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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하게 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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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457회 작성일 11-08-28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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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하게 하는 삶

마5:17~20

2011. 8/28   08:00, 11:00

차이는 ‘틀린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란 二人三脚(이인삼각) 경기와 같다. 서로 맞추어 가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다. 가정생활이나 교회생활,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감자를 삶아먹다가 대판 싸우고 말았다. 아내가 감자를 삶아서 설탕과 함께 내놓으며 남편에게 먹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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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아니, 누가 감자를 설탕에 찍어먹어? 소금에 찍어먹어야지!’

아내: ‘별일이네, 어떤 집에서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나! 우리 집에서는 항상 설탕에 찍어 먹는데.’

남편: ‘그거 정말 이상한 집이구먼. 우리는 대대로 소금에 찍어먹는다니까.’

 

결국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느냐’, ‘소금에 찍어 먹느냐’ 하는 문제가 양쪽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까지 말하게 되면서 그 싸움에 돌아가신 조상들까지 합세하여 큰 전쟁되었고, 급기야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되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특히 부부만 보더라도 성격, 나이, 자라온 환경과 배경, 취미나 취향, 습관, 생활태도, 가치관, 신앙유형 등 어쩌면 공통점보다 차이가 더 많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부부를 딴 별에서 온 존재라 했겠는가?(「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그리고 이런 차이는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인간을 갈등 속에서 사는 존재라고 말한 것이다. 갈등에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갈등이 있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갈등이 있다. 부정적인 갈등은 차이를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파국이다. 차이는 다름(difference)이고 다양성의 표현이지 틀림(wrong)이 아니다. 건강한 관계, 성숙한 공동체는 다양성을 인정한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물론 여기에도 갈등이 있다. 그렇지만 슬기롭게 극복하여 유익한 결과를 낳는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는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획일적인 사회였고, 예수님은 최대 피해자였다. 본문 17절은 편협한 율법주의의 잣대로 주님을 율법의 파괴자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변명이면서 동시에 이런 저들의 잘못된 태도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이 말씀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본래의 의미와 정신은 사라지고, 형식과 절차가 자체적으로 힘을 갖고 지배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사회학이나 문화인류학에서는 ‘구조화’, 혹은 ‘기구화’라고 한다. 이렇게 구조화, 기구화 된 원리는 화석(化石)이 되고 만다. 반미운동을 예로 들면, 반미운동이란 무조건 미국을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주의화’ 되면 무조건 미국이나 미국과 관련된 것은 다 반대하는 것으로 변질된다. 친미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주의화’ 되면 미국이나 미국과 관련된 것은 무조건 다 좋다고 하는 것으로 변질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신앙세계도 예외는 아니다. 본문의 주제인 율법의 경우 원래 선하고 좋은 것이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율법주의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본래 정신은 잃어버리고, 율법의 조항과 문자에만 매어, 그것을 절대화/신성화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거기에 조종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 유대교와 유대인의 모습이고, 또한 문제점이었다. 사실 주님은 이와 같은 율법주의에 맞서 율법의 정신과 의미를 회복하여 재해석하고, 실천하였다. 율법의 정신, 종교의 핵심이 무엇인가? 사람을 사랑하여 그 생명을 구하고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주의화’ 되면 생명을 해치고 죽이는 흉기가 된다. 그래서 주님은 율법의 본래적인 의미와 정신에 따라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소외받은 사람들, 소위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는 세리나 창기들과 교제를 하셨고, 안식일일지라도 곤란에 빠진 사람을 보면 기꺼이 도와주셨다. 유대교의 규례와 상관없이 잔칫집에 가서는 즐겁게 먹고 마셨고,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는 것과 같은 겉치레에 별로 개의치 않으셨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꾸짖으시며(마23:), 율법의 본래적인 정신과 의미의 회복을 강조하셨다(마23:23). 하지만 주님의 이러한 행동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입장에 볼 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먹기를 탐하는 자, 술꾼, 귀신들린 자, 더 나아가서는 율법의 파괴자라고 비난하면서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다.

 

본문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씀이다. 주님은 자신을 율법 파괴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과, 주님 역시 그들처럼 율법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율법파괴는 신성모독과 함께 주님이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 역시 ‘주의화’가 낳은 참극이다. 주의화의 가장 큰 특징은 ‘획일화’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나와 다른 모든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 나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적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주님에 대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태도다. 만약 유대교 지도자들이 차이를 인정하고 주님을 영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나 신앙적 국가적 부흥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어리석음과 옹졸함이 오히려 자신들의 메시야를 죽이는 앞잡이 되고 말았다. 이런 비극은 차이를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인식하는 곳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파괴자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라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나와 다른 사람은 나를 파괴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세우고 온전하게 하는 사람이다.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본문 17절은 유대인들의 오해에 대한 주님의 변명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18,19절은 주님의 ‘율법(말씀)관’을 대변해 주는 말씀이다. 즉 말씀의 ‘영원성’(18)과 ‘중요성’(19)을 역설하신 말씀이다.

 

주님은 여기서 자신이 율법을 파괴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역설하신다. 사실 주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율법뿐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주님의 삶은 파괴의 삶이 아니라 살리고, 세우고, 회복시키고, 온전하게 하는 삶이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치료하여 회복시키시고, 악한 영에 사로잡혀 물과 불을 가리지 않고 넘어지는 사람들을 귀신을 쫓아내어 온전하게 하시고, 나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귀가 먹고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을 고치시고,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걷게 하셨다.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변두리 사람들을 중심인물이 되게 하셨다. 무엇보다도 죄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율법에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일들이다.

 

원시복음이라고 하는 창3:16의 말씀을 시작으로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에서 주님이 어떻게 오시고, 오셔서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교훈과 사역을 하시고, 어떻게 죽으시고, 어떻게 묻히시고, 어떻게 살아나시며,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이 세상이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를 예언하고 있다. 어떤 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직/간접적으로 주님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구약의 내용이 모두 합하면 적어도 1,5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모든 내용이 주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다. 아니 이 모든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다. 본문 17절은 이와 같은 주님의 삶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성취한다.’는 뜻이고, ‘완성한다.’는 뜻이고, ‘끝맺음을 해준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라! 율법이 이렇게 주님께 대한 예언의 말씀인데, 만약 주님께서 이 율법을 파괴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주님이 율법의 파괴자라고 한 것은 얼토당토 않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율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셨고, 오셔서 성취하셨다.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만물의 주인이신 분이 무엇 때문에 머리 둘 곳도 없을 만큼 빈천한 삶을 사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셔야 했는가? 죄라고는 하나도 없으신 그 분이 왜 죄인처럼 참혹하게 죽으셔야 했는가? 주님은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기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의 뜻을 꺾고 순종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랬다. 아무튼 이와 같은 주님의 삶은 우리에게 강력한 도전이 된다.

 

제자의 삶

본문은 두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하나는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틀림으로 인식하면 그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이 되지만 차이를 다름으로 인식하면 그는 나를 세우고 온전하게 하는 은인이다. 본문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 보면, 다른 사람의 존재는 나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해 진다. 나와 다른 사람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고, 좋은 동역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곧 믿음의 시각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데, 성장을 위해서는 오히려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유익하다. 물론 불편할 수는 있다. 하지만 늘 긴장하게 되고 깨어있게 되니까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기보다 나를 온전하게 하려고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로 환영하자! 나와 다른 사람을 품는 것은 나를 세우고 완성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의 사명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나와 다른 사람을 환영하고 품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신자의 삶은 죽이고 무너뜨리고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살리고, 세우고, 회복시키고, 치료하고, 온전하게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만약 17절 말씀이 단지 오해에 대한 변명이었다면 오해의 당사자들 앞에서 해야 하는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여기에 변명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뜻한다. 주님은 변명의 말씀을 통해서 제자의 삶에 대한 교훈을 주신 것이다. 제자의 삶은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파괴하는 삶, 무너뜨리는 삶, 죽이는 삶이 아니라 주님처럼 살리는 삶, 치료하고 회복하는 삶, 세우는 삶, 온전하게 하는 삶이어야한다는 것이다. 제가 금년 1월에 ‘되는 교회’, ‘되는 가정’, ‘되는 인생’, ‘되는 생업’, 이렇게 ‘되는’ 시리즈로 설교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되게 하는 사람’으로 마무리를 했다. 그렇다. 신자는 ‘되게 하는 사람’이다. 교회를 되게 하고, 가정을 되게 하고, 직장을 되게 하고, 관계를 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살리고, 세우고, 회복시키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온전히 세워지기를 소원하신다. 이와 같은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우리와 우리 교회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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