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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영성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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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639회 작성일 11-08-0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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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영성의 특징

마5:1~12

2011. 8/7   08:00, 11:00

일상의 가치에 눈을 떠라.

한 미국인이 멕시코를 방문하여 시장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양파 20줄을 걸어 놓고 팔고 있는 인디언 노인을 발견했다. 그는 노인과 양파 흥정을 시작했다. ‘한 줄을 사면 얼마고, 두 줄을 사면 얼마나 깎아 주겠느냐?’고 물었다. 약간만 깎아준다고 하자. 그러면 ‘20줄을 모두 사면 얼마에 주겠냐.’고 했다. 그러자 노인은 ‘팔지 않겠다.’고 했다. ‘왜 안파냐?’ ‘당신은 양파를 팔러온 사람이 아니냐!’고 그가 다그치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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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당신에게 이것을 다 팔면, 나는 여기 날 만나러 오는 내 친구도 못 만나고, 내가 좋아하는 이 시장의 아이들도 못 만나고, 이 시장에 쏟아지는 아름다운 햇빛도 구경 못하고, 내 하루의 인생을 잃어버린다.

 

참으로 충격적인 답변이다. 그저 모든 것을 경제적 논리로 접근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인디언 노인의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노인에게서 배워야할 소중한 것이 있다. ‘일상’(日常)의 중요함이다. 이 노인에게는 양파를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터에서 일어나는 일상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친구, 아이들, 장터의 풍경을 즐기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미국인은 이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 이 시간, 지금 드리고 있는 이 예배가 얼마나 소중하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한다. 실은 일상이 기적인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일상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당연한 것은 없다. 문제는 이런 우리의 생각이 이 소중한 것들을 그냥 흘러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이런 일상성의 가치에 눈을 떠야 한다. 그러면 내 삶과 태도를 포함해서 주변이,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이 달라질 것이다. 오늘은 팔복강해 마지막 시간으로, 이 팔복영성의 특징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팔복영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 ‘일상성’(日常性)이다.

 

일상이 ‘성소’(聖所)다.

신앙은 일상적인 삶 전체의 문제이다. 건강하고 올바른 신앙은 일상을 통해 주님의 숨결을 느끼고 주님을 체험하고 주님을 만나고, 그 일상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챨스 스윈돌(C. Swindoll)은 신자들에게 ‘월요일 아침 세상 속에 세워진 강단’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교회 안에서의 삶만큼 교회 밖에서의 일상적인 삶 또한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가정이 직장이 일터가 곧 거룩한 성소라는 뜻이다. 즉 성소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교회에서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말씀을 듣고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실현해야 하며, 교회에서 찬양과 예배를 통하여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주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은 신자가 떠나거나 벗어나야 할 자리가 아니다. 신앙적 가치가 실현되고, 주님의 나라가 확립될 자리이다. 신자로서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에는 주님의 부름을 따라 선택한 곳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활동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신자에게 직업은 생계나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 그 직장에서, 그리고 그 직업을 통해서 세상에 주님의 나라와 의를 실현하는데 있다. 직장을 선택에 있어서도 초봉이 얼마고, 승진이 잘되는가에 달려있지 않다.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는 직장도, 신자가 경영하고 신자가 일하기에 편한 직장도 아니다. 그 직장에 대한 주님의 계획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주님의 다스림이 확립되고, 주님의 의가 실현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성공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많은 연봉을 받고, 높은 지위까지 승진하고, 많은 성취를 남기는 것이 아니다. 하는 일을 통하여 어떻게 주님의 뜻을 실현하고 영광을 돌렸느냐에 신자의 성공이 달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치명적인 사고나 질병을 통해서, 혹은 평생 박봉에 말단으로 있으면서도 주님의 뜻을 실현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 주님 앞에서 성공자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성공한 사람이 진정한 성공자다. 세상적인 부귀나 명예, 영화는 모두 의복과 같다. 의복처럼 낡아지고, 잠자리에 들 때면 모두 벗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님 앞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상성은 팔복의 중요한 특징이다.

팔복은 이런 일상성의 가치에 눈을 뜨게 하는 말씀이다. 팔복서론에서 말씀드렸듯이 팔복은 선언이자 명령이다. 신자의 존재에 대한 ‘선언’이다. 신자는 이미 여덟 가지로 표현되는 예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 곧 ‘됨’(Being)의 선언이다. 동시에 팔복은 이러한 주님의 모습, 주님의 성품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할 ‘명령’이다. ‘함’(Doing)에 대한 명령이다. ‘됨’과 ‘함’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팔복이다. 그런데 이런 ‘선언’(됨)과 ‘명령’(함)을 포함한 팔복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팔복은 특별한 시대, 특별한 사람들(수도사나 신학자,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니다. 모든 시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말씀이다. 또한 팔복은 특수한 상황이나 특별한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하고, 실천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팔복은 주로 관계적이고 현재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팔복이 선포된 곳은 산상이지만(5:1), 그것이 실현된 곳은 산에서 내려와(8:1)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었다. 이를 정리하면 팔복은 모든 신자들이 현재적인 일상의 삶에서 따르면서 실천해야 할 영적 원리라는 사실이다.

 

특히 주님께서 산 위에서 내려오셔서 하신 첫 번 사역이 이러한 팔복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주님께서 산 위에서 내려오셔서 하신 첫 번 사역이 한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일이다(8:2~4). 당시 나병은 사람들과의 접촉이 금지되었던 치명적 병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금기(禁忌)를 깨고 그에게 직접을 손을 대시며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3). 여기에 병자를 향한 주님의 긍휼이 잘 나타나고 있고, 그 긍휼은 삶의 현장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몸소 실천해 보이신 뜻이 무엇일까? 이것이 주님의 영성이고, 주님의 영성의 핵심인 팔복의 영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상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팔복은 신자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할 말씀이다.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명령이다. 그런데 이것은 일상의 가치를 모르면 실천이 불가능한 일이다. 나병에 걸린 한 영혼의 가치를 모르면 그에게 긍휼을 베풀 수가 없다. 그래서 팔복을 일상성의 가치에 눈을 뜨게 하는 ‘일상의 영성’(ordinary spirituality)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됨’과 ‘함’의 우선순위 문제다. ‘함’은 반드시 ‘됨’이 전제되어야 한다. 팔복은 인간의 외향적인 '행위'가 아닌 내면의 '존재됨'을 우선 선언하였다. 주님은 먼저 산 ‘위에서’ 선포하시고, 후에 산을 ‘내려와’ 실천하셨다. 존재에 따라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수신앙은 ‘됨’을 강조하면서 산 위에만 관심이 있고, 진보신앙은 ‘함’을 강조하면서 산 아래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보수는 개인적이고 내세적이라 비판을 받고, 진보는 세속적이라고 비판을 받는 것이다. 건강한 신앙은 산 위로 오를수록 더 낮은 곳을 지향하고, 낮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먼저 높은 곳을 지향한다. 그래야 ‘거룩한 세속, 세속의 거룩함’을 이룰 수가 있다. 이것이 팔복을 통하여 보여주신 주님의 영성이다. 일주일 중에 주일이 중요하고, 하루 중에 새벽시간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주일 동안 산 아래서의 거룩한 세속을 위해, 하루 동안 산 아래서 세속의 거룩함을 위해 산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존재가 충만해야 영적 탈진이 없는 올바른 실천이 가능해진다.

 

안쪽을 향해 걸으라.

고든 맥도날드(G. MacDonald)의 「영적인 열정을 회복하라.」는 책에 래티 카우먼(Lattie Cowman)의 아프리카 식민지 역사에서 따온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아프리카 정글에서 한 여행자가 길고 힘든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짐을 옮기기 위해 한 종족에서 짐꾼들을 고용했다. 첫날 그들은 빨리 움직여서 멀리까지 갔다. 여행자는 이제 빠른 여행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둘째 날 아침, 그 짐꾼들은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여행자가 그들에게 이유를 묻자 그들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들은 첫날 너무나 빨리 갔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정신이 육체를 따라잡을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이 황당한 사건에 대하여 카우먼은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혼란스럽고 성급한 인생을 그 정글의 원주민들은 첫날 행군에서 겪었을 것이다. 우리와 그들의 차이는, 그들은 생활의 균형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우리는 너무나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쁘게 산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삶을 그만큼 열정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 삶을 치열하고 역동적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바쁘고 분주한 삶은 마음의 피로와 영혼의 탈진으로 이어지게 되고, 자발성이나 즐거움이 없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회전목마와 같은 매너리즘에 빠질 수가 있다. 이와 같은 분주한 삶의 약점을 예견한 것처럼, 한자로 바쁠 ‘망’(忙) 자는 마음 ‘심’(心) 자와 죽을(잊다. 잃다) ‘망’(亡) 자로 되어 있다(忙=心+亡). 바쁘다는 것은 ‘마음이 죽은 것’(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뜻이다. 바쁘게 살다보면 소중한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고, 나아가서 마음이 죽을 수도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가 아니길 바란다.

 

영성이란 이런 바쁜 일상에서 ‘마음을 챙기고 정신을 가다듬는 일’이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영성을 ‘안쪽을 향해 걷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과 영혼에 관심을 갖는 것,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란 뜻이다. 죽은 마음을 회복하고 소생시키는 것, 그래야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팔복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주고 죽어가는 마음을 회복시켜주는 말씀이다. 이것이 일상에서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고 사명이다. 이 사명에 충실하여 팔복의 영성으로 충만한 삶을 살자. 그래서 주님으로 물든 인생이 되자.

 

 

※ 자료, 설거지와 일상생활의 영성

(이 글은 ‘거룩한 일상’에 대한 좋은 예라고 생각되어 소개합니다. 일상의 영성을 훈련하는데 좋은 안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저는 소위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고, 시간을 그렇게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하거나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에 시간과 열정을 사용해야지 일상의 소소한 일들, 예를 들어서 집 안에서 설거지나 청소 같은 것은 언제나 후순위로 두었습니다. 때문에 다른 가족들이 그 일들을 전담해야만 했습니다. 사실 결혼 전까지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 설거지를 하루만 미뤄도 집안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살림을 사는 것이 정말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요즈음 아내가 임신을 하고 나서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그래도 아내가 기뻐하고, 작은 손길로 집안이 깨끗해 진 것을 보면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물론 어떨 때는 정말 하기 싫은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조금 미뤄보기도 하지만 결국 설거지나 청소 같은 일을 하고 하지 않으면 정직하게 그 결과가 드러나니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설거지와 일상생활의 영성(설거지의 의미)

1. 설거지는 살림의 행위입니다.

설거지는 작고 평범하고 덜 중요해 보이는 일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을 제대로 만들어 주는, 살만한 환경으로 만들어주는 살림의 행위입니다. ‘살림을 산다.’는 말은 '죽음'에 대응하는 말입니다. 설거지나 청소 같은 일을 하루만 게을리 해도 사는 곳이 사는 곳이 아닌 환경이 되니까요. 설거지는 살림의 행위입니다.

 

2. 설거지는 깨끗하게 구비하는 행위입니다.

설거지는 정갈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릇이 깨끗해야 먹을 음식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선 정결하게 구비되어야 합니다.

 

3. 설거지는 공동체를 섬기는 귀한 일입니다.

설거지는 무엇보다 공동체를 섬기는 일입니다. 모두가 소위 중요한 일들을 하는 데만 나서고 설거지나 청소 같은 것을 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요? 허드렛일을 감당하는 이가 없으면 그 공동체는 제대로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이런 일을 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주부만 이런 일을 하라는 법은 없지요. 공동체는 함께 꾸려가는 것이니까요.

 

4. 설거지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설거지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힘들어하는 배우자를 위하여 청소를 주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백번의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설거지야말로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5. 설거지도 예배이며 사역입니다.

설거지도 주님께 드리는 삶의 예배이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섬기는 거룩한 사역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설거지를 하면서 드리는 기도 ▲

주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먹고 마시고 살아갈 즐거움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감사하는 마음과 섬기는 마음으로 접시와 그릇을 닦으며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나의 생활이 늘 정결하고 깨끗하게 주님 앞에 구비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정갈한 그릇이 될 수 있도록 몸과 맘을 깨끗하게 하여 주소서. 매일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는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이 일상적인 일들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가 되고, 공동체를 살리고 아름답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거룩한 섬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그래서 일상의 작은 일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기쁨을 찬양하며, 섬김의 즐거움을 누리는 매일이 되게 하여 주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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