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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Ⅷ, ‘의를 위한 박해’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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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195회 작성일 11-07-3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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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Ⅷ, ‘의를 위한 박해’③

마5:1~12

2011. 7/31   08:00, 11:00

골공(骨空)

높이 나는 새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버린다고 한다. 심지어 뼈 속까지도 비워야 한다. 골공(骨空)이다. 무심히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가 주는 교훈이다. 채우기는 쉬워도 버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채우기에만 급급한 것이다. 삶의 비극, 세상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채우기 위해 살아온 삶이 우리를 얼마나 무겁게 하는지, 우리를 얼마나 고단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지, 얼마나 자주 유혹에 넘어지고 주저앉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주위 사람들과 화평을 깨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향하여 더 높이 날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곧 채우기에만 급급한 우리 마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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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교수가 선(禪)을 배우기 위해 한 선사(禪師)를 찾아갔다. 선사는 교수에게 차를 대접하고자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런데 잔에 차가 넘치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차를 붙고 있었다. 이를 보고 교수가 선사에게 차가 넘치고 있다고 말하자 선사가 말했다.

 

이 찻잔처럼 그대의 마음은 자신의 생각과 고집, 자만으로 가득 차 있소. 그대가 마음의 잔을 비우지 않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선이 무엇인지 일러줄 수 있겠소?

 

수용할 빈자리가 있어야 한다. 빈손이 되어야 받을 수 있고 붙잡을 수 있다. 찻잔처럼 가득 차 있으면 아무리 듣고 배워도 넘칠 수밖에 없다. 비워진 잔은 다시 차기 마련이다. 그러니 비울수록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비움은 잃어버림이 아니라 영역을 확장하고 폭을 넓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움의 삶’에 가장 좋은 약이 있다. ‘고난’이다. 끝없이 채우려고만 하는 욕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려고 하는 자만심을 모두 비우는, 그래서 새처럼 뼈 속까지도 비우는 삶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고난이다. 뜨거운 불이 쇠에 붙은 녹을 제거하고, 심한 바람과 거친 파도가 물속에 있는 모든 침전물을 걷어내는 것처럼 고난 역시 세상적인 욕심을 내어놓게 하고, 세상에 대한 소망의 줄을 끊어지게 하여 주님을 향한 빈 마음 빈손이 되게 한다. 주님을 향해 비상(飛上)하도록 한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온다.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 일세.

주께서 오라하시면 내 본향 찾아가리. -(485장 4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괴롭게 하는 사람들, 견디기 힘든 아픔들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괴롭히던 사람, 견디기 힘든 그 아픔들이 나를 비우는 ‘골공(骨空)의 삶’을 배울 수 있도록 해준 은인이다. 그러니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성경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고 말씀하신다. 고난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선사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가끔 빵 대신 벽돌을 던져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원망하면서 그 벽돌을 차다가 오히려 발가락이 부러지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기막힌 집을 짓기도 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모쪼록 우리 모두는 주님이 주시는 시련의 벽돌, 아니 그보다 더 작은 시련의 돌멩이를 발로 걷어차다가 발가락뿐만 아니라 인생을 망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오히려 그것을 주춧돌 삼아 기막힌 인생의 집, 믿음의 집을 지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하나님께 우리에게 던져주신 고난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

 

고난에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 정말 쉽지 않는 일이다. 작은 의견충돌에도 마음이 먹먹하고, 작은 오해에도 가슴이 시리고 아픈데, 무시만 당해도 화를 참지 못하는데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것이 고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성경 본문들의 일반적인 가르침이다(약1:2, 벧전4:13 등). 그렇다면 어떻게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을까? 모든 고난은 뜻이 있다고 했다. 바로 그 ‘뜻’(의미와 목적)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은 ‘결과’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흔히 우리는 ‘어떤 사건’ 때문에, 혹은 ‘어떤 사실’ 때문에 불안하고 걱정이 되고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생의 불안이나 염려, 고통의 원인은 ‘어떤’ 사건이나 사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확실성’에서 온다. 사람들은 병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사실 병 자체는 두려운 것이 아니다. 병으로 인해 생기는 불확실한 일들이 두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감기에 걸렸다고 걱정하지 않는다.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으면 낳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면 염려하고 걱정하게 된다. 혹시 이것이 감기가 아니라 치명적인 병은 아닐까 하는 불확실성에 사로잡힌 까닭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것도 결과를 예측할 수가 있고, 확실성을 담보할 수 있다면 두려움도 염려도 사라진다. 힘든 항해도 목적지에 안전한 착륙만 보장되면 오히려 그 어려움들을 즐겁게 도전하면서 해쳐나갈 수가 있다. 산모가 임신에서부터 산출에 이르기까지 그 고통스러운 모든 과정을 즐겁게 견뎌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새 생명의 탄생’에 대한 감격스러운 결과를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난도 마찬가지다. 고난의 결과를 분명히 알면 어떤 고난도 참고 견디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에서 고난의 결과를 (추상적이지만)분명하게 제시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12).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고, 주님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사람에게 주실 상이 ‘크다’는 것이다. 장차 주께서 주실 ‘큰 상’이라는 고난의 결과를 기대하며 현재의 고난에 직면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고난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될 것이고, 고난 앞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다.

 

어떻게 고난의 뜻을 결과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무튼 주님이 내게 주신 고난의 결과를 확신하면 내게 닥친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된다. 1㎏짜리 금괴를 준다며 지하 10m를 파라면 누가 그 일을 마다할까? 오히려 기쁘고 즐겁게 해낼 것이다. 이는 결과가 너무 분명하고 좋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다. 그러면 어떻게 고난의 뜻을 결과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성경이 가장 좋은 텍스트이고, 성경에 나온 인물들이 가장 좋은 모델이다. 야고보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0,11).

 

성경에 나온 인물을 본으로 삼으면 고난의 결과를 예측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고난의 의미와 목적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풀무불 고난은 자신을 신이라 자칭하는 바벨론 제국의 왕 앞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심과 그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게 되었고(단3:), 모함하는 무리 때문에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의 고난은 모두에게 그의 신실성과 충성심,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증하는 결과가 되었다(단6:). 앗수르 대군의 침략과 삼일 후면 죽으리라는 유다왕 히스기야의 고난은 기도의 위대함을 보여주게 되었고(사36:~38:), 로마로 호송 중이던 바울이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나 고난을 당한 것은 배 안에 있던 276명의 생명을 구원하는 결과를 낳았다(행27:). 그리고 야고보가 소개한 욥은 고난을 통하여 사단의 의도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존재(욥42:5)와 축복(42:12)을 깊이 경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성경에 나온 인물들을 통하여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결과를 예측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내게 주신 고난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가 있고,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다.

 

춘화현상(vernalization)

동남아(東南亞)에서 온 사람이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개나리꽃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귀국하면서 그는 개나리 가지 몇 개를 꺾어가지고 가서 자기 집 마당에 심었다. 기름진 토양, 맑은 공기, 좋은 햇빛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보다 더 무성했다. 하지만 꽃이 피지 않았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원인은 그곳에 겨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겨울을 지내야 꽃이 피거나 열매가 맺는 것을 ‘춘화현상’(春化現象)이라고 한다. 개나리 외에도 튤립, 히아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열대지방의 벌은 꿀을 모으지 않는다고 한다. 벌이 꿀을 모으는 이유는 꽃이 없는 계절을 대비하기 위함인데, 사철 꽃이 피니 꿀을 모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류도 따뜻한 남반구 사람들보다 추운 북반구 사람들이 더 잘 산다. 겨울을 견디며 생존력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모두가 춘화현상이다.

 

인생은 춘화현상의 꽃과 같다. 눈부신 인생의 꽃은 인생의 혹한(酷寒)을 거친 뒤에야 꽃망울이 맺히는 법이다. 인생의 열매는 마치 가을보리처럼 겨울을 거치면서 그 열매가 더욱 풍성하고 또 견실해진다. 인생의 꽃과 열매가 맺히는 인생의 봄은 언제나 다소의 매듭 위에 임한다. 고난은 분명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고난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또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필요해서 허락하신 일이다. 그러니 그 결과는 반드시 “의와 평강의 열매”(히12:11)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기도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이런 자세가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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