쓴맛, 그리고 아픈 고통을 겪어야 함을 은연중에 터득시키는 교육방법이다. 그렇다. 성숙이나 성장, 성취와 성공, 행복과 같은 인생의 달콤한 열매는 쉽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처럼 인생의 수많은 고통을 경험한 후에 주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얻어진 것이라야 귀하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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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교육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곧 ‘아픔의 부재’이다. ‘아픔의 부재가 곧 행복’이라는 왜곡된 자세가 문제이다. 물론 자녀의 아픔과 고통, 자녀로 고생하는 것을 좋아할 부모는 없다. 그렇다고 자녀를 아픔으로부터 보호하려고만 하는 것은 근시안적이고 성숙하지 못한 태도이다. 갈등, 오해, 따돌림, 실패 등 인생의 쓰디 쓴 길거리에서 아픔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자녀가 스스로 울음을 그치고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성급하게 뛰어가서 안아주고 달래주지 않는 것, 이런 ‘사랑의 방임’이 필요하다. 사실 아픔과 고통은 자녀가 건강한 인격으로 자라기 위한 예방주사와 같은 것이다. 아기의 예방주사를 좋아할 부모는 없다. 그러나 그 아픔이, 앞으로 당할 더 큰 아픔을 방지하는 것임을 알기에, 아이가 주사바늘에 기겁을 하면서 찔려도 그것을 막지 않고, 도리어 그 고통을 받도록 아이의 팔을 힘껏 붙잡는다. 그것은 반드시 넘어야 할 필요한 아픔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를 당신의 합당한 자녀로 양육하시고자 ‘영적 오향법’을 사용하신다.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통과하고, 광야를 통과한 다음 가나안 복지를 허락하셨다. ‘고난’이란 풀무를 통과시킨 다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6)고 했다. 고난이나 박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때문에 주님도 고난을 여덟 가지 지복 중 하나로 말씀하신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10).

 

주님을 위한 고난의 중요성

지난 시간에는 ‘더욱 가치 있는 고난’으로 주님을 위한 고난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었는데, 이 시간에는 주님을 위한 고난의 ‘중요성’, 즉 고난의 특징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미 지난 시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고난은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는 모든 고난은 그 나름의 ‘중요함’이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면 더욱 가치 있는 고난으로서 주님을 위한 ‘고난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1. 고난은 주님께 충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용광로가 순금과 찌꺼기를 구분해 주고, 도가니가 순은과 불순물을 구분해 준다. 보석은 어둠 속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하고, 충신은 위기에서 그 가치를 드러낸다. 믿음도 평소에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이 쉽지 않다. 그러나 불같은 고난이 닥쳐보면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금방 알 수 있고, 또한 그 인격도 알 수 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의 차이가 ‘폭풍우와 홍수’를 통해서 드러났던 것처럼 말이다(마7:24~27).

 

고난은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시켜 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사랑하고, 충성하는 사람을 위해선 어떤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주님을 위해,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 박해 받은 것을 자랑스럽고 기쁘게 여겼다. 그들은 핍박을 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복음을 전하는 자로 합당히 여김을 받은 증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행5:41).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것처럼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고난의 길을 고집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님을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께 자신의 심장을 뽑아서 드릴 수 있는 충성스러운 마음 때문이다.

 

고난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의 증거다.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캅’(Polycarp, 69-155)이라는 교부가 있다. 안토니우스 피우스(A. Pius) 황제 때 서머나에서 10여 일간 신자에 대한 처참한 박해가 있었다. 굶주린 사자들이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었던 원형경기장에는 군중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고, 수많은 신자들의 팔다리, 창자와 오장육부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대지는 축축하게 젖은 채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당시 폴리캅은 이 서머나교회 감독이었고, 86세의 고령이었다. 그 역시 이 때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총독이 그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설득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그래서 결국 그는 화형(火刑)을 당하고 말았다. 폴리캅은 순교로서 주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충성을 증명한 것이다.

 

2. 고난은 선지자들과 꼭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신앙의 길이 좁은 문, 좁은 길(마7:13,14)이라고 하셨다. 고난의 길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하셨다. 고난을 각오해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고난의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이고, 모든 주의 선지자들과 사도들, 신앙의 선배들이 걸었던 길이다(12).

 

그러므로 고난은 주님이 가신 길을 꼭 같이 걷고 있는 것이고, 모든 ‘주님의 사람들’(선지자들과 사도들, 신앙의 선배들)이 걸었던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①고난은 나만 홀로 당한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겪었던 ‘일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신자는 고난을 이상한 일이 아닌 당연한 일로 받아야한다. ②고난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바르게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뜻이다. 신앙생활에서 늘 점검하며 고민해야 할 것은 지금 주님을 바로 섬기고 따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점검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믿음의 항로를 벗어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염려를 넘어서게 하는 것이 고난이다. 고난은 주님이 가신 길을 ‘꼭 같이’ 걷고 있는 것이고, 모든 주님의 사람들이 걸었던 ‘같은 길’이기 때문이다. ③고난은 주님의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뜻이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을 ‘길동무’(companion)라고 한다. 이 말의 영어단어는 ‘빵’(식사)을 같이 나눈다(cumpanis)는 라틴어에서 왔다. 한 마디로 서로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한 고난은 우리가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주님의 사람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

 

멀리는 구약시대 선지자들에서부터 사도들과 복음전도자들, 그리고 수많은 주님의 사람들이 주님을 위한 고난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난을 주님이 가신 길을 꼭 같이 걷고, 모든 주님의 사람들이 걸었던 같은 길을 가는 가장 확실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성경은 주님을 믿으면 고난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고,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 더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믿으면 모든 것이 순적하여 부유해지는 것보다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영광(기쁨)이 되고, 이웃에게 유익(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올바른 삶을 살려다보니 고난과 박해를 받는 것이다. 주님도, 주님의 사람들도 모두 그랬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 것은 주님과 그의 사람들이 걸었던 같은 길을 걷는 것이다.

 

3. 고난은 영광스러운 축복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이다. 고난을 영광스러운 축복으로 믿는 종교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특징은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에 역행한다는 뜻도 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것을 ‘치욕을 당함’이라고 하지 않고, ‘영광을 받음’이라고 했다(요7:39, 12:16,23). 그리고 주님이 죽으신 후 ‘아래(지하세계, 음부)로 내려감’이라고 하지 않고, ‘위로 들림’이라고 했다(12:32, 18:32).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주님의 고난이 그 자체로서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뜻이다. 신자가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의로운 고난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고난 자체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은 멀지 않는 장래에 큰 영광을 누릴 것이고, 이 세상에서도 이미 세상이 알 수도, 줄 수도 없는 큰 영광을 누리게 된다(벧전4:13). 영광스러운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영광스러운 축복이 무엇인가?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미래적 의미와 현재적 의미가 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의미는 ‘장소적’(영역이나 범위)이고. 현재적 의미는 ‘통치적’(지배, 주권)이다. 성경에는 이 두 가지가 섞여서 사용되고 있는데, 본문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누린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적 지배와 주권을 누린다는 뜻이다. 특히 고난과 박해의 현장에서 주님의 주권이 더욱 강하고 분명하게 나타난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단3:24~27, 6:16~24, 행7:55~56. 12:5~8, 16:25~27, 27:22~26 등). 이렇게 고난의 자리는 주님의 통치와 지배, 주권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고, 또한 주님을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은 이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사실 주님께서 이렇게 도우시며 응원하시기에 그 모진 고난과 무서운 박해에서 승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난이 복이라, 박해를 축복이라고 말 할 수가 있고, 고난 받는 것을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수많은 주님의 사람들이 고난이나 박해를 두려하지 않고 도리어 기쁘고 달게 받은 것이다.

 

삿갓조개(limpet)

삿갓조개라고 불리는 조개가 있다. 이 조개는 바위나 배 밑에 붙어서 사는데, 바위를 깰 수는 있어도 바위에 붙은 조개를 뗄 수가 없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삿갓조개가 이렇게 강하게 붙어 있는 이유 중에 하나로 ‘파도’를 꼽는다. 파도의 힘은 시속 500㎞의 엄청난 바람과 비슷한데, 그렇게 강한 파도 속에서 오랜 세월을 견디다보니 바위와 한 몸처럼 밀착하여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고난이나 박해는 힘들고 어려운 시련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강력한 파도가 삿갓조개로 하여금 바위에 단단히 붙어있게 한 것처럼 고난이나 박해 또한 우리를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도구이다. 주님만 온전히 바라보고 붙들게 하는 방편이다. 고난 때문에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고난 때문에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되고, 더욱 사모하며 기도하게 된다. 그래서 강하게 주님께 묶이게 된다. 그래서 고난과 박해가 중요한 것이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찬송가 373장 2절

 

이 세상 고락 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주소서. -찬송가 373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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