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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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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5,797회 작성일 11-09-0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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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삶

마5:17~(18,19)~20

2011, 9/4   08:00, 11:00

몸만 나가라.

현대사회를 ‘몸의 문제에 잠식당한 사회’(Susie Orbach)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몸의 주인이 아니라 몸이 나의 주인이 되어버린 가치전도시대다. 이런 가차전도시대의 우울한 상징인 다이어트는 말 그대로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건강한 삶이 아닌 날씬하고 예쁜 몸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던진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거래로 알려진 3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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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원주민이 영국인에게 소 3마리를 받고 주먹만큼 큰 다이아몬드를 내준 것.

둘째는, 약 380년 전 인디언이 지금 미국경제 심장부인 뉴욕의 맨하튼을 네덜란드 이주민에게 모포 몇 장, 담배, 그릇, 그리고 24달러에 내 준 것.

셋째는, 약 140년 전에 제정 러시아가 온갖 자원의 보고 알래스카를 미국에게 720만 달러에 판 것이다.

 

이 세 가지 모두, 그 후손들이 땅을 치고 후회한 일이다. 이런 어리석은 거래의 배경은 그 가치를 모른데 있다. 누구든지 가치를 모르면 어리석은 판단, 어리석은 결정을 할 수 밖에 없다. 지난 번 일본에서 지진과 해일로 많은 사람들이 사지로 휩쓸릴 때, 102세의 노인이 아들에게 ‘빨리 몸만 나가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동안 살면서 얼마나 수고하며 일궈놓은 터전인데,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을 참고 아끼면서 모았던 재산이고, 어떻게 마련하고 가꾼 집인데, 해일 앞에 서니 그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반면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었다. 그래서 빨리 몸만 나가라고 외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엄숙한 사실을 잊고 산다는 것이고,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중한 생명을 걸고 어리석은 거래, 어리석은 결단을 한다.

 

무상한 세상, 영원하신 말씀

본문은 우리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18,19절은 예수님의 율법관, 즉 말씀관이다. 특히 18절은 말씀의 영원성과 완전한 성취를, 19절은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18).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한하고 무상하다. 사람도 사물도 사상이나 제도도 권력도 재물도 이 세상도 결국은 끝이 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18절 말씀뿐만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도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8)고 하였고, 베드로 역시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하다는 고백이다.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이 말씀을 ‘계시의 말씀’이라고 한 것이다. 말씀이 거룩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그 분의 말씀이기 때문이고, 말씀이 능력이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그 분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영원한 것도 마찬가지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할 뿐만 아니라 성취가 절대 확실하다. 주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강조하셨다.

 

로마황제 쥴리앙((Julian)은 성경을 가장 극렬히 반대했다. 그도 한 때 신자였기에 기독교의 상황을 약간 알고 있었다. 그는 박해를 통해서는 기독교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 250년 동안 여러 황제들이 신자들을 박해했지만 오히려 신자의 수가 더 많아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성경의 허위성을 증명하는 것이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게 하여 성경의 허위성을 증명하려고 했다. 아래의 말씀이 이를 위해서 그가 선택한 성경구절이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21:24).

 

이 말씀의 전반부는 이미 성취가 되었다. 주후 70년에 예수님을 죽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유대인에게 임하여 예루살렘은 점령당하여 백성들은 포로가 되고, 성전은 훼파되었다. 당시 성전의 터는 쟁기로 갈아엎어졌고 영구히 사용을 금하는 땅이 되었다. 문제는 이 말씀의 후반부다. 성전이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다가 이스라엘의 회복 후에 다시 건축되리라는 말씀이다. 쥴리앙 황제는 로마제국의 힘과 자신의 권력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전에 성전을 재건하여 이 말씀의 성취를 막으려고 했다. 그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재건하라고 독려하면서 자신도 적극 후원했고, 각지의 유대인들은 이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역사가 기번(E. Gibbon)은 유대인들은 심지어 은그릇까지 동원하여 흙을 나르며 열심히 일을 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갑자기 지진과 함께 성전 터 가까운 곳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그치지 않는 바람에 공사를 진행할 수 없어 성전재건은 수포가 되었다. 결국 황제는 자신의 계획을 성취할 수 없었다.

 

붙들어야 할 소중한 가치, 하나님의 말씀

계획은 사람에게 있어도 그것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쥴리앙 황제 외에도 성경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시도들이 많았다. 물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비평가들과 시도들 뒤에 이렇게 생존해 있다. 성경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반드시 기록된 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말씀의 ‘영원성’과 ‘완전한 성취’는 말씀의 중요성과 연결이 된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믿을 수가 없고,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실현할 수 없는 피상적인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켜준다. 그래서 우리가 따라야 할 소중한 진리요, 품어야 할 소중한 가치인 것이다. 특히 주님은 본문에서 이러한 말씀의 중요성 한층 더 강조하신다. 말씀이 곧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가 되느냐, 큰 자가 되느냐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19).

 

우선, 주님은 천국에도 큰 자와 작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천국에도 분명히 사람마다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이 세상에서처럼 소유의 많고 적음, 신분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이 아니다. 천국에서의 크고 작음의 차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물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천국에서의 크고 작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에 있어서의 크고 작음이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복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에게 두 명의 자녀가 있다고 하자. 둘 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100% 동일하고, 자녀 됨에 있어서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교제의 정도나 친밀의 정도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천국에서도 사람마다 이와 같은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 있다. 사람은 중요하게 여긴 것을 소중하게 다룬다. 성악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아주 소중하게 다루고, 서예가는 자기가 사용하는 붓을 생명처럼 여긴다. 달리기 선수는 신발을 소중히 여기고, 사진작가는 카메라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면 신자가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을 아는 것에 비례해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말씀을 실천하는 것에 비례해서 우리의 영성이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사소한 것이라도 행하지 않고 잘 못 해석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작은 자요, 이를 순종하면서 바르게 해석하여 가르치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여기서 가르친다는 말에는 해석도 포함되어 있음). 그러므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now and here)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천국에서의 우리의 존재를 결정한다. 그러니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철저하게 순종하고, 올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잘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캐논(기준)이라고 한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천국에서의 삶까지 기준이 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말씀이다.

 

세 왕자

임종을 앞 둔 한 왕이 세상에 제일 귀한 것을 가져온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얼마 후, 맏아들은 흔들기만 하면 대군(大軍)이 생기는 부채를 가져왔고, 둘째는 돌리기만 하면 돈이 쏟아지는 맷돌을 가져왔다. 그런데 셋째는 진리가 담긴 지혜서를 가져왔다. 그러자 왕은 셋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군인도 중요하고, 돈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집과 같다. 말씀이 없는 인생은 기둥이 없는 집과 같다. 기둥이 무너지면 집이 무너지듯, 말씀이 없으면 그 인생은 곧 무너진다. 반면에 말씀대로 살면 길이 열린다. 잘되는 길이 말씀 안에 있고, 말씀 속에 힘과 능력이 있고, 길과 답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원하시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유일의 가치로 알고 소중히 여기자.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에 있어서 큰 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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