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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부터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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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537회 작성일 11-10-3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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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부터 개혁

롬12:1~2

2011. 10/31   08:00, 11:00(종교개혁주일, 성찬예식)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이슬람의 성자 ‘수퍼 바야지드’라는 사람은 자기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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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젊었을 때는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달라고 신께 기도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작은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아,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 누운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바야지드의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거창한 계획보다 먼저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가르쳐준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변하면 주변이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흔히 사용하는 속담으로,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도 곱다.’는 것도 같은 이치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상대가 먼저 내게 거친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거친 말을 하니까 상대도 그렇게 응수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탓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나 사실 따지고 보면 탓해야 할 ‘남’이란 없다. 모두가 내 탓인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의 모습에서 나의 이기심을 보고, 게으른 사람의 모습에서 나의 나태함에 채찍질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바뀌면 상대도 바뀌기 마련이다. 문제는 항상 ‘나’에게 있다. 바꾸어야 할 ‘너’란 없는 것이다. 내가 변하면 ‘너’가 변한다. 내가 변하면 가정이 변하고, 내가 변하면 교회가 변하고, 내가 변하면 사회가 변한다.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올해가 루터(M. Luther)에 의한 종교개혁(1517년 10월 31일) 제494주년이 되는 해다.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동행중에 있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은 일로 충격을 받아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1505년). 수도원 생활에서 그를 끈덕지게 괴롭혀온 질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의롭지 못한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역시 법학도다운 질문이었다. 하지 그의 수도원 생활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자신의 죄만 드러나고 죄책감만 점점 깊어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해결하고자 고해소(告解所)에 들어가 6시간씩 참회를 했으나 죄책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D. Erasmus)의 헬라어 신약성경에서 마침내 그 해답을 찾았다. 바울서신에 나온 ‘의’(義)라는 단어는 ‘의로운 상태’를 뜻할 뿐 아니라 ‘누군가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일 뿐 아니라 죄인들에게 의를 주시는 분이시고, 이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의는 도덕적 수양이나 종교적 열심(그식이나 고행 등)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이 때 그가 주목한 것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라는 말씀이다. 비로소 그토록 그가 찾아 헤맸던 말로 다할 수 없는 평화를 찾은 것이다. 그 평화는 그 진리를 향한 폭발적인 열정으로 변했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루터가 처음부터 천주교회를 개혁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진리를 향한 그의 폭발적인 열정에 불을 지피는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 건축완공을 위해 현금을 모을 목적으로 면죄부 판매를 허락했고, 테첼(J. Tetzel)이란 수도사가 면죄부 판매에 앞장섰다. 그는 돈 궤짝에 ‘땡그랑’ 하고 동전이 떨어질 때마다 ‘그대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다.’고 선언했다. 이 말도 안되는 주장에 루터는 격노했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모르나 그것을 깨달은 이상 테첼의 주장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면죄부 판매인과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와 논쟁을 벌일 논제 ‘95가지’를 분노에 차서 써내려갔다. 여기서 루터는 단지 면죄부에 대한 테첼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했을 뿐인데, 결과는 전 세계를 뒤흔들어놓고 말았다. 이와 같은 루터의 주장은 당시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된 인쇄술의 도움으로 독일을 넘어 전 유럽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아무튼 중세 천년의 천주교 아성에 도전하는 종교개혁은 루터 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루터라는 개인의 변화가 없었던들 종교개혁도 없었다.

 

무엇으로, 어떻게?

그리고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강조했던 사람이 ‘사도바울’이다. 원래 사울이라 불리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면서 이름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변화된 사람이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고, 마침내 세상이 변화되었다. 바울은 변화된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본문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강조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여기서 바울은 변화의 출발점이 제도나 환경, 혹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라는 점과, 그 중에서도 ‘마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 한 사람의 변화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사람의 뿌리가 곧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를 바꾼다는 것은 곧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이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즉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일찍이 스가랴 선지자는 세상 모든 일이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4:6)고 하였다. 마음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성경은 성령을 불에 비유하고 있다. 불에는 존재의 변형과 질의 변화를 일으키는 특징이 있다.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것이 물의 본성이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물의 성질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불로 끓여서 100도까지 올라가면 물은 수증기로 변하여 위로 올라가게 된다. 물의 형태와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이다. 성령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변화는 성령의 불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울 역시 본문에서 “변화를 받아”란 동사의 시제를 ‘수동’ 명령형을 사용하였다. 변화를 위해 힘써야 하지만 변화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성령으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곧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의 근거는 언약의 말씀인 ‘성경’이다. 우리의 마음은 제도나 전통, 수행을 통해서 바꿀 수 없다. 그럴수록 번민만 더욱 깊어질 뿐이다. 이것을 절실하게 깨달은 사람이 루터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죄를 고백하기 위해 고해소를 찾고, 금식을 했다. 심지어는 로마까지 방문하여 베드로 성당 빌라도의 계단을 주기도문을 암송하며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었다. 이와 같은 고행과 금식으로도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종교개혁의 핵심구호인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루터의 이런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개혁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구호가 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는 말이다. 개혁자 칼빈(J. Calvin)은 여기에 ‘개혁된’(reformata)이란 단어를 첨가하여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개혁이 개신교회의 중요한 ‘아젠다’(agenda)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처럼 교회는 정체해 있으면 안된다. 무엇이든 정체가 되면 썩기 마련이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개혁을 말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대상’과 ‘주체’다. 실패한 개혁의 특징을 보면 개혁의 대상은 항상 상대방이고, 제도나 구조와 같은 환경이고, 개혁의 주체는 사람이다. 특히 자기가 모든 것을 고치겠다고 호언한다. 아니다. 개혁의 대상은 ‘사람’이다. 사람이 변해야 제도나 구조와 같은 환경이 변한다. 또한 상대방이 아니고 ‘나’이다. 나로부터 개혁이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변해야 상대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그리고 개혁의 주체는 주님이시다. 주님만이 나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는 분이시다. 이 개혁의 계절에 주님을 통한 변화와 개혁의 대상이 바로 ‘나’임을 인식하자. 아울러 변화와 개혁에 민감하지 못하여 가정과 교회, 사회에 선한 영향이 되지 못한 점을 회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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