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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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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968회 작성일 11-08-1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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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처럼

마5:13

2011. 8/14   08:00, 11:00

Life-house or Club-house

어느 해안에서 자주 배가 파선하여 익사자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던 몇 사람이 조그마한 ‘인명 구조소’(Life-house)를 만들어놓고 배가 파선할 때마다 쫓아가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 구조소에 의해 구조를 받은 사람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돈을 내고, 주변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구조소는 점점 커지고 화려해졌다. 그리고 이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도 생겨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일하게 되었고, 일하는 사람들의 수입도 많아졌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구조는 생명을 구조한다는 사명보다는 하나의 직업이 되었다. 계속 몇몇 사람들이 구조되어 왔는데, 그들 중에는 흑인도 있고, 인디언도 있고, 멕시코인도 있고, 때로는 멋진 카페트 위에 토하는 사람도 있었다. 구조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이 귀찮아졌다. 급기야 그들이 모여서 구조소를 생명을 구하는 곳으로 존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놀러온 사람들에게 빌려줘서 휴식공간(Club-house)으로 변경할 것인지를 놓고 투표했다. 결국 이곳이 전에 구조소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몇몇 구조장비만 전시해 놓고 휴식공간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생명을 구하는’ 장소가 ‘휴식과 여가를 즐기는’ 장소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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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서글프고 두려운 이야기다. 이것은 결코 남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고, 우리 교회의 이야기이다. 지난 주 주보 글에서 격투기 선수 표도르에 대한 이야기에서 언급했듯이 본질을 벗어나면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겉을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하고 현재 모든 일에 승승장구해도 그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외형적으로 얼마나 화려하고 얼마나 힘이 있는가! 그렇지만 지구 온난화로 흘러내리는 극지방의 빙하처럼 한국교회 곳곳에서 무너짐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신자와 교회에 대한 비난과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물론 지난 교회의 역사에서 세상이 교회에 대하여 호의적인 기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잘 안다. 그래도 신자와 교회를 두려워했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화려하고 힘이 있어도 존경보다는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겉은 화려해지고 사람들은 많이 모이지만 본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신자와 교회의 본질은 생명을 구하는 것인데, ‘생명을 구하는’ 장소가 ‘휴식과 여가를 즐기는’ 장소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자 본연의 자세, 교회 본연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을 본문은 ‘맛 잃은 소금’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니 제물과 같은 신자와 교회를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이 더욱 간절하신 것이다. 이런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소원이자 기도이고, 비전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오늘날 신자와 교회가 맛 잃은 소금이 된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정체성의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본연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본문이 바로 그 해답이다. 본문의 소금과 이어서 나오는 빛에 대한 비유는 신자와 교회의 사회적 사명과 관련된 주님의 말씀이다. 팔복영성으로 무장한 신자와 교회는 소금처럼 빛처럼 그 영성을 삶의 현상에서 실천해야한다는 것이다. 팔복에서처럼 여기서도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소금이 ‘되라’(명령)거나 소금이 ‘되리라’(약속)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미 소금‘이다’(선언)고 하셨다(13). 그것도 주님을 위한 소금, 교회를 위한 소금, 자신을 위한 소금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소금이라고 하셨다. 이는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identity)과 ‘사명’(calling)에 대한 말씀이다.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은 소금이고, 그 사명은 세상을 위한 것이다.

 

1. 신자와 교회는 ‘소금’이다.

마이클 그리피스(M. Griffiths)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교회」라는 책에서 오늘날 신자와 교회 모습을 ‘누더기를 걸친 한 소녀가 잿더미에 앉아 자신의 유리 구두 한 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광경’에 비유했다. 자신이 장차 왕비가 될 존재이면서, 그 증표로 유리 구두 한 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르고 있는 신데렐라의 모습,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신데렐라의 안타까운 모습이 오늘의 신자와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정체성이 분명해야 자신의 사명도 알고, 다른 사람이나 주변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주도적이 될 수가 있다. 오늘 신자와 교회가 본연의 사명을 잃고 휘청거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를 잊어버린 까닭이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소금’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금이나 다이아몬드처럼 값진 보석이 아니고 흔한 소금이냐고 불평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소금은 금이나 다이아몬드보다 값도 싸고 흔한 광물이지만 어떤 보석보다도 더 소중하다. 보석은 없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소금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다. 병이 들거나 몸이 쇠약해진 사람이 병원에 가면 가장 먼저 놓는 주사제 링거가 멸균식염수, 즉 소금물이다. 이 사실만 봐도 우리 몸에 소금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소금은 몸의 영양균형을 유지해주는 영양소이고, 혈액과 체액의 적절한 염도 유지로 몸을 썩지 않게 만드는 방부제다. 이 외에도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데 사용되고, 부패방지에 사용된다. 또한 다양한 재료들 속에 들어가 그들의 다양한 맛을 하나의 조화로운 맛으로 만들어가는 화목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주님은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9:50)고 하셨다. 소금을 화목의 상징으로 보신 것이다.

 

※여담이지만 소금이란 영어 단어(salt)는 라틴어 ‘살라리움’(salarium)에서 파생되었고, 여기서 ‘급여’(salary)와 ‘군인’(soldier)이란 단어도 파생되었다. 급여가 무엇인가? 본인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군인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사람이다. 소금이 곧 이와 같다는 것이다. 프랑스 시민혁명도 과도한 염세(鹽稅)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에서 시작되었다(우리말의 경우는 ‘작은 금’이란 뜻으로 小金이라고 했다고 함). 흔하지만 소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가 신자와 교회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2. 신자와 교회는 ‘세상을 위한 소금’이다.

여기서 신자와 교회를 소금(과 빛)에 비유한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세상이 ‘썩었고, 썩어가고 있다.’(어둡고, 어두워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다른 하나는 다른 존재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다. 소금이나 빛의 특징은 다른 존재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다른 존재들에게 밝음을 주기 위해 자신의 몸을 태워서 빛을 내는 것이 촛불이다. 소금도 생명을 유지하고, 맛을 내고, 서로 화목을 이루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시킨다. 신자와 교회 역시 다른 존재를 위하여 이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 자신을 내어 놓아야 한다(요12:24). 이런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존재의 회복이 있고,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가 있다. 소금이 교회 안에 가득 있어도 물에 들어가 녹지 않으면 단 한 잔(盞)의 물도 짜게 변화시킬 수 없고, 썩어가고 있는 단 한 마리 생선의 부패도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는 속담이 나온 것이다. 소금은 녹아야 제 역할을 한다. 자신을 내어놓아 아무런 형체도 없이 산산이 부서지고 완전히 용해되어 다른 물질 속에 침투될 때 변화를 일으킨다. 녹지 않으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사람들은 신자와 교회에게 말한다. ‘바닷물은 단 3%의 염분으로도 짠 맛을 내고 있는데, 한국 사회에는 그토록 많은 신자, 그토록 많은 교회들이 있으면서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 가짜가 아니냐?’고 말이다. 그 이유는 신자와 교회가 ‘가짜’여서가 아니고, ‘소금처럼’ 살지 않기 때문이다. 쌓여 있기만 할 뿐 녹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소금창고 곁에 있다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녹아야 변화가 일어난다. 가정에서 녹으면 가정이 변하고, 직장에서 녹으면 직장이 변화고, 일터에서 녹으면 일터가 변한다. 관계에서 녹으면 관계가 변한다. 우리는 소금이고, 소금은 녹아서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금의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불변성’이다. 소금은 다른 물질 속에서 완전히 용해가 되어 형체가 사라져도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다. 소금은 불에 태우고, 물어 녹여도 그 형체만 사라질 뿐 짠 맛은 그대로 유지된다(물리적 변화는 있어도 화학적 변화는 없다). 이런 불변성 때문에 구약시대에 ‘소제’(蔬祭)라는 곡물로 드리는 제사에 소금이 제물로 들어갔고(레2:13), 언약을 맺을 때도 소금을 먹었다(민18:19). 언약의 신실성과 불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주변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던진 것은 좋으나 소금처럼 그 ‘본질을 지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최남선이나 이광수 같은 이들은 우리 문학사에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고 뛰어들었으나 본질을 지키지 못하여 변절자가 되고 말았다. 이런 일은 신앙세계에서도 왕왕(往往)있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고 말한 것이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큰 숙제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먼저 ‘산 위로’ 올라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다음 ‘산 아래로’ 내려와 실천의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한 주간의 첫 날인 주일예배, 하루 첫 시간인 새벽예배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신앙의 말뚝을 깊이 박고, 믿음의 줄로 든든히 묶는 일이다. 그래야 본질을 지키면서, 안심하고 세상이라는 바다에 우리 몸을 던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소금처럼

요즈음 기업도 돈 잘 버는 유능한 기업, 그래서 안팎으로 이름을 떨치는 유명한 기업보다 ‘존경받는 기업’이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신자와 교회는 두 말할 것도 없다. 크기에 상관없이 본연의 사명인 복음에 충실하고, 이에 헌신하는 것이다. 즉 소금이 되었으니, ‘소금처럼’ 사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에 남을 배려하고 섬기면서 주변을 밝게 하고, 사람들로 미소를 짓게 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여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시키고, 그래서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기여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그 공동체의 ‘소금’이다. 신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비록 직급은 낮아도 나로 인하여 공동체의 어둡고 부정적인 부분들이 제거되고, 공동체가 올바로 서고, 건강하게 유지되고,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화목한 공동체가 되리라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또한 그렇게 하리라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내가 그 공동체를 위한 소금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이런 긍지와 자부심, 자신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신자의 모습, 교회의 모습이다.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어도 파수꾼만 깨어있으면 성을 구할 수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신자와 교회를 세상을 위한 소금이라 하신 것이다. ‘나는 소금이다!’ ‘나는 세상을 위한 소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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