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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943회 작성일 11-08-2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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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처럼

마5:14~16

2011, 8/21   08:00, 11:00

가로등의 시작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신자는 주님과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삶은 ‘무엇으로 도울까?’ ‘도울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어떻게 도움을 줄까?’ 하는 사소한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미국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B. Franklin)의 일화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무언가 유익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 대문 앞에 선반을 만들고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구입하여 그것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엔 이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집 안에 두어야 할 등을 집 밖에다 두는 것도, 밤새 불을 켜두고 기름을 낭비하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그 등불이 있어서 어두운 밤길을 다니기가 좋고, 멀리서도 방향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 둘씩 자기 집 밖에다 등불을 내걸기 시작했고, 길거리는 낮처럼 환하게 되어 저녁에도 활동이 편리하게 되었다. 비로소 그들이 프랭클린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로등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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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선한 의지와 작은 빛 된 삶이 가져온 놀라운 힘이다. 빛은 곧 생명이다. 빛이 있으므로 이 땅에 생명이 있다. 생명의 역사가 있고,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다. 프랭클린의 빛 된 삶에서 가로등의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여기 이 행복나무(happy tree)도 보라!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줄기가 뻗어가고 가지와 잎도 무성하다. 이처럼 소중한 것이 빛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빛이라고 한 것(요1:4)은 당연하다. 그런데 본문은 신자와 교회까지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신자와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이 땅에서의 그 역할과 사명이 막중한가를 보여준다.

 

빛의 속성

본문은 앞의 소금의 비유(13)와 함께 신자와 교회의 사회적 사명(책임)에 대한 말씀이다. 소금은 소극적인 태도에 대한 말씀이고, 빛은 적극적인 태도에 대한 말씀이다. 빛의 몇 가지 중요한 속성을 통해서 신자와 교회의 사명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등경(燈檠)위의 존재

첫째로, 빛에는 ‘숨길 수 없는 속성’이 있다. 빛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어 모든 실체를 그대로 보게 한다. 더럽고 깨끗한 것, 아름답고 추한 것, 선하고 악한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한 때 논란이 된 적이 있던 공항의 알몸투시 검색대, 병원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엑스레이가 바로 이와 같은 빛의 속성을 이용한 것들이다. 빛은 자신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지만 대상도 드러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문도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14,15)라고 한 것이다. 모든 것을 드러내고(“숨겨지지 못할 것”), 자신 또한 밝히 드러낸다(“등경위에 두나니”)는 것이다. 성경은 주님을 ‘빛’이시라고 했다. 주님 앞에서는 그 무엇도 감출 수가 없다는 뜻이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악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우리의 아픔과 슬픔, 질병, 한숨과 염려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쁨도, 소망도, 소원도, 우리가 한 말이나 행동이 선악 간에 모두 주님 앞에서 드러나게 된다. 주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빛의 속성이다.

 

그런데 본문은 신자와 교회 역시 ‘빛’이라고 하셨다(14).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신자와 교회의 모든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와 교회를 ‘등경위의 존재’라고 부른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①신자와 교회의 삶은 항상 노출되기 마련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②세상이 우러러 볼 수 있는 탁월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론은 하나다. 선악 간에 그 행위가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빛으로 드러나기 위해 깨어서 근신하고 정신을 차려서 삶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몸짓과 표정까지도 신경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사는 것이 탁월한 존재가 되는 길이다. 그래야 세상이 우리의 착한 행실, 탁월한 삶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16). 우리는 우리의 삶을 숨길 수 없는 ‘등경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질서와 의미를 갖게 하는 존재

조용한 카페에 모인 세 사람이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세상사를 탄식하고 분노하면서 비관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곁에서 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카페주인이 끼어들며 말했다.

 

‘아니, 여러분.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온통 자기 합리화, 어설픈 염세주의의 꼬리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흥분된 어조로 ‘그게 무슨 말이냐’며 되물었다. 그러자 카페주인은 미소 지으며 조용히 설명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일에 한탄만 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촛불이나 켜보십시오. 빛은 어둠을 뚫고 들어가지만 어둠은 결코 빛을 뚫고 들어오지 못합니다. 아무리 짙은 어둠도 약한 불씨 하나 꺼뜨리지 못하는 법입니다. 빛은 아무리 미미해도 어둠을 밀어냅니다. 우리가 작은 선행을 실천하는 편이 악을 논하며 탄식하는 것보다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둘째로, 빛에는 ‘어둠을 쫓아내는 속성’이 있다. 천하장사도 어둠을 무너뜨릴 수 없고, 어떤 최신의 무기로도 어둠을 정복할 수 없다. 어둠은 어떤 물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어둠을 물리치는 최선의 방법은 ‘빛’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물러간다. 그것이 아무리 미미해도 말이다. 창세기는 창조 전 세계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 여기서 ‘흑암’은 ‘혼돈’, ‘공허’와 함께 창조 전 세계의 상태를 의미한다. 동시에 ‘혼돈’과 ‘공허’의 원인이기도 하다. 어둠은 혼돈(무질서)과 공허(무의미)를 낳는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자(1:3), 혼돈이 ‘질서’로, 공허가 ‘의미’로 채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신 것이다. 혼돈과 공허를 걷어 내고 거기에 질서와 의미를 채워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다(창1:31). 여기서 “심히 좋았다”는 말은 ‘아름답다’(미적), ‘완벽/만족하다’(윤리적/종교적)는 뜻이다. 질서와 조화 속에 아름다운이 있고, 의미가 있어야 만족이 있다. 그러므로 빛은 우리에게서 혼돈과 공허를 몰아내고 질서와 의미를 준다. 그래서 삶의 아름다움과 만족을 갖게 한다.

 

신자와 교회는 ‘빛’이다. 그것도 ‘세상을 위한’ 빛이다. 세상의 온갖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다. 사망의 어둠을 쫓아내는 생명의 빛, 질병의 어둠을 쫓아내는 치유의 빛, 절망과 좌절의 어둠을 쫓아내는 소망의 빛, 무지를 쫓아내는 진리의 빛이다. 방탕과 방종, 불의와 부정, 불신의 모든 어둠에 속한 일들을 몰아내는 빛이다. 그래서 세상에 질서와 의미를 주는 존재이다. 어둠 때문에 뒤죽박죽된 질서를 회복하고, 텅 빈 곳에 의미로 채우는 존재다. 신자는 빛처럼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배경이 되고, 의미가 되는 존재가 되어야한다. 

 

깨워서 활동하게 하는 존재.

예전에는 해가지면 사람들이 활동을 멈추고 쉬었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 제가 살았던 시골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해가지면 아이들은 놀이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일 나간 어른들도 일손을 멈추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해가 뜨면 다시 활동을 했다. 물론 바쁠 때는 횃불을 걸어놓고 일을 하기도 했고,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밤이 늦도록 어른들은 둘러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런데 전기가 마을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사람들의 활동시간이 확대되었다. 전등의 밝은 빛 덕분에 어느 시간에든지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활동을 하고 일을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셋째로, 빛에는 이와 같이 사람을 깨우고 활동하게 하는 속성이 있다.

 

성경은 신자를 ‘파수꾼’에, 교회를 파수를 보는 ‘망대’에 비유하고 있다. 파수꾼은 ‘깨어서 지키는 사람’(watchman)이고, 망대는 ‘깨어서 지키는 곳’(watchtower)이다. 그런데 파수꾼은 단순히 깨어서 지키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위험이 닥쳤을 때는 사람들을 깨워서 그 위험을 알리기도 하고, 아침이 되었음을 알려서 사람들로 활동하게 했다. 이것이 파수꾼의 사명이다. 신자와 교회를 세상의 빛이라 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깨어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깨우는 존재’란 뜻이다. 사람들을 깨워서 활동하게 하는 존재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졸고 있는 말을 깨우는 ‘등에’(horse fly)라고 했다. 정신적/도덕적인 잠에 빠진 아테네 사람들을 깨우는 존재라는 뜻이다. 신자는 졸고 있는 말을 깨우는 ‘등에’와 같은 존재이고, 길을 잃은 사람에게 길을 찾아서 바른 길로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과 같은 존재다. 사망이라고 하는 어둠의 그늘에서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워서 생명을 위하여 살게 하고, 일하게 하는 것이 빛 된 신자의 사명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빛이 되게 하고, 빛 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빛을 재생산하여 그 빛을 확산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보름달 신자

달은 햇빛을 반사하는 부분에 따라 초승달, 반달, 보름달로 구분한다. 초승달은 달의 한쪽 부분만 조금 빛을 비추는 것으로 초저녁에 반짝 비추다가 사라져버리고, 반달은 반쪽이 빛을 비추는데 초저녁부터 밤중쯤 비추다가 사라진다. 반면 보름달은 달 전체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밝게 빛을 비춘다.

 

신자도 이와 같다. 주님의 빛을 조금 받으면 ‘초승달’ 신자, 주님의 빛을 반쯤 받으면 ‘반달’ 신자가 된다. 주님의 빛을 온전히 받으면 ‘보름달’ 신자가 된다. 초승달 신자는 주님의 빛을 조금밖에 못 받으니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찬양을 부르면서 예배를 드릴 때만 조금 빛이 있는 것 같다가 나가면 곧 사라져버린다.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별로 구분이 안되는 사람이다. 반달 신자 역시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신자 같은데 어떻게 보면 신자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보름달 신자는 언제나 충만하다.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듬뿍 받아서 온전히 비추기 때문이다. 같은 달이면서도 초승달, 반달, 보름달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태양과 달 사이에 있는 ‘지구’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을 가로막아서 초승달이 되고, 반달이 되는 것이다. 신자가 초승달 신자, 반달 신자가 된 것도 주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들 때문이다. 그것이 곧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1요2:16).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면 주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 온전히 비추는 보름달 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등경위의 존재, 질서와 의미를 주는 존재, 깨워서 활동하게 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빛을 온전히 받아 온전히 비추는 보름달 신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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