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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799회 작성일 11-09-2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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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필터링

마5:27~32

2011 9/25   08:00, 11:00

그냥 보지 말고, 생각을 가지고 보라!

noname01.jpg이것은 〈노인과 여인〉이란 그림이다.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을 보니 어떤 생각이 드는가? 너무 외설적이고, 불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유스러운 애정행각으로 생각할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 대한 내막을 알면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 그림은 푸에르토리코 국립박물관에 걸려있는 명화다. 그림에 나온 노인은 여인의 아버지다. 이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다. 그런데 독재정권이 노인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고, ‘음식물투입금지’라는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그래서 노인은 서서히 굶어 죽어갔고, 딸은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위해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거운 몸으로 감옥을 찾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고 아버지의 입에 자신의 젖을 물렸다. 이 그림은 부녀간의 사랑, 헌신,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다. 그래서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걸작’으로 자랑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보자. 이제는 어떻게 보이는가? 같은 그림인데,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왜 그럴까?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이 환경의 영향,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은 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좋은 환경의 사람은 주변에서 항상 좋은 것들만 보고 듣고 만나고 함께하다보니 자신 역시 그렇게 닮아 좋은 사람이 된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좋은 환경에서 나쁜 사람이 나오고, 나쁜 환경에서 좋은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이것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보느냐?’에 달렸다. 그렇다. ‘무엇을 보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보느냐?’ 이다. 위 그림에서 ‘그냥’ 보는 것과 ‘생각’을 가지고 보는 것의 차이를 확인했듯이 무엇이든 생각을 가지고 봐야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그냥 보지 말고, 생각을 가지고 보라! 오늘 본문 역시 이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8).

 

생각이 바뀌면 눈이 바뀐다.

지금까지 이 말씀이 잘못 해석되어 왔고, 번역도 잘못되었다. 그래서 개역개정에서 이렇게 바로 잡은 것이다. 개역성경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로 되어 있다. 단지 단어 두 개의 자리만 바꿔놓은 것 같지만 뜻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는 보는 행위가 생각을 앞선다. 보는 행위가 생각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는 것을 다스리면 생각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본문은 기독교 수도원과 금욕주의 운동의 근간이 되었던 말씀중 하나가 되었다. 3세기 경 이집트의 안바 안토니우스(St. Anthony)에 의해서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많은 번잡한 도시생활에서는 정결하고 깨끗한, 거룩한 생각을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사막 깊숙이 들어가서 극도의 금욕생활을 했다. 이것이 수도원과 금욕주의의 시작이다. 그는 평생을 이것들과 씨름했다. 그리고 교부 오리겐(Origen)은 음욕을 품지 않기 위해서 거세를 하기도 했다. 모두가 보는 것을 제한하여 생각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세상을 등지고 사막으로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만 불가능한 일이고, 비성경적이다. 주님은 이미 신자와 교회를 ‘세상을 위한 존재’(마5:13~16)라고 하셨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두 눈 부릅뜨고 살라고 했다(벧전5:8).

 

본문에서 주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생각이 보는 행위를 앞선다. 보지 못하도록 하지 않고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보지 말고, ‘생각’을 가지고 보라는 것이다. 그냥 보면 대상에 속거나 유혹을 받아 휘둘리게 된다. 쇼핑에서 과소비를 막는 방법은 구입해야 할 물건들을 미리 생각하고 가는 것이다. 그러면 진열된 물건들을 보아도 그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필요한 것만 찾게 되고 구입하게 된다. 반대로 물건을 잘 파는 사람은 자신이 팔고자 하는 물건을 먼저 보여주지 않는다. 물건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한 다음 그것을 보여주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구입하게 만든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할 때도 마찬가지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한 뱀의 전략에 잘 나타나 있다. 하와에게 접근한 뱀은 선악과에 대한 하와의 생각을 바꿔놓은 다음, 그 나무를 보게 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하셨는데, 뱀은 죽지 않고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리라(3:4,5)고 했다. 선악과에 대한 하와의 기존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다. 하와가 이렇게 바뀐 생각으로 그 나무를 보았더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3:6) 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말았다.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과 선악과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변했을 때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선악과 열매를 먹은 것은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생각 바꾸기

그러므로 보는 것에 영향을 주는 ‘생각’이 중요하다. 그래서 주님은 음란한 생각을 가지면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라며, 그런 마음의 생각을 경계하신 것이다. 본문은 십계명 제7계명(“간음하지 말라”)에 대한 주님의 해석이다. 제6계명처럼 여기서도 주님은 결과보다 ‘원인’, 행위보다 ‘마음’의 생각, 형식보다 ‘정신’을 강조하신다. 간음에 대한 유대인을 포함한 일반적인 견해는 합법적인 혼인 외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불륜행위로 한정한다. 하지만 주님은 마음에 품은 음란한 ‘생각’까지 간음이라고 하셨다. 인격살인을 강조하셨듯이 마음의 간음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제7계명의 정신은 정결한 생각, 깨끗한 마음, 순결한 생활에 있다. 이런 사람은 자연히 다른 사람의 순결도 보호할 수 있다. 이런 생활, 이런 관계를 위해서는 이와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 생각이 바뀌면 눈이 바뀌고, 눈이 바뀌면 인생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고,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단호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9,30).

 

이 말씀은 실제로 눈을 뽑고, 손을 자르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두 눈과 두 손을 만들어 주셨겠는가? 그리고 눈을 뽑고, 손을 자른다고 해결되지도 않는다. ‘눈’과 ‘손’은 우리 신체의 소중한 지체들이다. 눈은 감각기관의 주체이고, 손은 행위기관의 주체이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오른’ 눈이고, ‘오른’ 손이다. 우리나라에도 오른쪽과 왼쪽에 편견이 있지만 유대인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심지어 왼손잡이를 가리켜 ‘오른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삿3:15)이라고 했다. 이는 단순히 오른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다. 왼손잡이는 불구자란 뜻이다. 반면 오른 쪽은 더 귀하고, 더 영예롭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마음의 생각을 다스리기 위해선 소중하고 영예로운 것을 뽑고, 찍어내는 그런 단호함이 있어야함을 강조한 것이다. 주님께서 이런 극단적인 과장법을 사용한 것은 마음의 생각을 다스리는 일이 그토록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수도사 중에 어떤 사람은 일할 때 두 개의 바구니를 준비해놓고 바른 생각, 선한 생각이면 이쪽 바구니에 돌을 넣고, 나쁜 생각, 악한 생각이면 다른 바구니에 돌을 넣었다. 일을 마치고 저녁 때 바구니에 들어 있는 돌들을 세어보고, 악한 쪽이 많을 경우엔 그날 저녁을 굶고 기도했다. 하루 한 끼, 그것도 소량으로 먹는 식사마저 악한 생각을 징벌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눈을 뽑고, 손을 자르는 심정으로 생각을 다스리고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생각은 바람과 같다. 때로는 미풍처럼 속삭이고, 때로는 광풍처럼 휘몰아친다. 바람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저항할 수는 있고,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 생각도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저항할 수는 있고,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 마음의 생각을 다스린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쁜 생각, 악한 생각, 부정적이고 더러운 생각 등 땅의 것에 대한 생각을 모두 걸러내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생각을 다스리고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2)고 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무엇으로 이런 생각들을 다 걸러낼 수가 있을까? 그것은 거룩한 삶의 두 기둥 “말씀과 기도”(딤전4:5)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걸러내는 ‘거름망’(filter)과 같다. 우리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마음의 생각을 말씀과 기도의 필터에 통과시켜 정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마음의 생각을 바르고 참되게, 건강하고 아름답게, 경건하고 거룩하게 바꿀 수가 있고, 또한 사용할 수가 있다. 황진이(黃眞伊)의 말이다. ‘지족노선(知足老禪)은 30년을 벽을 쳐다보고 앉아서 공부했어도 역시 나에게 무너졌지만, 오직 화담(花潭) 선생은 여러 해 동안 친하게 지냈으나 마침내 흔들리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성인이로다.’ 생각이 다스려지지 않고 바뀌지 않으면 오랜 수도생활도 허사임을 보여주는 예다. 신앙생활에 진보가 없고, 눈에 보이는 현실에 쉽게 무너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에서 구체적인 간음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유발하는 마음의 생각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생각이 다스려지면 생활도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마음의 생각

한 농부와 그의 아내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갑작스런 돌풍이 몰아쳤다. 바람이 얼마나 급하게 내려쳤던지 이 부부가 자고 있던 주택이 통째로 날아갔고, 이 부부는 침대에 누워있는 그대로 어느 들판에 떨어졌다. 그 때 농부의 아내가 울기 시작했고, 농부는 아내가 놀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달랬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지금 자신이 놀라서 우는 것이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내가 당신과 30년을 함께 살았지만 이렇게 나란히 외출을 해본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러니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어쩌면 최악이라고도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환경과 여건보다는 이것 때문에 잘못 형성된 ‘마음의 생각’이 더 문제다. 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호들갑 떠는 그 마음, 그것이 마침내 큰 일이 일어나게 하고야마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23:7)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말도 긍정적이고, 보는 것도 긍정적이고, 그 인생도 그렇게 전개된다. 다른 사람까지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삐딱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말도, 보는 것도, 행동도, 그 인생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사람과 접촉하면 모두 그 영향을 받아서 온통 부정적이 된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술 권하는 사회’를 넘어서 ‘음란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 음란의 덫에서 우리 신자와 교회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마음의 생각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빌4:8).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생각을 필터링해야 한다. 이것만이 마음의 생각을 바르고 참되게, 건강하고 아름답게, 경건하고 거룩하게 갖는 비결이다. 이 음란한 세상에서 음란한 마음을 끊고,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우리를 주님께 드릴 수 있다. 그릇이 깨끗해야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의 생각이 깨끗해야 주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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